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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리뷰를 어떤 식으로 쓸까, 머리속으로 여러번 썼다 지웠다. 결국, 이 『잡문집』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알게 된, 내 눈에 들어온 문장을 인용하기로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거의 펜을 잡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글을 쓸 때는 시간과 노력이 상당히 많이 들었다. “남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남과는 다른 말로 이야기하라”라는 피츠제럴드의 문구만이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지만, 그것이 그리 간단히 될 리는 없었다. 마흔 살이 되면 조금은 나은 글을 쓸 수 있겠지, 라며 계속해서 썼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쓰고, 사랑의 야기를 쓰고, 사람을 울리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웃게 만들어 개개인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함을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역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허구를 만들어나갑니다.
음악이든 글이든 뭔가를 꾸준히 창조해나가야 하는 고단함은 기본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면 만들어진 작품에서 힘이나 깊이가 사라져버린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원고를 쓰려면 힘들었겠어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물론 시간과 노력은 들었지만 딱히 피곤하지는 않았다. 원래 남의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니까. 말하는 데 별로 자신이 없어서 누가 인터뷰하자고 오면 긴장해서 말을 제대로 못할 때가 많은 편이다(대체로 자기 생각을 유창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은 굳이 고생해가며 소설을 쓰지도 않는다). 대신에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그 중에서도 보통 사람들이 들려주는 보통 이야기가.
나는 일단은 소설가가 본업이고, 번역은 부업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그 말 그대로 소설을 쓸 때는 다른 무엇보다 소설 작업을 우선시한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가 가장 맑은 시간에 집중해서 소설을 쓴다. 그리고 나서 식사를 하거나 운동을 하고 ‘자, 이제 오늘 분량은 마쳤군. 이제는 뭘 해도 되겠어’라고 할 무렵에 슬슬 번역을 시작한다. (...) 번역의 신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앞으로도 좋은 번역을 해나가야겠다고 하루하루스스로를 다잡는다. 아직 갈 길은 멀고 번역하고 싶은 작품도 많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가인 내가 여전히 성장할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당초 소설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스물아홉 살까지는. 내가 십대에 동경하던 작가를 들자면 도스토옙스키고 카프카고 발자크였다. 아무래도 내가 이 작가들이 후대에 남긴 작품에 필적할 만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 결국 음악을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 도쿄에 조그만 재즈 클럽을 열었다. 낮에는 커피를 팔았고 저녁에는 바로 변했다. 평소에는 레코드를 틀고 주말에는 젊은 재즈 연주자들을 불러 라이브 공연을 했다. 그렇게 칠 년쯤 계속했다. (...) 스물아홉 살이 되고 난데없이 소설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뭔가 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딱히 대문호가 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데 소설을 쓴다고 해도 대체 뭘 어떻게 써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때는 ‘혹시 음악을 연주하듯이 글을 쓸 수 있다면, 그건 분명 멋진 일이겠지’라고만 생각했다. 머릿 속에서 나의 음악 같은 것이 강렬하고 풍성하게 소용돌이치는 느낌을 받을 때가 곧잘 있었는데 그런 느낌을 어떻게든 문장이라는 형태로 옮겨낼 수는 없을까. 내 글은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처럼 나는 글쓰기를 거의 음악에서 배웠다. 역설적이지만, 만약 그토록 음악에 빠져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소설가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설가가 된지 삼십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소설 창작의 많은 방법론을 뛰어난 음악에서 배우고 있다.
텔로니어스 멍크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인데, “당신의 연주는 어떻게 그렇게 특별하게 울리나요?”라는 질문에 그는 “새로운 음(note)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담는 거야.(It can't be any new note. When you look at the keyboard, all the notes are there already. But if you mean a note enough, it will sound different. You got to pick the notes you really mean!)”
소설을 쓰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어디에도 새로운 말이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드넓은 미지의 지평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는 비옥한 대지가 개척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