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나'라니.... 제목부터 달달한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이발소 그림이 뭔지는 몰라도 말이다. (처음엔 예전의 이발소를 그린 그림인 줄 알았는데, 책 속 이야기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첫 장부터 작가와 나의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잘은 몰라도 대략 10살 내외의 차이가 있을 둘 사이에 형성되는 공감대가 이렇게 많다면 우린 "그 때 그랬지"를 이야기할 사이쯤은 된다고 여겨졌다.
나의 추억은 흙냄새와 풀냄새와 귀뚜라미, 매미소리다. 4살 때부터 아파트에 살았어도, 내 추억은 언제나 거기서 시작이다.
입학할 때 왼쪽 가슴에 달았던 거즈 손수건이 콧물수건이란 건 40을 넘기고 나서 남편에게 들어서 알게 된 것이긴 하지만, 내게 주어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 뭔지 몰라도 무조건 외우고 검사를 받아야 했던 국민교육헌장에 질려 암기공포증이 생긴 건 나 역시 그랬고, 전쟁을 겪지 않아 잘 모르지만 무조건 공산당은 싫어해야 했으며, 놀이 문화 속 깍두기, 책받침, 등목, 나팔꽃, 종이 인형 등의 이야기는 사는 곳이 달라도, 시간이 달라도 작가와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숙제를 가방에 몽땅 챙겨넣고, 갈아입을 옷과 나의 간식이 될 몇 봉지의 과자를 챙긴 보따리짐을 들고 외갓집으로 가서 방학이 끝나기 일주일 전까지 지냈었다. 집에선 전기밥솥이나 압력솥에 밥을 먹었지만, 친척들이 다 모인 외갓집에선 가마솥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외갓집에서 지낼 때도 나만 있으면 압력솥에 한 밥을 먹었지만, 이모 삼촌네 식구들까지 다 모이면 대략 20명이 넘게 되어서 그땐 늘 가마솥밥을 해야만 했으니까. 밥 연기가 솔솔 올라가고 뚜껑이 열리면 누룽지를 얻기 위한 눈치싸움까지.
여름방학이 끝나갈 쯤엔 외갓집 근처에 살던 큰 이모네 밭에 있는 원두막에 사촌들까지 모두 모인다. 대여섯 명이 수박과 참외를 먹은 후엔 배를 깔고 누워 일제히 일기장을 펼친다. 그러면 나는 매일의 날씨와 우리가 무얼하고 보냈는지를 내 일기장을 보며 얘기한다. 물론 산으로 바다로 놀러다닌 일이 전부였지만. ㅋ (그 때의 나는 미술 숙제만 빼곤 진짜 성실하게 부지런히 잘했던 모범(?)생이었다.) 그렇게 매일매일의 하루 일정시간을 공유하고, 다음은 탐구생활을 펼치고 모르는 것을 서로 알려주며 빈공간을 채운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알차게 사촌들과의 추억으로 채운 시간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동네 친구들과 일상의 문화로 돌아간다. 그래봤자 같이 학교가고 집에 오고 숙제하고 노는거지만. (작가의 어린 시절 놀이와 똑같은 놀이들이라 신기했음.)
나의 이런 추억들을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싶었으나,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그래도 "초등학생 때까진 무조건 놀아야 된다!"주의의 엄마였기에 시간만 되면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여행도 다녔고, 전시회나 박물관에도 갔고, 캠핑도 다녔다. 큰 아이의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그 다음해 작은 아이의 담임선생님이 되었을 땐, 아이 손에 들려 보낸 체험학습 신청서를 받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