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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훈의 『타워』를 읽었을 때 느꼈던 즐거움은 그의 문장이 가진 지적인 무게감과 편안함이었다. 이번에 읽은 『기병과 마법사』 역시 작가 특유의 세밀한 관찰력과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짚어내는 묘사 덕분에 초반 몰입감은 훌륭했다. 하지만 ‘판타지 전쟁‘이라는 장르적 배경은 나에게 양날의 검과 같았다.
논리적 현실성과 마법 사이의 괴리
소설 속 기병 전투 묘사는 놀라울 정도로 꼼꼼했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의 논리적 현실성은 탄탄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중세적 배경‘이 주는 제약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SF나 현대물이었다면 더 드라마틱했을 인물들의 선택이 배경의 한계에 갇힌 기분이었다. 여기에 ‘마법‘이라는 요소가 더해지자 긴장감은 완화되어 버렸다. ˝마법이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하지 않은가?˝라는 의구심은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의 가치를 희석시켰고, 결국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허황함으로 다가왔다.
평면적인 인물과 서툰 사랑의 묘사
가장 아쉬웠던 지점은 인물들의 감정선, 특히 ‘연모‘에 대한 표현이다. ‘은난조‘라는 캐릭터는 삼각관계를 형성하려다 만 것처럼 모호했고, 가정적인 인물로 설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느끼는 연모의 감정은 충분한 설명 없이 반복적으로 제시될 뿐이었다. 배명훈 작가 특유의 사랑에 대한 드라마틱한 서사는 여전했으나, 이번 작품에서는 그 동력이 일차원적이고 투박하게 느껴졌다.
권선징악의 유치함과 기시감 섞인 결말
이야기의 흐름이 지나치게 명확한 권선징악으로 흐른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선악의 구도가 뚜렷하다 보니 이야기의 끝이 다소 유치하게 다가왔고, 마지막 ‘초필살기‘와 같은 설정은 이미 다른 매체(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등)에서 보았던 아이템과 겹쳐 신선함이 떨어졌다. 아이디어를 풀어내는 방식 또한 힘이 빠지는 느낌이라, 장르적 취향을 극복할 만한 쾌감을 주지는 못했다.
결론: 취향의 지도를 확인하다
결국 이 소설은 나에게 ‘배명훈이라는 작가의 역량‘과 ‘나의 장르적 불호‘ 사이의 거리를 확인시켜 준 독서였다. 작가의 관찰력은 여전히 빛났으나, 판타지라는 틀 안에서 그 힘은 다소 분산된 듯하다. 앞으로는 판타지 전쟁물보다는 그가 가진 지적 통찰이 더 현실감 있게 발휘될 수 있는 현대물이나 정교한 SF를 기다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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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상황 묘사가 너무나 구체적이고 극적이라 그 숨 막히는 공기 속에 그대로 갇힌 기분이었다. 마침 오스트리아를 여행 중이었는데, 그 흐린 오스트리아풍경 속에서 불행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니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결말을 알고 읽었음에도 그 과정이 너무 생생해 오히려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지만, 책을 덮으며 남은 가장 큰 감정은 주인공 안톤 호프밀러를 향한 ‘용서할 수 없는 한심함‘이었다.
호프밀러의 연민은 처음부터 가짜였다. 부끄러운 마음에 실수를 수습하려던 비겁함이 시작이었는데, 상대방이 순수하게 받아주자 그는 거기서 멈추지 못했다. 원래라면 부끄러워하고 뉘우쳤어야 했는데, 그는 상황을 자기 마음대로 과하게 해석해 버린다. 마치 자기가 엄청난 자비를 베푼 양, 이들을 행복하게 만든 양 착각하며 스스로에게 취해버린 거다. 결국 연민이 상대방을 위한 게 아니라, ‘연민을 표하는 자기 자신‘에게 취해 있었던 건데, 나는 이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에게 묘한 매력이 있긴 했다. 케케스팔바 사연이나 콘도어 사연도 몰입감이 엄청났는데, 그들이 호프밀러에게 그토록 의지한 것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호프밀러는 이 약하고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영향력이 커지는 걸 두려워하면서도, 은근히 그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결과가 감당이 안 되니 달아나려고만 한다. 특히 마지막에 콘도어에게 부탁해 고백하는 장면은 정말 비겁함의 정점이었다. 여러 번 돌이킬 기회가 있었는데도 멈추지 않았고, 남을 망가뜨리면서 자기 의도와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구는 게 너무 한심했다.
마지막에 그가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행동했던건 일견 말이 되기도 하고 개연성도 있다. 하지만 호프밀러는 본질적으로 그릇이 작은 사람이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금세 잊고 또 다른 일에 정신을 쏟으며 평범하고 한심한 필부로 살았을 것 같다. 그 한심한 행동들을 끝까지 지켜본 나로서는 그에게 갱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작가의 역량은 정말 대단했다. 연민에 대한 통찰이 반복되는 것도 인상적이었고, 이야기의 짜임새가 아주 튼튼했다. 주인공의 심정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 이건 영화로 만들어도 배우가 연기하기 참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로는 이 생생함을 다 담지 못했을 것 같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공감하기 편한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이토록 집중해서 몰입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증명하는 것 같다.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마음이라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냉혹한 진실을, 나는 이 지독하게 몰입되는 소설을 통해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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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차를 보고싶은 이유가 따로 있으세요? 여자가 물었다. 용기가 필요해서요. 역무원이 대답했다. 그는 생전에도 마음이 무너질 때면 첫차를 보는 습관이 있었다고 했다. 조용하던 플랫폼에 약속처럼, 마법처럼, 때로는 기적처럼 첫차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없던 용기가 생겨났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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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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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이란 항시 어렵고 두렵고 또 조금은 외로워지는 일이므로, 이왕이면 설레며 감당하고 싶다.”
“그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세월이 그에게 다가와 섣불리 위로할 수 없도록”

운명에는 탄성이 있다. 어느 한때 우리는 마흔세 살쯤이고, 하루가 저무는 속도로 하루를 잃는 보통의 어른이다. 아이 일 때보다 훨씬 많은 비밀을 품고 살지만, 비슷한 스타일 의 외투 서너 벌 속에 스스로를 단정히 채워 넣는 사람이 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귀중하다는 표현과 나란히 붙 여놓고 볼 수는 있으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하지 않는 사람.
다만 우스워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진 땀을 흘릴 만큼 힘을 들여야 하는 사람. 그리고 이 모든 연극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배역이 하나 더 있다고, 나는 그게 들소라고 느낀다. 지금 저만치서 그게 오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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