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자존감이 밥 먹여 주는 거 아니지. 그런데 그때는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먹고 사는 문제의 고단함’. 내가 최근에 들어서면서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생각이자 고민이다. 2010년대 한국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엮었다는, 막막한 현실을 이야기한 책인 만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과 내 이야기이자, 우리 세대의 이야기, <산 자들>을 장강명 작가는 세 가지로 분류했다. 이 이야기는 ‘자르기’, ‘싸우기’, 그리고 ‘버티기’를 하는 자들의 이야기, ‘산 자’들의 이야기다.
“이게 처음부터 다 계획이 돼 있던 거니?” 여자아이는 걸음을 멈췄다. 말문이 막힌 듯했다. 이젠 알바생 하나 자르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알바생 자르기>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여자아이를 아니꼽게 보는 과장 은영의 시선에 맞추어 썼다. 사실 누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힘들다. 각자만의 사정이 있고, 그 뒷배경은 정확히 서술돼 잇지 않아서 지레짐작만 할 뿐. 그렇기 때문에 이름보단 ‘여자아이’로 더 많이 서술된 혜미와 은영에게 안타가움을 느꼈다. 꼭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나야만 했던 걸까. 진심을 나누면서 오해하지 않는 쪽을 택했으면 어땠을까.
무의미하고 수치스러워. 삶의 의미를 박탈하고, 자존감을 깎고, 사회에서 격리하는 벌이야. 대기발령은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회사로 들어가 무시를 받느니, 본사에 남아 얼굴 붉히는 쪽을 택했다. 해서 선택한 것은 버티기, 즉 <대기발령>이었다. 버티기만 하면 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모욕적인 대우를 받게 되자 주인공 연아는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자기가 돈이 있다고 남의 존엄을 무시하면 안 되지. 그게 갑질이잖아. 그렇다면 또 다른 ‘갑질’의 형태로 여겨지는 대기발령. 이건 과연 옳은 것일까?
해고는 살인이었으므로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고, 해고자 명단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산 자’가 되었다. 노조 갈등과 파업을 다룬 <공장 밖에서>는 각자의 사정과 고민으로 시작된 노조와 파업을 다룬 이야기다. 서로 억울하고 원망스런 상황에서 타협은 곧 배신이었고, 배신은 끝을 의미했다. 대화로도 풀어갈 수 없을 만큼 오해가 켜켜이 쌓이고 쌓여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골이 깊어지게 되는 아슬아슬한 순간,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는 ‘산 자’와 ‘죽은 자’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던 <공장 밖에서>.
땅과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 땅 위에 있는 집을 허물고 새로 지을 권리가 있다. 그 집을 갖지 못한 채, 거기서 살기만 하는 사람들은 아무 권리도 없다. <사람 사는 집>은 재개발 과정에서 ‘법이 그렇기 때문에’란 이유로 제대로 보상받지 못해 투쟁하는 선녀의 이야기다. 그들이 용역들에게 맞선 최후의 수단이 자신들의 목숨뿐이었다는 사실은 그 지역에 새로 들어설 아파트들의 억소리 나는 분양가들과 대조되며 씁쓸함을 안겼다. 지금 주변에 있는 이 건물들의 이면에는 억지로 떠나야만 했던, 떠밀려 가야만 했던 원주민들의 아픔이 새겨져 있겠지.
제가 놓친 게 뭡니까? 애초에 뭔가 괜찮은 걸 노려볼 기회가 저한테 있기나 했습니까? 첫 시작은 취업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것, 어디에선가는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걸 스스로에게 입증하기 위해 시작한 대외활동이었다. 남들은 스펙쌓기 아니냐, 취업용 아니냐 하지만 <대외활동>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대외활동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신’이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그려낼 수 있었던 길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컵에 물은 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반 컵의 물을 마시느냐, 아니면 그마저도 마시지 못하느냐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음악을 공기처럼, 심지어 어떤 때는 공해처럼 받아들입니다. 음악은 이제 침묵보다도 더 값싼 것이 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이 배고픈 이유가 <음악의 가격>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을까. 음악노동자연대의 이야기를 담은 <음악의 가격>은 값이 싸다고 여겨지는 음악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시작되었지만 시대의 흐름과 엇나가며 허탈감을 느끼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대세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좋은 음악은 알려지게 되어 있다는 것.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행정실장과 학생 교감은 날지 않는 새들 같았다. 마지막으로 날아 본 게 언제인지도 모를 비둘기들이었다. 그밖에도 프렌차이즈 빵집과 개인 빵집, 총 세 개의 빵집이 경쟁하는 이야기를 담은 <현수동 빵집 삼국지>, 서로 밟아야지만 가질 수 있는 빛나는 자리,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잔인한 현실을 그린 <카메라 테스트>.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친절함인지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모두, 친절하다>와 급식비리와 학교비리를 다룬, 날지 않는 새들과 옳음을 택하지 않은 어른들을 비교한 <새들은 나는 게 재밌을까>까지. 총 열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연작소설 <산 자들>.
작가는 결과가 아닌 원인에 집중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런 행동을 취하게 하였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보니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가 어려워졌다. 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언론이 집중하고 바라보는 대로 접근하는 것에 익숙하다보니 <산 자들>의 이야기는 불편하기도 했다. 나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그래서 ‘공감’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노력할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공감 없는 이해난 자주 잔인해지고, 이해가 결여된 공감은 종종 공허해지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