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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의 고통 - 우리는 왜 경쟁적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신동화 옮김 / 민음사 / 2024년 6월
평점 :
[나르시시즘의 고통]을
읽고 - 성별자기결정법에 대한 숙고를 위해
지난 11월 1일 독일에서 법원의 허가 없이 자기 성별을 스스로 결정하고
등록할 수 있는 성별자기결정법이 발효되었다. 세계 17번째라는데
이를 둘러싸고 국내에서도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노무현정권때부터 법제화를 시도했지만
아직도 논의 중에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성별자기결정에 대한 조항은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 주류 기독교도들은 10월 27일
광화문에서 포괄적차별금지법 반대 집회를 가졌고, 인터넷 상에서도 일부 맘카페와 기독교 단체들이 미국과
유럽의 성별자기결정법에 시행에 따라 발생가능한 우려를 근거로 성소수자에 대한 배척을 부추기고 있다. 하지만 2023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권유와 65%에 달하는 찬성율이 보여주듯
국내의 여론도 포괄적차별금지법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고 있어 법제화가 곧 진행될 것이라 전망된다. 비록
우리의 경우 발의된 포괄적차별금지법 조항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성별자기결정 문제는 법 제정 과정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로 부각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성별자기결정에
대해 어떤 태도와 입장을 가져야 할지는 보기도다 어려운 문제였다. 보수 기독교도와 동성애혐오자들이 반대가
이 법에 찬성해야 하는 논거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이 내게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저자의 전작 [나와
타자들]과는 달리 목차들이 흥미를 끌었고, 비슷한 시기에
번역된 로버트 팔러의 [나쁜 삶의 기술]이 유사한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라서 한꺼번에 집어 들게 되었다. 상당한 사전 이해가 전제되고 배경지식이 필요한데다가, 짧지만 강렬한 내용이 담긴 밀도 높은 글이어서 한 번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꼼꼼히 재독해볼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을 통해 성별자기결정에 대한 주장이 어떤 이론적 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저자가 나르시시즘적 ‘도덕’ – 사실상
형용모순이다 -으로 명명하는 오늘날 자기정체화 양식을 통해 성별자기결정이 갖는 함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첫 장을 여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닫을 때까지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약간의 변조를 띠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통주저음通奏低音으로 깔리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 바로
푸코에 대한 비판이라는.
“사실 푸코와 마르크스 사이의 거리는 생각하는 것만큼 멀지 않다. … 우리가
보기에 푸코의 권력관계 분석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분석과 같은 차원에 있다”는
스미다 소이치로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많이 있다. 푸코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 다수가 그의 권력론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 책의 저자는 ‘자기의 테크놀로지’에 비판의 초점을 맞춘다. [푸코의 이른 죽음으로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린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열어 놓은 문제틀은 들뢰즈와 네그리를 비롯한 자율주의 전통 속에 이론적 배경으로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이에
대한 비판이 시급하고도 중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푸코에게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법 없는 규제, 또는 도덕 없는 윤리를 추구하는
실천이다. 법과 규제는 모두 개인에게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푸코
역시 외적 심급이 반드시 필요함을 기꺼이 인정한다. 개인이 자기 스스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돌보고, 변화시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규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때 외부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다.
법과 도덕은 개인이 순종해야 하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보편적 강제인 반면, 규제나 윤리는
외부이긴 하되, 개인이 자기 배려를 위해 창조해낸(구성해낸) 독특한 것이다. 때문에 윤리로써의 외부는 각각의 개인이 저마다 다르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각자 다른 외부가 된다. 다시 말해 보편적인 도덕이 아니라 개별적인, 더 강하게 단독적인 윤리라는 측면인 것이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어째서 우리는 그러한 기준을 준수하는가? 어째서
우리는 ‘스스로’ 고안한 규칙을 따르는가? 여기에서 지젝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한 각주에서 그는 이렇게
밝힌다. “도착증자가 (…) 규칙을 정하는 것은 (그리고 규칙을 따르는 것은) 그의 정신적 우주에서 기초를 이루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다. 즉 이 규칙은 일종의 대체 법으로 기능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윤리 규칙, 생활 태도의 고안된 규제는 ‘마치’
법처럼 체험된다. 그것은 마치 도덕법처럼 기능함으로써, 부재하는
도덕법을 대체한다. 이러한 이유로 지젝은 푸코의 ‘자기 배려’의 개념을 비판한다. 지젝은 푸코가 그리는 고대의 이미지에서는 자기에
대한 배려가 보편적 법과 관련 없이, 금지 없이 잘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러한 고대의 이미지가 “엄밀한 의미에서 환상적”이라고 지적한다. 어떤 도덕적 질서도 없이, 즉 보편적 법의 “지원”없이
스스로 만든 규율이란 환상이며 신화라고. 결국 푸코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란 초자아가 아닌 자아이상의 지배하에서 작동하는 나르시시즘적 방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우리는 순서를
거슬러 왔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초자아와 자아이상의 호명의차이에 대한 분석과
나르시시즘에 대한 설명을 뛰어넘어 바로 푸코로 온 것이다. 이제 하나씩 다루어보자. 이미 지루해졌을 테니 짧게 다루기로 하겠다. 저자의 핵심 질문은
“21세기 계몽된 주체의 자발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이다. 그리고 답은 자발성은 본능처럼 ‘자연적’이지 않으며, 만들어지고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호명을 통해서. 알튀세르의 말대로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자신의 현실적 실존 조건과 맺는 상상적 관계를 표현한다.”
현실적 실존 조건과 상상적 관계라는 이항조로 구성되어진 것처럼 보이는 공식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상상적 관계가 이중분절 함으로써 3항이 된다. 상상적 관계는 자아가 맺는 자기관계로서 상상적인 것와
세계와 주체가 맺는 관계로서 상상적인 것으로 분절된다. 그리고 이 상상적인 주체를 통해 비로소 자발성이
가능해진다. 상상적인 주체를 경유하지 않고는 직접 현실적인 것에 가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상상적인 주체에 의해 열린 사회와 자아로서의 개인 간의 관계를 자아이상과 연관된 이차적 나르시시즘과
대양적 감정으로 다루어지는 일차적 나르시시즘에 대한 설명을 통해 사회와 개인의 연관을 해명하고자 한다. 특히
이차적 나르시시즘은 일차적 나르시시즘이 내부의 자아에 향하던 리비도를 자아이상이라는 외부로부터의 강요된 이상으로 방향을 바꿈으로써, 나르시시즘은 자아이상에 대한 자발적 복종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데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렇게 구성된 외부는 차별화된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뉘어진다. 바로 초자아와 자아이상이라는.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초자아는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의 도덕법을 확립하고 양심의 가책을 수단으로 하여 정해진 질서에 자신을 끼워 맞출 것을 요구한다.
이와 달리 자아이상은 보편적인 특징을 가지되, 이상으로서 각각 특수하고 개별적이다. 자기애를 수단으로 하여 자기 변화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미적 압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아이상 역시 자발적 복종의 한 방식이라는 점이다. 이쯤해서
저자의 결론을 전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자발적 복종의 방식은 초자아의 호명에서 자아이상의 호명으로
변화해 왔다.”
이제 다시 푸코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로 돌아가자. 앞서 설명한 것처럼 푸코가 구성한 외부는 저마다 자기 규준을 갖는 것이기에 보편적 내용을 갖지 않는다. 그럼 나는 오직 나의 주관적 확신만이 나의 옳음을 주장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이 주관적 확신은 내가 나를 개인으로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개인으로서 경험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구체성을 어떻게 체험할까? 여기에 접근하는 특권적 경로는 감각이다. 느낌
속에서, 감정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개인으로 체험한다. 감정은
나르시시즘 ‘도덕’에게 고유성을 보증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오늘날 감정은 그토록 높은 사회적 위상을 차지한다. – 흥미롭게도
점점 더 헤겔의 (슐라이어마허나 야코비 같은) 낭만주의 종교비판과
너무도 흡사해진다 – 그리고 보편범주에 대한 거부인 이 나르시시즘적 도덕은 두 가지 버전으로 나뉜다. 먼저, 자유주의적 버전이 있다. 이
버전에서 보편 범주의 거부는 세계에 대한 무제한적 요구가 된다. 그것은 자기 소망을 충족할 권리, 사익을 추구할 무제한적 권리, 절대적인 개인 자유의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의 세계라 생각하는 것에 대한 그러한 요구는 나의 절대적으로 구체적인 개별성을
주장하는 데에서 생겨난다. 다음으로 ‘진보적 버전’은 보편 범주의 거부는 마찬가지로 권리를 지향한다. 자아에 대한 무제한적
권리, 그러니까 규정된 범주를 거부하는 자아에 대한 권리다. 이로써
보편 규정의 거부는 규정된 역할이나 사회적 자리에 대한 전통적 거부를 훨씬 넘어선다. 자신의 구체성은
생물학적, 사회적 범주의 거부에까지 이른다. 두 경우 모두
자기 확신이 이 ‘도덕’의 토대다. 이 확신에게 사회적 기준과 사회적 역할은 모욕과 같다. 즉 자기
기획에 대한, 자기 규정성에 대한 모욕이다. 여기에서 나르시시즘적
‘도덕’의 핵심 동기가 도출된다. 그것은 사회성의 부정, 자신의 사회성에 대한 부정이다.
이제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 성적자기결정법에 대해 들어볼 시간이다. 이 부분은 좀 길긴 해도 아예 통째로 저자의
말을 옮기는 편이 나을 듯싶다. “우리가 살펴볼 현상이란 자기 정체화다. 처음에 자기 정체화는 인종적 출신과 소속에 대한 정보 수집과 관련된 반(反)차별적 조치였다. 1990년 유엔은 민족적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 조치를 결정했고, 타인에 의한 차별적 범주화는 자기 정체화로 대체되어야 했다. 오늘날 특히 이른바 자기결정법 형식의 자기 정체화는 무언가 다른 것이 되었다.
행정 기술적 조치였던 자기 정체화는 정체성 주장의 본질적 형식이 되었다. 오늘날 자기 정체화는
성별과 관련해서 바로 타인에 의한 범주화로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범주화의 급진적 거부를 의미한다. 오늘날
성별은 더 이상 ‘외부에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에 의해서든 생물학에 의해서든. 오늘날 여러 곳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고 어떤 곳에서는 아직 논의 중인 자기결정법은 단지 의사 표현만으로
성별을 바꿀 권리를 승인한다. 자기결정법이란 가령 출생증명서에 기입된 ‘부여된’ 성별을 의학적 개입 없이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오로지 자신의 내적 감정에 근거해서, 즉 자기 정체화에 근거해서. 여기에서 우리는 사실로서의 트랜스젠더와 담론으로서의 트랜스젠더를 아주 선명히 구별해야 한다. … 여기에서 우리는 이 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담론으로서
트랜스, 무엇보다 자기 정체화는 하나의 범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통념과
달리(그리고 아마 트랜스인들의 자기 이해와도 어긋나게) 자기
정체화는 지배적 사회를 겨냥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배적 사회의 급진화된 표현이다.”(P275~7)
하지만 나는 나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여전히 무언가 부족하다. 여기서 타자의 동의가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 타자는 진짜 타자가 아니다. 타자들은 내가 자기 정체성을
스스로 설정할 때 동의하는 역할에 한정되어야 한다. 타자들은 내가 규정하는 것에 그냥 동의해야 한다. 더 나아가 자기 정체화의 원칙은 다음의 사항을 분명히 한다. 즉
타자는 나의 규정이 자신의 인식과 모순될지라도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가령 내가 나를 남성으로 규정하면
타자는 나를 남성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인식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이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비록 형식적으로라도 타자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의가 있어야만 국가에 의해 법으로 관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 라고 느낀다’에서 ‘나는 (….)다’라는 주장으로 옮겨 감으로써, 내가 나라고 확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언제나 타자의 외적 인정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정립이라는 형식의 외적 보편성의 강제로부터의 – 따라서 사회적인 공통성으로부터의 - 해방인 듯 보이는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미몽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