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의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상황 묘사가 너무나 구체적이고 극적이라 그 숨 막히는 공기 속에 그대로 갇힌 기분이었다. 마침 오스트리아를 여행 중이었는데, 그 흐린 오스트리아풍경 속에서 불행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니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결말을 알고 읽었음에도 그 과정이 너무 생생해 오히려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지만, 책을 덮으며 남은 가장 큰 감정은 주인공 안톤 호프밀러를 향한 ‘용서할 수 없는 한심함‘이었다.
호프밀러의 연민은 처음부터 가짜였다. 부끄러운 마음에 실수를 수습하려던 비겁함이 시작이었는데, 상대방이 순수하게 받아주자 그는 거기서 멈추지 못했다. 원래라면 부끄러워하고 뉘우쳤어야 했는데, 그는 상황을 자기 마음대로 과하게 해석해 버린다. 마치 자기가 엄청난 자비를 베푼 양, 이들을 행복하게 만든 양 착각하며 스스로에게 취해버린 거다. 결국 연민이 상대방을 위한 게 아니라, ‘연민을 표하는 자기 자신‘에게 취해 있었던 건데, 나는 이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에게 묘한 매력이 있긴 했다. 케케스팔바 사연이나 콘도어 사연도 몰입감이 엄청났는데, 그들이 호프밀러에게 그토록 의지한 것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호프밀러는 이 약하고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 영향력이 커지는 걸 두려워하면서도, 은근히 그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다 결과가 감당이 안 되니 달아나려고만 한다. 특히 마지막에 콘도어에게 부탁해 고백하는 장면은 정말 비겁함의 정점이었다. 여러 번 돌이킬 기회가 있었는데도 멈추지 않았고, 남을 망가뜨리면서 자기 의도와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구는 게 너무 한심했다.
마지막에 그가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행동했던건 일견 말이 되기도 하고 개연성도 있다. 하지만 호프밀러는 본질적으로 그릇이 작은 사람이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금세 잊고 또 다른 일에 정신을 쏟으며 평범하고 한심한 필부로 살았을 것 같다. 그 한심한 행동들을 끝까지 지켜본 나로서는 그에게 갱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작가의 역량은 정말 대단했다. 연민에 대한 통찰이 반복되는 것도 인상적이었고, 이야기의 짜임새가 아주 튼튼했다. 주인공의 심정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 이건 영화로 만들어도 배우가 연기하기 참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로는 이 생생함을 다 담지 못했을 것 같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공감하기 편한 이야기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이토록 집중해서 몰입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증명하는 것 같다.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마음이라면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냉혹한 진실을, 나는 이 지독하게 몰입되는 소설을 통해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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