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 - 21세기 생태사회주의론
안드레아스 말름 지음, 우석영.장석준 옮김 / 마농지 / 2021년 9월
평점 :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미래가 불타고 있다 -나오미 클라인/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 -안드레아스 말름
언젠가부터 “역대 최강의 올여름 더위”라는 매스컴의 소란이 이제 연례적 행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더위의 원인으로 지구온난화를 꺼내 드는 것도 상식이 되었다. 너무도 끔찍한 파국이 예상되고, 이제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다들 모른척 외면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어쩌다 이렇게 되버린걸까?
<장면 1>
2003년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중 캐나다 여성운동가가
발언을 한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사람들이 소비주의의 노예가 되어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갇혀 있다는 거에요. 우리는 지구의 자원이 재생되는 것보다 더 빨리 자책감도 없이 써버리고 말았어요. 우리가 사는 경제체제는 우리의 탐욕을 정당화합니다. 우리는 성장을
쫓는 것에서 벗어나 삶의 질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녀가 발언을 하는 동안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젊은이들이 점차 적대적으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발언을 마치자 비난이
쏟아졌고, 그녀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장면 2>
[노 로고]로 유명세를 탄
나오미 클라인이 강연을 다닐 때다.
강연이 끝날 무렵이면 청중석에서
항상 이런 질문들이 나왔다. “어떤 운동화를 사야 될까요?”, “어떤
브랜드가 윤리적인 브랜드인가요?”, “어디서 옷을 사십니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제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요?” 민망한 답변이지만, <기후변화를 위해서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대답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원자화된 개인의
입장에서 지구의 기후 시스템을 안정화시키거나 세계경제를 변화시키는 데 막중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객관적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우리는 수많은 대중들이 참여하는 조직화된 세계적 운동에 참가하는 일원으로서만 이 엄청난 도전에 대응해 나설
수 있다.
이 두가지 장면은 우리에게
기후위기의 문제에 맞서 누구와 함께 해야하는가?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후위기 문제는 너무도 복잡하고
전세계적인 차원의 문제기에 선뜻 무엇을 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주제다. 때문에 쉬운 선택으로 가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적 실천이라는. 내 주위에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라는. 하지만 그 길이야 말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덮여 있다”는 단테의 고언을 되새길 필요가 있는 지점이다.
미국에서 포장재와 병, 캔 등 쓰레기들이 사회적 이슈가 되자, 그 병과 캔을 만드는 ‘아메리칸 캔’과 ‘오언스일리노이글라스’라는 회사는 “미국을 아릅답게”(KAB)라는
캠페인단체를 만든다. 이들은 쓰레기를 자주 버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뜻의 ‘리터버그’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쓰레기 문제가 개인들의 나쁜 습관 탓이라고
홍보하면서, “포장재는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만드는 것이다.”는 논리로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재빨리 돌려놓는데 성공한다. 그로부터 우리가 잘 알고 실천하고 있는 “재활용”이라는 주제가 대두된다. 이들은 “재활용”을 통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데 성공한다.
우선 재활용을 강조함으로써
쓰레기를 계속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재활용을 강조하면 쓰레기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이 아니라 부엌에서
쓰레기를 분류하는 사람들에게 떠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회용 포장재를 만들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문제가
없었을 터이지만 어쨌든 재활용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비난받는 대상이 바뀌었고 개인들이
책임을 떠안게 됐다. 둘째, 재활용은 미국의 쓰레기 실태를
은폐하는 구실을 했다. 재활용 대상은 대부분 ‘도시폐기물’로 분류되는 것인데, 가정, 학교, 공공건물, 식당과 호텔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 전체 쓰레기의 2퍼센트도 안된다. 98퍼센트 이상은 “광업, 농업, 제조업, 석유 생산과정에서 생기는 산업 쓰레기”이다. 따라서 개인들이 재활용한다고 해서 미국의 쓰레기 문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더욱이, 재활용으로 분리수거된 쓰레기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다른 쓰레기와 함께 매립된다. 또 대부분은 물질은 섬유질 파괴 때문에 한 번 밖에
재활용되지 못한다. 그리고 재활용되려면 해외에서 가공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운반하는 과정에서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탄소발자국에
초점을 맞추는 행위도 이와 비슷하다.
그래도 일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 보다 나은 것 아닐까? 과연 그럴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메탄 등 온난화 물질들의
절대 다수가 산업과 연관된 곳, 특히나 화석연료와 연관된 산업에서 발생한다. 사실상 개인적 실천을 통해 탄소발자국을 줄임으로써 미래의 파국을 막는다는 것은 공인된 판타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방송이나 신문 등 매체에서 홍보되는 것처럼 ‘작은
실천’, ‘소비패턴을 바꾸기’ 등을 통해 탄소발자국을 조금이라도
줄인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글쎄다. 이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현장을 찾아다니며 실천하는 작가와 화석경제에 대한 비판적인 생태사회주의자의 입을 통해 확인해보자.
나오미 클라인은 전작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기후위기의 문제를 상세히 설명하고 그
원인을 명확하게 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문제는 탄소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있는 화석연료 자본가 집단,
그 집단을 후원하며 기생하는 정치가와 관료들이야 말로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가장 강력한 이해집단들이다. 그리고 그녀가 5년 동안의 활동을 요약하며 보다 실천적이고 강력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책이 지금 소개할 [미래는 불타고 있다]이다. 여기서 되물어보자.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의미있는 ‘개인적 실천’’이란 어떤 실천들인가?
얼핏 생각나는 것들은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차량이용을 줄이고, 채식위주의 식사를 하고, 녹색소비를 하고 등등이다. 그럼 이 모든 실천들은 누가 할 수 있는 것일까? 바로 답이 나온다. 부유한 나라의 중산층 이상의 소위 ‘의식 있는 시민’이다. 중산층 이상의 여유가 있어야 태양광 주택도 짓고,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으니 채식으로도 지낼 수 있고, 개인적으로
시간을 조정할 수 있으니 짜여진 시간에 맞추기 위해 운전을 할 필요도 없다.
독일에서 녹색당이 환경오염과
기후위기의 대안으로 비행기 유류세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때 좌파당의 자라 바겐크네히트는
이렇게 답했다. “땀을 흘리며 생계를 꾸려가는 독일의 대다수 사람은 저가 항공 없이는 제대로 된 휴가 한 번 즐길 수 없고, 유가가 올라도 자동차를 몰지 못하면 직장에 출근할 수도 없는 게 현실인데, 오늘날 좌파는 이를 간과한다. 녹색당이 주장하는 이 같은 정책들은 저가 항공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휴가를 즐길 수 있고 차 없이도 출퇴근이 쉬운 대도시의 비싼 집세를 감당할 수 있는 계층의 머리에서나 나올 수 있다”고. 그녀의 말이 옳지 않은가? 자동차 유류세를 올리거나 주차비를 높여서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이 아니라, 시내 일정구역은 아예 개인자동차 진입을 금하고 대신 대중교통을 확대, 강화하는 것이 다수와 함께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내는 좌파적 실천이 아닐까? 사실 소비행태의 변화를 바꾸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개인적 실천이란, 실상 신자유주의 기업가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나오미 클라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우리는 개인에게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 이야기를 늘 듣고 산다. 우리는 소비자로서, 심지어 활동가 개인으로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이렇게 대단한 힘과 특권을 가졌으면서도, 우리는 대개 보잘것없이 작은 무대, 이를테면 개인의 생활방식이나 자신이 속한 마을이나 도시라는 무대에서만 활동한다. 그러면서 구조적인 변화, 즉 정책과 법률을 바꾸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할 몫이라며 외면한다.”
기후위기라는 문제를 가장 피해가 클 뿐만 아니라, 가장 다수를 구성하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한다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집합적 실천의 결과물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에서 안드레아스 말콤은 코로나19 사태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기후위기에는 립서비스로 일관하던 선진국 정부들이 코로나19 사태에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조치들을 시행했다. 사적재산권 보호를 지상명령으로 삼던 그들이 코로나가 확산되자 스페인은 민간의료시설을 단번에 국유화하고 의료장비 생산 잠재력 회사들에
국가계획에 맞춰 생산할 것을 지시했다. 또 이탈리아는 최대규모의 항공사 알리탈이아를 국가가 인수하는가
하면 영국은 철도를 사실상 국유화했다.
말름은 왜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에서는 이러한 조치들을 행하지 않는가 묻는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보다 강력한 국가의 개입, 그것도 자본의 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태 앞에서 자본에 대한 통제와 규율을 해법으로 삼고자 한다. 이를 위해 레닌을 소환한다. 생태적 레닌주의라는 유령을. 그가 생각하는 생태적 레닌주의란 첫째, 증상의 위기를 원인의 위기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레닌에게서처럼 전쟁(1차대전) 발발을 그것을 초래한 시스템에 대한 타격을 전환한다는 원칙이다. 둘째, 속도가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셋째, 국가를 이러한 방향에서 장악하고 필요한 만큼 강력한 방법으로 기존의 경제체제와 단절하며, 파국으로 치닫는 각 경제 부문들을 직접적인 공공통제 아래에 두고자 총력을 기울인다. 그는 지금 우리의 상황을 탄광 갱도가 붕괴되어 갇히게 된 것이고, 이런
재난 상황에서 실질적인 전환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강압적인 성격의 권위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GMO와 관련해 다수의 생물학자들에게 설문 조사를 했을 때 GMO가 유해하다는 답변이 채 30%가 안됐던데 반해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이를 부정하는 기후학자는 5% 남짓도 안되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왜 이토록 긴급한 사안에 대해 이처럼 느린 대응을 보이는 것일까? 어쩌면 장 피에르 뒤피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는 것은 지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그 지식이 믿음으로 변하지 않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빗장을 깨뜨려야
한다.”(경제와 미래 P214)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으로
바꿀 수 있을까? 뒤피는 운명이라는 허구에 의지하는 방법을 답으로 제시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어쩌면 이미 지나버린 것인지
하는 우울한 생각을 놓기 어렵다.
어두운 이야기의 끝을 희망으로
바꾸어보기로 하자.
여기서 퀴즈 하나, 2010년대 내내 해외에 배치한 의료인력이 G8국가들과 적십자와
국경없는의사회와 유니세프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았던 나라가 있었는데, 어느 나라일까? 정답은 쿠바다. 2005년 지진이 파키스탄을 으깼을 때, 카리브해의 가난한 나라 쿠바가 1년간 파견한 의료 노동자는 1,285명인데 반해, 그래도 인도주의적 국가로 꼽히는 캐나다가 파견한
인원은 고작 6명이었다. 2014년 에볼라가 서부 아프리카인들의
살을 찢었을 때, 허리케인 미치가 중미와 아이티공화국을 강타했을 때도 쿠바의료진이 선봉이었고, 그뿐 아니라 당시 쿠바 정부는 재해 지역 출신 의대생을 위한 장학금 제도를 새로 만들었다. 코로나가 한창일때, 다른 카리브해 섬들로부터 입항을 거절당한 코로나에
시달리는 유람선을 수용하기로 한 것도 바로 쿠바였다. 그 잘난 척하는 소위 선진국들의 얼굴을 빨개지게
만들었던 “의료 국제주의”의 전통을 따른 인도주의적 조치였다. 그리고 2020년 3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인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에 53명의
의료진을 파견한 나라도 바로 이 나라였다. 장기 비상사태의 시대에, 적어도
지구상의 국가 하나는 아직도 살아 있는 공산주의의 이상과 가느다란 줄로라도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세계는 감사해야 할 것이다.
말름의 책에서 이 글을
읽을 때도 그랬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울컥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언젠가 오래전에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고자 했으나, 이제는
잊혀지고 있던 아련한 기억들이 한편으로는 회한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질책으로 상기되면서, 하지만 그래도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희미한 희망의 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