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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평점 :
나는 지금껏 제각각의 많은 사람들로 살아 보았다. 무수한 역할을 떠맡아 봤다. 나는 한 사람이 아니다. 내 몸에는 군중이 담겨 있다. 나이는 439살이지만 생김새는 마흔 즈음. 1581년 프랑스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현재는 영국 런던에서 역사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특기는 은둔 생활하기와 주기적으로 이사하기, 그리고 신분 바꾸고 새 삶 살아보기가 있다. 취미는 셰익스피어, 찰리 채플린과 같은 유명 인사 만나기와 신대륙 발견하기, 서른 개 정도 되는 악기와 언어 구사하기 정도. 요즘은 이 세기 전 실종된, 단 하나뿐인 혈육인 딸아이 찾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게 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나는 톰 해저드, 천 년을 사는 남자니까.
톰 해저드는 ‘앨버’다. 절대 죽지 않는 불사신이라는 것도, 책에 등장하는 뱀파이어 같은 존재도 아니다. 앨버 역시 사람이다. 단지 노화가 보통 사람들보다 열세 배에서 열다섯 배 정도 느린 것 뿐. 마녀 사냥으로 어머니를 잃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두고 떠나야만 했다. 자신의 존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마음을 주고 사랑했기 때문에 몇 세기를 눈물과 비탄 속에 취해 살았던 톰 해저드. 몇 백 년이 흐른 이후, 그는 결심한다.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나는 내가 증오한 사람들이고, 또 내가 존경한 사람들이다. 나는 신나고 따분하고 행복하고 한없이 슬프다. 나는 역사의 양면에 서있다. 옳은 쪽과 그른 쪽 모두에. 한마디로 길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여태까지 그가 사랑했던 세 명의 사람-어머니, 그의 아내, 그리고 딸- 중 두 명은 세상을 떠났고, 한 명은 생사의 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의 일상은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 때문에 안 그래도 짧은 인생을 더 짧게 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8년을 주기로 이동을 하고, 신분을 바꾸고, 이름을 바꾸고, 직업을 바꾼다. 매번 다른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은, 몇 백 년을 살다 보니 진짜 자신의 모습을 잃었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그런 톰 해저드의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난다. 불과 2초 만에 벌어진 일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4세기만에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
사랑하면 안 되는 남자, 톰 해저드. 천 년을 사는 사람이지만 사랑에는 한없이 약한 사람.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했을 때 벌어졌던 끔찍한 일들을 떠올리면서 그녀를 밀어내려 애쓰지만, 어느새 자신의 인생으로 한 발짝 성큼 들어온 그녀를 그는 결국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을 금지한, 그런 규율 따위를 만들고 규율을 어긴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처리한 앨버들의 모임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깨닫는다. 다 부질없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바로 지금 이 순간뿐임을.
그렇다. 이제 분명해졌다.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면 비로소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시간이 열다섯 배는 더 많지만 여전히 시간에 구애받고 과거에 발목이 묶여 있었던 천 년을 사는 남자, 톰 해저드. 그는 사랑에 빠져서 사랑을 잃게 되었고 고통을 받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힘든 시간을 지내왔지만, 끝내 그 모든 것을 치유하고 극복하도록 용기를 준 것 역시 사랑이었다.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왜냐면 그가 바로 미래니까.
천 년을 살아갈 수 있다는 몇몇 특별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본 세상을 통해 내가 느낀 것은 딱 한가지였다. 생각보다 쓸데없는 일에 집착하고 애를 쓴다는 것. 물론 439년 동안 지구에서 살아온 톰 해저드 씨보다는 깨닫는 바가 덜 하겠지만. 16세기부터 21세기까지를 살아온 그가 <시간을 멈추는 법>을 통해 100년 남짓 사는 ‘하루살이’들에게 전하는 건 생각보다 단순한 진리다. 더 이상 앞을 보려 하지 말고 현재에만 집중하라고.
생각해보니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단순하지만 확실한, 그리고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강렬하고도 단순한 메시지를 매트 헤이그는 톰 해저드라는 천 년을 사는 남자의 입을 통해-‘천 년’을 살 수 있다는 점과 16세기에 태어났다는 것을 감안하면- 신빙성을 더했고 이 사실을 독자들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현재에 집중하고, 오늘 하루를 ‘충실이’ 살아 나가는 것. 책장을 덮으면서 내 주위에 있을 것만 같은, 너무나도 현실적이게 그려낸 톰 해저드를 궁금해 하고 찾게 되었다. 또 누가 알겠는가? 동안 소리 꽤나 듣는 주변 지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다 문득, 설마, 하게 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