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 - 21세기 생태사회주의론
안드레아스 말름 지음, 우석영.장석준 옮김 / 마농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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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미래가 불타고 있다 -나오미 클라인/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 -안드레아스 말름

언젠가부터 역대 최강의 올여름 더위라는 매스컴의 소란이 이제 연례적 행사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더위의 원인으로 지구온난화를 꺼내 드는 것도 상식이 되었다. 너무도 끔찍한 파국이 예상되고, 이제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다들 모른척 외면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어쩌다 이렇게 되버린걸까?


<장면 1>

2003년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중 캐나다 여성운동가가 발언을 한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사람들이 소비주의의 노예가 되어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갇혀 있다는 거에요. 우리는 지구의 자원이 재생되는 것보다 더 빨리 자책감도 없이 써버리고 말았어요. 우리가 사는 경제체제는 우리의 탐욕을 정당화합니다. 우리는 성장을 쫓는 것에서 벗어나 삶의 질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녀가 발언을 하는 동안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젊은이들이 점차 적대적으로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발언을 마치자 비난이 쏟아졌고, 그녀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장면 2>

[노 로고]로 유명세를 탄 나오미 클라인이 강연을 다닐 때다.

강연이 끝날 무렵이면 청중석에서 항상 이런 질문들이 나왔다. “어떤 운동화를 사야 될까요?”, “어떤 브랜드가 윤리적인 브랜드인가요?”, “어디서 옷을 사십니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제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요?” 민망한 답변이지만, <기후변화를 위해서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대답한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원자화된 개인의 입장에서 지구의 기후 시스템을 안정화시키거나 세계경제를 변화시키는 데 막중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객관적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우리는 수많은 대중들이 참여하는 조직화된 세계적 운동에 참가하는 일원으로서만 이 엄청난 도전에 대응해 나설 수 있다.


이 두가지 장면은 우리에게 기후위기의 문제에 맞서 누구와 함께 해야하는가?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후위기 문제는 너무도 복잡하고 전세계적인 차원의 문제기에 선뜻 무엇을 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주제다. 때문에 쉬운 선택으로 가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적 실천이라는. 내 주위에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라는. 하지만 그 길이야 말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덮여 있다는 단테의 고언을 되새길 필요가 있는 지점이다.


미국에서 포장재와 병, 캔 등 쓰레기들이 사회적 이슈가 되자, 그 병과 캔을 만드는 아메리칸 캔오언스일리노이글라스라는 회사는 미국을 아릅답게”(KAB)라는 캠페인단체를 만든다. 이들은 쓰레기를 자주 버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뜻의 리터버그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쓰레기 문제가 개인들의 나쁜 습관 탓이라고 홍보하면서, “포장재는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만드는 것이다.”는 논리로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재빨리 돌려놓는데 성공한다. 그로부터 우리가 잘 알고 실천하고 있는 재활용이라는 주제가 대두된다. 이들은 재활용을 통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데 성공한다. 

우선 재활용을 강조함으로써 쓰레기를 계속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재활용을 강조하면 쓰레기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이 아니라 부엌에서 쓰레기를 분류하는 사람들에게 떠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회용 포장재를 만들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문제가 없었을 터이지만 어쨌든 재활용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비난받는 대상이 바뀌었고 개인들이 책임을 떠안게 됐다. 둘째, 재활용은 미국의 쓰레기 실태를 은폐하는 구실을 했다. 재활용 대상은 대부분 도시폐기물로 분류되는 것인데, 가정, 학교, 공공건물, 식당과 호텔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 전체 쓰레기의 2퍼센트도 안된다. 98퍼센트 이상은 광업, 농업, 제조업, 석유 생산과정에서 생기는 산업 쓰레기이다. 따라서 개인들이 재활용한다고 해서 미국의 쓰레기 문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더욱이, 재활용으로 분리수거된 쓰레기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다른 쓰레기와 함께 매립된다. 또 대부분은 물질은 섬유질 파괴 때문에 한 번 밖에 재활용되지 못한다. 그리고 재활용되려면 해외에서 가공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운반하는 과정에서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탄소발자국에 초점을 맞추는 행위도 이와 비슷하다.


그래도 일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 보다 나은 것 아닐까? 과연 그럴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메탄 등 온난화 물질들의 절대 다수가 산업과 연관된 곳, 특히나 화석연료와 연관된 산업에서 발생한다. 사실상 개인적 실천을 통해 탄소발자국을 줄임으로써 미래의 파국을 막는다는 것은 공인된 판타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방송이나 신문 등 매체에서 홍보되는 것처럼 작은 실천’, ‘소비패턴을 바꾸기등을 통해 탄소발자국을 조금이라도 줄인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글쎄다. 이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현장을 찾아다니며 실천하는 작가와 화석경제에 대한 비판적인 생태사회주의자의 입을 통해 확인해보자.


나오미 클라인은 전작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기후위기의 문제를 상세히 설명하고 그 원인을 명확하게 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문제는 탄소가 아니라 자본주의다!”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있는 화석연료 자본가 집단, 그 집단을 후원하며 기생하는 정치가와 관료들이야 말로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가장 강력한 이해집단들이다. 그리고 그녀가 5년 동안의 활동을 요약하며 보다 실천적이고 강력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책이 지금 소개할 [미래는 불타고 있다]이다. 여기서 되물어보자.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의미있는 개인적 실천’’이란 어떤 실천들인가? 얼핏 생각나는 것들은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차량이용을 줄이고, 채식위주의 식사를 하고, 녹색소비를 하고 등등이다. 그럼 이 모든 실천들은 누가 할 수 있는 것일까? 바로 답이 나온다. 부유한 나라의 중산층 이상의 소위 의식 있는 시민이다. 중산층 이상의 여유가 있어야 태양광 주택도 짓고,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으니 채식으로도 지낼 수 있고, 개인적으로 시간을 조정할 수 있으니 짜여진 시간에 맞추기 위해 운전을 할 필요도 없다.


독일에서 녹색당이 환경오염과 기후위기의 대안으로 비행기 유류세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때 좌파당의 자라 바겐크네히트는 이렇게 답했다. “땀을 흘리며 생계를 꾸려가는 독일의 대다수 사람은 저가 항공 없이는 제대로 휴가 즐길 없고, 유가가 올라도 자동차를 몰지 못하면 직장에 출근할 수도 없는 현실인데, 오늘날 좌파는 이를 간과한다. 녹색당이 주장하는 같은 정책들은 저가 항공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휴가를 즐길 있고 없이도 출퇴근이 쉬운 대도시의 비싼 집세를 감당할 있는 계층의 머리에서나 나올 있다. 그녀의 말이 옳지 않은가? 자동차 유류세를 올리거나 주차비를 높여서 문제를 해결하려 것이 아니라, 시내 일정구역은 아예 개인자동차 진입을 금하고 대신 대중교통을 확대, 강화하는 것이 다수와 함께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내는 좌파적 실천이 아닐까? 사실 소비행태의 변화를 바꾸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개인적 실천이란, 실상 신자유주의 기업가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나오미 클라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우리는 개인에게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다. 우리는 소비자로서, 심지어 활동가 개인으로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이렇게 대단한 힘과 특권을 가졌으면서도, 우리는 대개 보잘것없이 작은 무대, 이를테면 개인의 생활방식이나 자신이 속한 마을이나 도시라는 무대에서만 활동한다. 그러면서 구조적인 변화, 정책과 법률을 바꾸는 일은 다른 사람이 몫이라며 외면한다.”


기후위기라는 문제를 가장 피해가 뿐만 아니라, 가장 다수를 구성하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한다면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집합적 실천의 결과물은 어떤 것이어야 것인가? [코로나, 기후, 오래된 비상사태]에서 안드레아스 말콤은 코로나19 사태에서 답을 찾고자 한다. 기후위기에는 립서비스로 일관하던 선진국 정부들이 코로나19 사태에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전에는 상상할 없는 조치들을 시행했다. 사적재산권 보호를 지상명령으로 삼던 그들이 코로나가 확산되자 스페인은 민간의료시설을 단번에 국유화하고 의료장비 생산 잠재력 회사들에 국가계획에 맞춰 생산할 것을 지시했다. 또 이탈리아는 최대규모의 항공사 알리탈이아를 국가가 인수하는가 하면 영국은 철도를 사실상 국유화했다.

말름은 왜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에서는 이러한 조치들을 행하지 않는가 묻는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보다 강력한 국가의 개입, 그것도 자본의 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태 앞에서 자본에 대한 통제와 규율을 해법으로 삼고자 한다. 이를 위해 레닌을 소환한다. 생태적 레닌주의라는 유령을. 그가 생각하는 생태적 레닌주의란 첫째, 증상의 위기를 원인의 위기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레닌에게서처럼 전쟁(1차대전) 발발을 그것을 초래한 시스템에 대한 타격을 전환한다는 원칙이다. 둘째, 속도가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셋째, 국가를 이러한 방향에서 장악하고 필요한 만큼 강력한 방법으로 기존의 경제체제와 단절하며, 파국으로 치닫는 각 경제 부문들을 직접적인 공공통제 아래에 두고자 총력을 기울인다. 그는 지금 우리의 상황을 탄광 갱도가 붕괴되어 갇히게 된 것이고, 이런 재난 상황에서 실질적인 전환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강압적인 성격의 권위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GMO와 관련해 다수의 생물학자들에게 설문 조사를 했을 때 GMO가 유해하다는 답변이 채 30%가 안됐던데 반해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이를 부정하는 기후학자는 5% 남짓도 안되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왜 이토록 긴급한 사안에 대해 이처럼 느린 대응을 보이는 것일까? 어쩌면 장 피에르 뒤피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는 것은 지식의 결핍 때문이 아니다. 그 지식이 믿음으로 변하지 않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빗장을 깨뜨려야 한다.”(경제와 미래 P214)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으로 바꿀 수 있을까? 뒤피는 운명이라는 허구에 의지하는 방법을 답으로 제시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어쩌면 이미 지나버린 것인지 하는 우울한 생각을 놓기 어렵다.



어두운 이야기의 끝을 희망으로 바꾸어보기로 하자.

여기서 퀴즈 하나, 2010년대 내내 해외에 배치한 의료인력이 G8국가들과 적십자와 국경없는의사회와 유니세프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았던 나라가 있었는데, 어느 나라일까? 정답은 쿠바다. 2005년 지진이 파키스탄을 으깼을 때, 카리브해의 가난한 나라 쿠바가 1년간 파견한 의료 노동자는 1,285명인데 반해, 그래도 인도주의적 국가로 꼽히는 캐나다가 파견한 인원은 고작 6명이었다. 2014년 에볼라가 서부 아프리카인들의 살을 찢었을 때, 허리케인 미치가 중미와 아이티공화국을 강타했을 때도 쿠바의료진이 선봉이었고, 그뿐 아니라 당시 쿠바 정부는 재해 지역 출신 의대생을 위한 장학금 제도를 새로 만들었다. 코로나가 한창일때, 다른 카리브해 섬들로부터 입항을 거절당한 코로나에 시달리는 유람선을 수용하기로 한 것도 바로 쿠바였다. 그 잘난 척하는 소위 선진국들의 얼굴을 빨개지게 만들었던 의료 국제주의의 전통을 따른 인도주의적 조치였다. 그리고 20203,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인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에 53명의 의료진을 파견한 나라도 바로 이 나라였다. 장기 비상사태의 시대에, 적어도 지구상의 국가 하나는 아직도 살아 있는 공산주의의 이상과 가느다란 줄로라도 이어져 있다는 사실에 세계는 감사해야 할 것이다.


말름의 책에서 이 글을 읽을 때도 그랬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울컥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언젠가 오래전에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실천하고자 했으나, 이제는 잊혀지고 있던 아련한 기억들이 한편으로는 회한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질책으로 상기되면서, 하지만 그래도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희미한 희망의 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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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크 - 뇌를 누비는 2.1초 동안의 파란만장한 여행
마크 험프리스 지음, 전대호 옮김 / 해나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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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크 뇌를 누비는 2.1초 동안의 파란만장한 여행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고 빠르게 변화하는 과학분야는 기존의 지식을 금방 낡고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에 항상 신간서적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뇌과학일 것이다. 이점에서 21년에 원서가 출간된 스파이크를 일독한다면, 최신의 흐름과 발전방향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양화 시킬 수 있는 측정도구들의 개발 덕분에 주류 과학에 편입된 뇌과학은 초기에 신경과학자 중심으로 다루어지던 것과는 달리 최근에는 출판되는 책들이 보여주듯 심리학, 인공지능, 의학 분야로 적용 폭을 넓혀가고 있다. 이 책은 실험실의 신경과학자가 쓴 것이지만, 원서 기준으로 20년 출간된 리사 팰드먼 배럿의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과 함께 읽으면 더 도움이 될 듯하다. (그 이유는 뒤쪽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그리 친절하지 않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최신 뇌과학의 성과들을 소개하고, 새로운 개념과 해석으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고자 하기에 독자들이 기본적인 뇌과학의 개념들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초반을 지나면서 지루해질 수도 있지만 좀 이해 안되면 안되는대로 넘어가고, 다음에 이해하지 하면 뒤쪽에 다시 설명이 나오기에 읽어나가는데는 큰 어려움은 없다.

책 제목에서 보이듯 저자는 스파이크를 통해 우리의 뇌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럼 스파이크란 무엇일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의 뇌는 소통을 위해 전기를 사용한다. 신경세포 각각, 뇌 속 860억 개 뉴런 각각이 가는 케이블을 따라 미세하고 짧은 전압 신호를 전송함으로써 다른 뉴런들에게 말을 건다. 신경과학자들은 그 짧은 신호를 스파이크spike”라고 부른다.” (P17) 이제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뇌영상은 대부분 PET(양전자방출단층촬영)이나 fMRI(기능성자기공명영상)이다. 울긋불긋한 색깔로 뇌의 활동을 보여준다고 하는 사진들 말이다. 하지만 이 뇌영상들은 한계가 분명하며, 제공하는 정보 역시 제한적이다. (이 영상들의 한계에 대해서는 앨런 재서노프의 [생물학적 마음] 4장을 참조하라) fMRI의 경우 하나의 색점(픽셀)이 뉴런 10만개를 나타낼 정도로 성긴 도구인 것이다. 하지만 이 도구들은 비침습적인 덕에 인간에게 사용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해상도가 훨씬 높은 도구인 스파이크는 인간에게는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내용들은 모두 동물실험에 근거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뉴런 활동에 대한 기존의 설명에는 누락되어 있어. 이 책이 신간으로서 이름값을 하게 만드는 것은 암흑뉴런자발적 스파이크라는 개념이다. 먼저 암흑뉴런을 살펴보자. 뉴런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이 스파이크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원리적으로 우리는 스파이크를 전송하지 않는 뉴런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 뉴런은 암흑물질과 유사할 것이다. 뇌 전체의 질량에서 한몫을 차지하지만, 우리가 보유한 어떤 측정장치로도 포착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때 뉴런 영상화 기술이 개발되었고 그 덕에 다음 사실을 알게되었다. 겉질에 있는 뉴런 각각에서 평균적으로 초당 1개의 스파이크가 발생한다. 하지만 그 1초에 스파이크를 점화한 뉴런은 채 10%가 되지 않는다. 90%가 침묵인 것이다. 뉴런은 제작 비용이 많이 들뿐더러 유지와 운용에도 많은 비용이 든다. 우리의 뇌는 매일 우리가 사용하는 전체 에너지의 약 20%를 사용한다. 그리고 뇌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약 25%는 단지 뇌세포들의 생존과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는데 쓰인다. 이로보아 암흑뉴런에 무언가 역할이 있는건 분명해 보이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아직 잘 모르겠다. 한데 이 암흑뉴런 중에서도 더 이상한 놈이 있다. 이른바 2형암흑뉴런이다. 그것들은 아무 탈 없이 점화하여 스파이크들을 연달아 전송한다. 그러나 그 점화는 무엇에 대한 반응도 아닌 듯하다. 그 뉴런들의 스파이크 출력은 외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유의미하게 변화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른 뉴런들에게 말은 하지만 분명 듣지는 않는 듯하다. 그것들은 외부 세계를 외면한다.


이제 자발적 스파이크를 살펴볼 시간이다. 우리는 스파이크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의해 모든 스파이크가 유발된다는 것이다. 즉 한 뉴런이 스파이크를 전송한다면 그 스파이크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과 연관되어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운동 겉질에 있는 스파이크는 우리가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에 망막에서 발생한 스파이크로부터 기원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많은 스파이크, 어쩌면 대다수의 스파이크는 외부 세계에 있는 원인에 의해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요청받지 않았는데도 발생하는 듯한 스파이크들을 뭉뚱그려 뉴런의 자발적 활동, 자발적 스파이크라고 부른다. 깨어 있고 행동하는 뇌에서 자발적 스파이크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이례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지만 어떤 압력에 의해서도 촉발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에 관한 메시지를 운반하지 않는 듯하다. 즉 코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신경과학의 난제 중 하나는 스파이크가 행동으로 이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평균 초당 1개씩 점화되는 스파이크로는 우리가 감각을 인지하여 행동으로 변환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해법은 바로 자발적 스파이크다. 뇌의 의사결정을 다루는 이론들의 제안에 따르면, 자발적 활동이 미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 모든 현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활동이 사전 정보를 코드화하기 때문이다. 결정에 앞서 특정 뉴런의 자발적 스파이크들이 점화하는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다. “이 몸의 기존 경험을 감안할 때, 나의 선택이 옳거나 가치가 클 확률에 대한 나의 현재 예측은 이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뉴런은 외부에서 정보가 들어오기 전에 자신의 예측을 전송한다. 따라서 그 예측은 임박한 결정을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내리기 위한 출발점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미뤄놨던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과의 친연성을 알아보자. 리사 펠드먼 배럿은 뇌가 예측 기관이라 주장하는 점에서 스파이크의 저자와 뜻을 같이 한다. 배럿에 따르면 이 경험을 구성하는 전체 프로세스는 예측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과학자들은 우리 뇌가 빛의 파동이나 화학물질을 비롯한 감각데이터가 뇌에 도달하기 전에 주변 세계의 실시간 변화들을 감지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우리 뇌는 몸의 장기와 호르몬을 비롯한 다양한 신체 시스템에서 관련 데이터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감지하기 시작한다. … 갈증이 났을 때 경험을 상기해보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물을 마시고 나서 몇 초 이내에 갈증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이 현상은 당연하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물이 혈류에 도달하려면 20분 정도가 걸린다. 그러니 물을 마시고 몇 초 만에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당신의 갈증을 해소했을까? 바로 예측이다. 뇌는 마시고 삼키는 행위들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동시에 물을 마시면 느끼게 되는 결과를 예상해서 수분이 혈액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훨씬 전에 갈증을 덜 느끼게 한다.” (P111) 그리고 하나 더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이제 우리는 상식을 위협하는 마지막 결정타를 살펴볼 것이다. 바로 이 모든 예측이 우리가 경험하는 방식과 반대 방향으로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무언가를 감지하고 그다음에 행동한다고 생각한다. 눈으로 적을 보고 그 다음에 소총을 드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뇌에서는 감지가 사실상 두 번째에 해당한다. 뇌는 집게손가락을 방아쇠로 가져가고, 그 움직임을 지원하기 위해 신체예산을 변경하는 것과 같이 행위에 먼저 대비하도록 배선되어 있다. 또한 뇌는 이러한 예측들을 감각계로 전송해 손가락 끝의 차가운 강철의 느낌과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을 예측하도록 배선되어 있다.” (P116) 뇌에 대한 내재성의 관점이라고 할 만한 이 관점을 마크 험프리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의 풍부한 내면적 삶은 뇌 전체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스파이크들의 전송과 수용이다. 그렇다면 스파이크에게 가장 중요한 여행은 입력에서 출발하여 출력에 이르는 여행이 아니라 영원한 순환, 영원히 뇌 안에서 맴도는 것이다.” (P316)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유아기때부터 경험에 의해 형성된 뇌의 뉴런망은 잠재적으로 모든 경험을 해석하고 그에 대해 반응할 수 있도록 학습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학습된 경험들의 실체화된 표현이 자발적 스파이크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이 스파이크들은 경험을 어떻게 분절할까? 시각 피질을 예로 들면서 선, 모서리, 각 등을 담당하는 구역의 뉴런, 질감 색깔 등을 담당하는 구역의 뉴런 등등으로 사물에 대한 경험을 설명했지만, 어디 경험이란게 그런건가? , 그럼 최초의 경험, 즉 새로 맞닥뜨리는 대상과 비교할 수 있는 기억의 창고로서 경험은 어떻게 형성되는걸까? 또 뇌는 그것의 실체적 담지자인 스파이크는 최초의 것과 비교대상의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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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고통 - 우리는 왜 경쟁적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신동화 옮김 / 민음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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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고통]을 읽고 - 성별자기결정법에 대한 숙고를 위해


지난 11 1일 독일에서 법원의 허가 없이 자기 성별을 스스로 결정하고 등록할 수 있는 성별자기결정법이 발효되었다. 세계 17번째라는데 이를 둘러싸고 국내에서도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노무현정권때부터 법제화를 시도했지만 아직도 논의 중에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성별자기결정에 대한 조항은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 주류 기독교도들은 10 27일 광화문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 반대 집회를 가졌고, 인터넷 상에서도 일부 맘카페와 기독교 단체들이 미국과 유럽의 성별자기결정법에 시행에 따라 발생가능한 우려를 근거로 성소수자에 대한 배척을 부추기고 있다. 하지만 2023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권유와 65%에 달하는 찬성율이 보여주듯 국내의 여론도 포괄적차별금지법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고 있어 법제화가 곧 진행될 것이라 전망된다. 비록 우리의 경우 발의된 포괄적차별금지법 조항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성별자기결정 문제는 법 제정 과정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로 부각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성별자기결정에 대해 어떤 태도와 입장을 가져야 할지는 보기도다 어려운 문제였다. 보수 기독교도와 동성애혐오자들이 반대가 이 법에 찬성해야 하는 논거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이 내게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저자의 전작 [나와 타자들]과는 달리 목차들이 흥미를 끌었고, 비슷한 시기에 번역된 로버트 팔러의 [나쁜 삶의 기술]이 유사한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라서 한꺼번에 집어 들게 되었다. 상당한 사전 이해가 전제되고 배경지식이 필요한데다가, 짧지만 강렬한 내용이 담긴 밀도 높은 글이어서 한 번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꼼꼼히 재독해볼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을 통해 성별자기결정에 대한 주장이 어떤 이론적 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저자가 나르시시즘적 도덕’ – 사실상 형용모순이다 -으로 명명하는 오늘날 자기정체화 양식을 통해 성별자기결정이 갖는 함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첫 장을 여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닫을 때까지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약간의 변조를 띠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통주저음通奏低音으로 깔리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 바로 푸코에 대한 비판이라는.


사실 푸코와 마르크스 사이의 거리는 생각하는 것만큼 멀지 않다. … 우리가 보기에 푸코의 권력관계 분석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분석과 같은 차원에 있다는 스미다 소이치로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많이 있다. 푸코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 다수가 그의 권력론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자기의 테크놀로지에 비판의 초점을 맞춘다. [푸코의 이른 죽음으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린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열어 놓은 문제틀은 들뢰즈와 네그리를 비롯한 자율주의 전통 속에 이론적 배경으로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이에 대한 비판이 시급하고도 중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푸코에게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법 없는 규제, 또는 도덕 없는 윤리를 추구하는 실천이다. 법과 규제는 모두 개인에게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푸코 역시 외적 심급이 반드시 필요함을 기꺼이 인정한다. 개인이 자기 스스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돌보고, 변화시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규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때 외부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다. 법과 도덕은 개인이 순종해야 하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보편적 강제인 반면, 규제나 윤리는 외부이긴 하되, 개인이 자기 배려를 위해 창조해낸(구성해낸) 독특한 것이다. 때문에 윤리로써의 외부는 각각의 개인이 저마다 다르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각자 다른 외부가 된다. 다시 말해 보편적인 도덕이 아니라 개별적인, 더 강하게 단독적인 윤리라는 측면인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어째서 우리는 그러한 기준을 준수하는가? 어째서 우리는 스스로고안한 규칙을 따르는가? 여기에서 지젝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한 각주에서 그는 이렇게 밝힌다. “도착증자가 (…) 규칙을 정하는 것은 (그리고 규칙을 따르는 것은) 그의 정신적 우주에서 기초를 이루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즉 이 규칙은 일종의 대체 법으로 기능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윤리 규칙, 생활 태도의 고안된 규제는 마치법처럼 체험된다. 그것은 마치 도덕법처럼 기능함으로써, 부재하는 도덕법을 대체한다. 이러한 이유로 지젝은 푸코의 자기 배려의 개념을 비판한다. 지젝은 푸코가 그리는 고대의 이미지에서는 자기에 대한 배려가 보편적 법과 관련 없이, 금지 없이 잘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러한 고대의 이미지가 엄밀한 의미에서 환상적이라고 지적한다. 어떤 도덕적 질서도 없이, 즉 보편적 법의 지원없이 스스로 만든 규율이란 환상이며 신화라고. 결국 푸코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란 초자아가 아닌 자아이상의 지배하에서 작동하는 나르시시즘적 방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우리는 순서를 거슬러 왔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초자아와 자아이상의 호명의차이에 대한 분석과 나르시시즘에 대한 설명을 뛰어넘어 바로 푸코로 온 것이다. 이제 하나씩 다루어보자. 이미 지루해졌을 테니 짧게 다루기로 하겠다. 저자의 핵심 질문은 “21세기 계몽된 주체의 자발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이다. 그리고 답은 자발성은 본능처럼 자연적이지 않으며, 만들어지고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명을 통해서. 알튀세르의 말대로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자신의 현실적 실존 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표현한다.” 현실적 실존 조건과 상상적 관계라는 이항조로 구성되어진 것처럼 보이는 공식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상상적 관계가 이중분절 함으로써 3항이 된다. 상상적 관계는 자아가 맺는 자기관계로서 상상적인 것와 세계와 주체가 맺는 관계로서 상상적인 것으로 분절된다. 그리고 이 상상적인 주체를 통해 비로소 자발성이 가능해진다. 상상적인 주체를 경유하지 않고는 직접 현실적인 것에 가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상상적인 주체에 의해 열린 사회와 자아로서의 개인 간의 관계를 자아이상과 연관된 이차적 나르시시즘과 대양적 감정으로 다루어지는 일차적 나르시시즘에 대한 설명을 통해 사회와 개인의 연관을 해명하고자 한다. 특히 이차적 나르시시즘은 일차적 나르시시즘이 내부의 자아에 향하던 리비도를 자아이상이라는 외부로부터의 강요된 이상으로 방향을 바꿈으로써, 나르시시즘은 자아이상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렇게 구성된 외부는 차별화된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뉘어진다. 바로 초자아와 자아이상이라는.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초자아는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의 도덕법을 확립하고 양심의 가책을 수단으로 하여 정해진 질서에 자신을 끼워 맞출 것을 요구한다. 이와 달리 자아이상은 보편적인 특징을 가지되, 이상으로서 각각 특수하고 개별적이다. 자기애를 수단으로 하여 자기 변화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미적 압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아이상 역시 자발적 복종의 한 방식이라는 점이다. 이쯤해서 저자의 결론을 전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자발적 복종의 방식은 초자아의 호명에서 자아이상의 호명으로 변화해 왔다.”

이제 다시 푸코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로 돌아가자. 앞서 설명한 것처럼 푸코가 구성한 외부는 저마다 자기 규준을 갖는 것이기에 보편적 내용을 갖지 않는다. 그럼 나는 오직 나의 주관적 확신만이 나의 옳음을 주장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이 주관적 확신은 내가 나를 개인으로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개인으로서 경험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구체성을 어떻게 체험할까? 여기에 접근하는 특권적 경로는 감각이다. 느낌 속에서, 감정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개인으로 체험한다. 감정은 나르시시즘 도덕에게 고유성을 보증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오늘날 감정은 그토록 높은 사회적 위상을 차지한다. – 흥미롭게도 점점 더 헤겔의 (슐라이어마허나 야코비 같은) 낭만주의 종교비판과 너무도 흡사해진다 그리고 보편범주에 대한 거부인 이 나르시시즘적 도덕은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뉜다. 먼저, 자유주의적 버전이 있다. 이 버전에서 보편 범주의 거부는 세계에 대한 무제한적 요구가 된다. 그것은 자기 소망을 충족할 권리, 사익을 추구할 무제한적 권리, 절대적인 개인 자유의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의 세계라 생각하는 것에 대한 그러한 요구는 나의 절대적으로 구체적인 개별성을 주장하는 데에서 생겨난다. 다음으로 진보적 버전은 보편 범주의 거부는 마찬가지로 권리를 지향한다. 자아에 대한 무제한적 권리, 그러니까 규정된 범주를 거부하는 자아에 대한 권리다. 이로써 보편 규정의 거부는 규정된 역할이나 사회적 자리에 대한 전통적 거부를 훨씬 넘어선다. 자신의 구체성은 생물학적, 사회적 범주의 거부에까지 이른다. 두 경우 모두 자기 확신이 이 도덕의 토대다. 이 확신에게 사회적 기준과 사회적 역할은 모욕과 같다. 즉 자기 기획에 대한, 자기 규정성에 대한 모욕이다. 여기에서 나르시시즘적 도덕의 핵심 동기가 도출된다. 그것은 사회성의 부정, 자신의 사회성에 대한 부정이다.


이제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 성적자기결정법에 대해 들어볼 시간이다. 이 부분은 좀 길긴 해도 아예 통째로 저자의 말을 옮기는 편이 나을 듯싶다. “우리가 살펴볼 현상이란 자기 정체화다. 처음에 자기 정체화는 인종적 출신과 소속에 대한 정보 수집과 관련된 반()차별적 조치였다. 1990년 유엔은 민족적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 조치를 결정했고, 타인에 의한 차별적 범주화는 자기 정체화로 대체되어야 했다. 오늘날 특히 이른바 자기결정법 형식의 자기 정체화는 무언가 다른 것이 되었다. 행정 기술적 조치였던 자기 정체화는 정체성 주장의 본질적 형식이 되었다. 오늘날 자기 정체화는 성별과 관련해서 바로 타인에 의한 범주화로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범주화의 급진적 거부를 의미한다. 오늘날 성별은 더 이상 외부에서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에 의해서든 생물학에 의해서든. 오늘날 여러 곳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고 어떤 곳에서는 아직 논의 중인 자기결정법은 단지 의사 표현만으로 성별을 바꿀 권리를 승인한다. 자기결정법이란 가령 출생증명서에 기입된 부여된성별을 의학적 개입 없이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오로지 자신의 내적 감정에 근거해서, 즉 자기 정체화에 근거해서. 여기에서 우리는 사실로서의 트랜스젠더와 담론으로서의 트랜스젠더를 아주 선명히 구별해야 한다. … 여기에서 우리는 이 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담론으로서 트랜스, 무엇보다 자기 정체화는 하나의 범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통념과 달리(그리고 아마 트랜스인들의 자기 이해와도 어긋나게) 자기 정체화는 지배적 사회를 겨냥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배적 사회의 급진화된 표현이다.”(P275~7)


하지만 나는 나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여전히 무언가 부족하다. 여기서 타자의 동의가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타자는 진짜 타자가 아니다. 타자들은 내가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설정할 때 동의하는 역할에 한정되어야 한다. 타자들은 내가 규정하는 것에 그냥 동의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기 정체화의 원칙은 다음의 사항을 분명히 한다. 즉 타자는 나의 규정이 자신의 인식과 모순될지라도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가령 내가 나를 남성으로 규정하면 타자는 나를 남성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인식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이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비록 형식적으로라도 타자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의가 있어야만 국가에 의해 법으로 관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 라고 느낀다에서 나는 (….)라는 주장으로 옮겨 감으로써, 내가 나라고 확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언제나 타자의 외적 인정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정립이라는 형식의 외적 보편성의 강제로부터의 따라서 사회적인 공통성으로부터의 - 해방인 듯 보이는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미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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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표현 기호로서 예술 - 헤겔 미학 산책
이병창 지음 / 먼빛으로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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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에 대한 이병창님의 책은 항상 믿을만하다. 난이도 조절도 적절하고(너무 하나마나 한 해설이 아니면서도 헤겔에 태한 최소한의 이해만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은) 지적 호기심도 적절하게 채워준다. 읽고나면 헤겔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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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 가능성의 철학
아즈마 히로키 지음, 김경원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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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퇴보하는 저자. 사회변화를 아렌트에 기대서 사고하는거 자체가 해방의 관점에서 얼마나 멀어진것인지. 기껏해야 현재상태의 변화 이상을 생각할 수 없는 사상적 무능함. 현실을 핑게로 좌파와 리버럴을 동일시 하거나, 심지어 리버럴로 좌파를 대체하려는 무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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