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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 텍쥐페리 지음, 최복현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이를 위한 동화 중에선 어린 나이에 읽으면서 웃을 수 있는 책이 있고, 나이가 든후 그 의미를 되새기며 미소짓게 되는 책이 있다. 전자의 경우가 독자의 연령과 수준을 고려하여 쓰여져 쉽고 아기자기한 재미를 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동화이면서도 삶의 철학이 녹아 오래도록 교훈을 줄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어린 왕자’는 후자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어른에게도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발상의 전환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어린왕자가 지금까지 명작으로 남아 우리에게 사랑 받는 이유일 것이다. 덕분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은 우리에게도 익숙하여 일상적 사물을 한번쯤 다른 각도로 보는 계기가 되고, 어린 왕자가 살고 있을 소행성 B612는 한번쯤 하늘의 별을 쳐다보게 한다. 이렇게 어린 왕자는 여러 가지의 의미로 인상을 남기지만 그중 백미는 ‘길들이다’라는 개념일 것이다. ‘길들이기’를 행함으로서 대상에 대한 애정과 책임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애정을 다룬 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이것을 배움으로서 자신의 장미가 가지는 의미를 깨닫는 것은 곧 우리가 주변 사물(혹은 주변 사람)에 대한 의미를 깨닫는 것을 나타낸다. 그럼 어린 왕자에게 장미꽃이, 여우에게 어린 왕자가 가지는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까?
어린 왕자에 나오는 사랑은 크게 세가지가 있다. 장미꽃의 어린 왕자에 대한 사랑, 어린 왕자의 장미꽃에 대한 사랑, 여우의 어린 왕자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이중 장미꽃은 어린 왕자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장미꽃은 어느날 소행성 B612로 떨어진 씨에서 태어난 것으로 자존심과 허영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이 차다고 불평하고,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데 결국 이것들은 어린 왕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당시엔)이러한 행동들을 진지하게만 받아들여 이해하지 못하고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1) 한편, 어린 왕자가 자신을 두고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안 순간의 장미꽃의 발언은 그동안 전하지 못한 진심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어린 왕자에게 사랑했음을 실토하는 장면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어린 왕자에 대한 원망도 담겨있다. 이러한 장미꽃의 사랑은 플라토닉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요구하는 태도에서 자기중심적인 면을 보이며, 자신만을 바라보길 바라는 것과 떠나는 어린 왕자를 원망함으로서 소유욕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린 왕자의 별에 장미의 향기를 선사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일종의 (자신으로의)동화를 꾀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일체화되길 바라는 형태로 보여지는 것이다. 육체적 사랑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제 되지 않았지만 이 책에 나타나는 장미꽃의 사랑은 플라토닉 사랑의 성격과 같다 하겠다.
어린 왕자의 사랑은 장미꽃의 사랑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일단 스스로도 그 감정을 늦게서야 깨닫는다. 오천송이의 장미꽃이 가득한 장미꽃밭을 봤을때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자신의 장미꽃이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건 자신이 특별하게 여기는 존재가 의미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2) 하지만 곧 여우를 만나게 되고 여우에게 ‘길들인다’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어린왕자와 여우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면서 어린 왕자는 자신이 장미꽃에게 길들여졌음을 깨닫게 된다. 어린 왕자가 장미꽃밭에 가서 자신의 장미꽃이 특별함을 말하는 대목에서 자신이 길들여진 장미꽃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음을 내비침으로서 그 사랑을 구체화한다. 이러한 어린 왕자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장미꽃에 대해선 그 자체만으로 사랑하는 타인 본위의 사랑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장미꽃을 위해 물을 준 일, 벌레를 잡아준 일, 불평과 하품을 들어준 일에 모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 사랑을 더 크게 만든다. 그 후에 여우로 인해 어린 왕자는 장미꽃을 위해 소비한 시간이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했음을 깨우치고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배움으로서 이 사랑은 완성된다. 장미꽃에게 맡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무거운 육신을 버리고 힘든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린 왕자의 사랑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어린 왕자의 사랑의 완성은 그 자신의 노력도 있지만 곁에서 길들인는 것을 가르쳐주고 그 책임을 일깨워준 여우의 역할이 크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지길 원했고, 길들여졌다. 길들이는 과정에서 기다려지는 시간에서조차 행복을 얻는 여우의 모습은 아름답다. 또한 어린 왕자에게 그의 장미꽃에 대한 책임을 말하면서 정작 길들여진 자신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는다. 어린 왕자와 서로 길들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길들여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어린 왕자가 장미꽃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떠날 수 있게 등을 떠밀어주는 모습은 자신의 사랑을 희생함으로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 또한 아가페 사랑으로 볼 수 있다. 어린 왕자가 떠나는 것에 슬픔을 느끼고 가슴아파하면서도 정작 잡지 않는 것은 어린 왕자가 갈길을 알기 때문이다. 헤어질 것을 알면서도 길들여지길 바라고 길들여지고도 더 이상 욕심내지 않는 것은 사랑 자체에 의미를 둔 행위이다. 어린 왕자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것은 숭고하게 여겨진다. 절대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주변 사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다. 에로스 사랑이 작품 속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작가가 새로운 생성의 문제보단 현재 존재하는 본질에 충실하고, 그 자체를 사랑하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플라토닉 사랑이 자기중심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을 추구하는 것으로, 아가페 사랑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저자가 말하려 했던 이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