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닮고 싶은 창의융합 인재 6
이수정 지음, 안경희 그림, 와이즈만 영재교육연구소 감수, 손영운 기획 / 와이즈만BOOKs(와이즈만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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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뛰어넘어 실천하는 천재 - 닮고 싶은 창의융합 인재 정약용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 정약용

다산 정약용을 표현하자면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면 아이들은 실학자? 개혁가? 라며
물음표를 던지고, 어렵게 생각하거나 호기심을 가지지 않고 재미없다는 생각을 먼저 할 수 도 있다.

너무 좋은데, 그 좋은 걸 어떻게 알려주지?라는 뜻의 비슷한 광고처럼
좋은 걸 아이들에게 어떻게 알려주지?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해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쉽고 재미있게 접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실학 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 정약용의
위대한 업적이나 그의 대단한 점만을 이야기하면 마음에 와 닿기보다 멀게만 느껴질 수 있다.

닮고 싶은 창의융합 인재 정약용에서는
개구쟁이 였던 정약용의 어린시절 부터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도록 만화 형식의 삽화와
함께 좀 더 재미있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견줄 만한 우리나라의 르네상스 인(人) 정약용

정약용과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
첫째, 둘 다 호기심 대장이라는 것이다.
둘째, 무엇이든 한번 빠지면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연국하고 또 연구하는 끈기가 있었다.
셋째, 둘 다 다른 분야까지 폭넓게 관심을 갖고 생각하는 사고의 확장서잉 큰 사람들었다.

정약용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무엇보다 중요하고도 중요한 것이
바로 백성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다.
정약용이 쓴 많은 책들은

백성들의 삶을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무긍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자라나는 아이들이
미래에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일들을 하게 될까?
그 무긍무진한 일들 중에서 나랏일을 하는 아이들도 있을텐데,
아이들의 마음속에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의 역할에 대해서
올바른 생각을 품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다.

 정약용의 일생을 한국사와 세계사를 함께 이해하기 편리하도록
보여주고 있다.
역사는 시대의 흐름을 알아가야 하며 그 시기의 세계사를 함께
알아가면 더욱 좋다.
정약용의 일생을 만나면서 그 시대의 한국사와 세계사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

 정약용 역시 어린시절 책읽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닮고 싶은 창의융합형 인재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책읽기이다.
모두 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궁금해 하던
어린 시절의 정약용

저기 보이는 저 멀리 보이는 산 말이야.
저 산이 우리가 올라와 있는 이 산보다 세 곱절은 높지 않아?
그런데, 이상하다? 왜 저 산이 여기 이 산보다 작아보이지?

그냥 그런 거지 당연한 거라는 대답에
정약용은 그것이 어찌 당연한지,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정약용은 이상하다고 여기고 궁금해 한다.
그렇게 구금한 것이 많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가 바로 정약용이였다.

무엇이든 당연하다고 여기기보다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면 더 알고 싶은 마음이 관심으로 연결되어
실천하는 정약용을 만든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짜여지고, 정해진 스케줄대로 움직여야하는 우리 아이들의 일상이
안타깝게 여겨진다.


 정약용하면 정조를 함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효심이 깊은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겨
제대로 된 능을 만들고 싶어했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아버지에 대한 효를 실천하기 위해 아버지의
능을 옮기는 일을 미룰 수 없어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이름 붙였다.
이 후 정도는 매년 여러 차례 현륭원을 방문 했는데,
어떻게 하면 2,000명이 넘는 사람이 더 수월하고 안전하게 건널 것인지,
어덯게 하면 백성들에게 주는 피해를 최소화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다
배다리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정조의 명을 받는 신하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했지만,
모두 책상머리에서만 연구한 탓에 계산도 맞지 않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정조는 마음 놓고 배다리 설계를 믿고 맡길 인재가 필요했고,
그래서 정약용을 불렀다.
정약용은 책상머리에서만 연구한 것이 아니고
직접 돌아보며 계산하고 여러번의 실험을 거쳐 배다리를 완성했다.

정약용은 모든 진리는 언제나 실천 속에서 나온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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