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 - 비폭력 성자와 체제 옹호자의 두 얼굴
E. M. S. 남부디리파드 지음, 정호영 옮김 / 한스컨텐츠(Hantz)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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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평전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

내게는 대안학교를 다니다 대학에 가겠다고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가 있다. 프로필 사진에 있는 두 자매들 보다는 큰 스무살의 남자아이다. 또래 남자아이들이 그렇듯 아빠보다 엄마와 훨씬 친밀한데다가 아빠는 주말 저녁에만 얼굴 볼 수 있기에 그리 대화가 많지 않다. 한데, 이 아이가 역사를 전공하겠다고 하면서부터 아빠랑 부쩍 대화시간이 많아졌다. 나로서는 무척 기쁜 일이었지만 가끔 내가 당연히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묻는 질문에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지난주가 그랬다. 갑자기 간디 이야기를 하면서 간디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야기를 하는데, 어어하면서 얼버무리고 넘어갔지만 이번주에 또 이야기를 꺼낼것 같아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해서, 하는 수 없이 읽고 있던 책을 잠시 내려놓고 주말에 내려올 때 책장의 간디 평전을 살짝 가방에 넣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남부디리파드의 이 책이다.

비록 출판년도는 오래전이지만 저자나 역자의 프로필이 충분히 신뢰가 가고, 아이와의 대화 주제였던 간디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볼 수 있는 드문 책인데다가 분량도 짧은 터라 술술 읽힌다는 장점도 있었다. 책의 안쪽 표지에 쓰여진 저자의 약력에서도 잘 소개되어 있지만 남부디리파드는 인도의 브라만 계급 출신으로 간디주의자로 출발해서 공산당원이 되어 정치활동을 한 사람이다. 인도에 공산당이?하고 의아해 할지도 모르지만 1957년 인도의 케랄라 주 선거에서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공산당이 집권한 바가 있고, 지금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대중정당으로 존재한다. 아쉬운 점은 평전치고는 짧은 분량인데다가, 간디의 생애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끝까지 다 읽었지만 아이의 질문이었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관련한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짐작컨데 1914년 무렵 간디가 남아프리카의 인도인 계약 노예 노동자의 지위개선 운동을 할 당시 흑인들과 관련한 어떤 이슈들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간디의 본명이다)는 구라자트 주 공국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 유학을 통해 변호사가 되어 인도에 돌아와 국민회의를 조직하고 민중의 저항정신을 일깨워 비폭력 투쟁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끝내 독립을 이루었지만, 힌두와 이슬람이라는(그리고 시크라는) 종파 싸움을 막고 하나의 인도를 건설고자 했으나, 1947년 힌두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아마도 이것이 간디에 대한 가장 익숙한 소개가 아닐까 싶다. 이 간략한 소개만 보아도 간디는 분명 정치인이다. 그가 말한 것들과 행동들은 이처럼 정치라는 범주에서 보아야 할 터인데, 우리에게 소개된 간디는 무결점의 성자로서 마치 인도정신의 화신으로서(류시화 같은 이들이 바라보는 인도) 종교적 인물처럼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 제일 먼저 역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다. 비폭력 평화주의자의 이미지와는 달리 간디는 1차 세계대전때 영국의 징병관으로서 적극적으로 인도 민중의 전쟁참여를 독려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을 후에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때 영국의 참전요구에 반해 비폭력 저항을 하였다. 이처럼 모순되어 보이는 행동은 영국으로부터 자치와 독립이라는 그때그때의 정치적 고려라는 점에서 본다면 일관성을 갖는다는 것이고, 폭력에 대한 태도는 항상 전략적 선택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이야기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성자 간디에 대한 이미지는 서서히 바뀌게 된다. 먼저 간디는 정세판단에 뛰어난 세속화된 정치인이다. 또한 당대 민족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되, 단기적인 관점이 아닌 전략적이고 중장기적인 관점에 입각해서 행동한 정치가이다. 게다가 개인적인 정치적 야심도 없었고 그 대의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던 흔치 않은 인물로, 주로 힌두 정신주의적인 입각점에서지만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그들을 사로잡아 행동에 나서게 할 수 있었던 뛰어난 정치가였다. 하지만 간디는 대중의 행동을 특정범위에 제한하여 변화의 전망을 부르주아적 이해관계의 한계에 국한시켰을 뿐만 아니라, 반계몽주의적이고 간디의 말을 직접 인용하면, “의학은 흑마술의 진수를 모은 것이다. … 성병 치료나 결핵 치료를 할 병원이 없다면 결핵도 줄어들고 매춘도 줄어들 것이다. 인도의 구원은 우리가 지난 반세기 동안 배운 것을 잊어버리는 것에 있다. 철도, 전신, 병원, 법률가, 의사 같은 것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 독립직전에 이르기까지 힌두주의자로서 한계를 지닌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요약으로 소개를 마무리하고,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하며 아마도 부록까지 읽고 나시면 역자가 인도에 대해 쓴 다른 책도 읽고 싶어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우리는 수많은 민중을 제국주의 착취와 억압에 대항하여 행동하도록 각성시켰던 한 인간을, 투쟁과정에서 보여준 영웅적 행동과 자기희생적 정신으로 역사에 깊이 각인된 그런 수백명 남녀들의 맨 앞에 서있는 한 인간을, 인도 전역에서 수천명의 충성과 신뢰를 담보하였던 인간을, 하지만 추종자들에게 착취를 끝내는 것은 전투적인 투쟁이 아니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전쟁과 억압에 봉사하였던 인간을, 비폭력의 이름으로 딩그라 같은 혁명가들의 애국적 행동을 비난하였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을 제국주의의 총알받이로 보내는 것에는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한 인간을, 무엇보다도 제국주의 착취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인류의 문명에서 근대적이고 과학적이고 진보적인 모든 것을 비난하는 한 인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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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민주적인가 - 현대 대의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비판적 고찰, 폴리테이아 총서 2
버나드 마넹 지음, 곽준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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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계절이 다가왔다. 한데 왜 우리는 매번 선거를 치르고 민의가 반영된 선택된 후보를 선출한다면서도, 그 후보가 선택된 후에는 항상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일까? 또 선거가 치러진 후 몇 년간 잊고 있다가 투표할 때만 자신을 주권자로 인식하게 되는 것일까? 혹시 우리가 민주주의의 꽃이라 믿고 있는 선거라는 제도는 절차의 공정하게 진행되기만 한다면 도달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있다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베일은 아닐까?


 요컨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기 위해 채택한 시스템의 핵심은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추첨)이었다. 제비뽑기는 권력이 집중되는 장소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이며, 우연성을 도입함으로써 고정화를 막는 것이다. … 만약 무기명 투표에 의한 보통선거, 즉 의회제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독재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추첨제야말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그의 책 [트랜스크리틱]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또한 지젝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고진의 이 주장을 옹호하며, 추첨이야 말로 민주주의라고 갈파한다. 이들의 주장이 낯설게 느껴지는가? 그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두 급진적인 철학자들의 기행일 뿐이라고 생각되는가?


그렇다면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를 읽어 보시길 권한다. 마넹은 고대 아테네에서부터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거쳐 17~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과 독립전쟁을 거친 미국의 건국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추첨제와 선거제가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상세하게 검토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추첨제가 완벽하게 정치적 주제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이러한 마넹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여러 낯선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추첨제=민주주의, 선거제=귀족주의라는 주장을 접하게 될 때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주장이 15세기 이전까지 정치학의 일반적 공리였다는 점이며,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몽테스키외나 루소 역시 이러한 견해를 잘 알고 옹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선거제는 투표자와 대표자의 간극을 극복할 수 없으며, 탁월한 자를 선출한다는 점에서 항상 자연귀족제로 향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당대의 엘리트들은 추점을 배제하고 선거를 선호하는 것이 질서를 유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미국건국과정에서의 논의들을 통해 선거가 세습 귀족과는 다른 형태로 특권층의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길임을 상세히 입증하고 있다.  

마넹이 아테네와 중세도시국가들이 추첨제를 자기검열과 심사라는 두 가지 상이한 방법으로 어떻게 보완하고자 했는지를 설명하며, 아테네 시민들이 전문가에 의한 통치의 위험과 그것을 어떻게 피하고자 했는지를 이야기하는 지점에서는 지금 우리의 문제들과도 겹쳐저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추첨과 선거라는 대립구도의 검토는 현대 정치에서 직접민주주의와 대의제라는 대립구도보다 더 발본적인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진다. 결론적으로 다소 엉뚱하고 생뚱맞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이 사실은 충분한 역사적-이론적 배경을 갖고 있는 클래식한 주장이었던 것이며, 마넹의 책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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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페미니즘 선언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 지음, 박지니 옮김 / 움직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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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99% 페미니즘 선언

아마도 요 몇 년간 가장 인기있는(잘 팔리는?) 인문사회분야 주제 중 하나가 페미니즘 일 듯싶다. 하지만 쏟아지는 책들 중 상당수는 여성용 자기계발서에 가까운 책들이거나,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가 된 여성적 차이에 대한 책들이다. 또한 우리 현실을 돌아봐도 각종 미디어나 기사를 통해 페미니즘이란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부족하다거나, 성공한 여성의 숫자가 적다는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권리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 페미니즘이란 의제를 사회적 이슈화하고 아젠다를 만들어 가는 이들은 절대적 다수가 중상류층 이상의 소위 먹고사는데 지장 없는 이들이다. 그러다보니 페미니즘은 사회적 약자들이 연대하여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먼 식자층 여성들의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99% 페미니즘 선언]이 말하는 바들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정체성 정치의 하나로, 또는 기껏해야 그 정체성의 교차성의 문제로 페미니즘을 다루는 기존의 입장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어떤 종류의 페미니즘이든 그것은 선이고 옹호되어야 하는 것일까?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의 주장이라는 이유만으로 페미니즘은 지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들은 단호하게 말한다. 아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대다수 여성을 포함한 우리의 현실의 불평등을 낳고 강화하는 주된 적은 바로 신자유주의이고 그것의 근원은 자본주의다. 그리고 그 신자본주의에 기생하여 수탈에 동조하고 기득권을 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이기에 저자들은 이에 단호히 반대한다. 현실 기득권의 한 축으로 자리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의 대표사례가 바로 힐러리 클린턴이나 페이스북의 여성COO인 셰릴 샌드버그 같은 여성들이다. 여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주류페미니즘의 흐름들과는 달리 저자들이 주장하는 99%를 위한 페미니즘은 보편성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 보편성은 여성이 아닌 인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식의 공허하고 추상적인 보편성이 아니라, 인종적, 성적, 계급적 불평등에 맞서 현장에서 투쟁하는 보편성이요, 이 보편성을 통한 연대를 추구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지점을 탐색한다는 목표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적확하고 계발적인 주장들 속에서도 두 가지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첫째는 가사노동이나 돌봄노동과 같은 사회적재생산에 대한 노동의 이해에서, 마르크스가 이를 무시하거나 폄훼하였다고 혹은 아무리 잘 봐줘도 시대적 한계였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사실 이런 오해는 자율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있는 오해이기도 한데, 마르크스의 가치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재생산노동이 가치를 낳지 않는다는 말은 일상용법에서 그 노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고 그것이 자본주의적 상품으로 포획되지 않았다는 말이며, 때문에 이 영역을 재상품화 하는(예컨대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노동화)게 맞을지 비상품화 영역으로서 저항의 영역으로 다루어야 할지는 전략적 숙고가 필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계급투쟁에 대한 이해다. 책의 앞부분에서 논의되는 바와 후기에서의 이해가 약간 다른 뉘앙스를 주기는 하지만 계급투쟁이 마치 생산현장에서 노-자의 권리투쟁으로 국한되어 이해되고, 따라서 계급투쟁, 성적다양성투쟁, 인종투쟁, 여성해방투쟁이 모두 권리투쟁의 하나로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된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계급적대란 단순히 서로 다른 계급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계급 사회 구성의 바로 그 원리인 것처럼, 적대 그 자체는 단지 갈등하는 분파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계급적대에 기반한 계급투쟁은 이러한 갈등의, 그리고 그 안에 연루된 요소들의 바로 그 구조화 원리이다.


 이 사소한(?) 오해를 제외한다면 이 책이 갖는 미덕은 너무도 분명하다. 페미니즘이 특히나 미국식 페미니즘이 우리사회에 수입되면서 이러저러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이처럼 평등을 위한 공동의 투쟁을 모색하는 99%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짧고 큰글씨인 데다가 11가지의 테제와 후기로 구성된 이 책은, 배경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하의 불평등의 가속화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모색이 미국 사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진행형인 상황이기에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되어질 편지는 아닐 것이다.


     가독성이 좋은 번역임에도 이상한 번역 하나 aura”아우라오라라고 음독한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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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 자폐는 어떻게 질병에서 축복이 되었나
존 돈반.캐런 저커 지음, 강병철 옮김 / 꿈꿀자유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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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드라마 우영우를 보는 다른 시각

가끔은 실용적인 목적에서 책을 들게 된다. 작년 어느 즈음에 아이 중 하나가 장애 판정을 받고 복지카드가 발급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얄팍하게도 내 자신의 일로 닥치게 되자 그간 뒤로 미뤄 놨던 장애와 관련된 책들에 손이 가기 시작했다. 예전에 사두었던 그린비 출판사의 장애학 시리즈를 훑어보았지만, 닥친 현안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책들이어서 스킵했다. 그리고서 뇌과학 관련 서적 몇 권을 들척이다 손에 잡게 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우리 아이가 자폐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지능과 관련된 장애이다 보니 혹시나 싶었고 외조카 중 한 아이가 자폐로 진단받은 바 있어 관련 정보라도 습득하자는 심정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TV가 없고 드라마는 일년에 1시간도 안보는 나이기에 세간의 조명을 받고 있다는 드라마도 대학동기들의 카톡에서 하도 떠들어 대기에 인터넷 기사를 검색해 보고서야 자폐(아니 정확하게는 아스퍼거증후군)증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휴가중이던 지난 수요일 다른 이유로 정신의학과를 방문했는데, 거기에서 책장에 꽃힌 이 책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책을 감싸는 비닐이 그대로 있는걸 봐서는 그 의사는 그 책을 상담용으로 비치해 놓은게 분명했다. 피식 웃음이 나고 간단하게라도 이 책을 소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라딘에서만 2만권 가까이 팔린 이 책은 아주 쉽게 읽힌다. 어려운 개념도 없고 그저 자폐가 하나의 병증으로 인정되고, 원인에 대한 다양한 이유들이 추정되고, 별 근거도 없는 이유로 냉정한 엄마들이 비난받게 되고, 자폐가 하나의 병증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이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이루어지기까지의 부모들의 투쟁과 조직화(주로 미국에서)의 과정과 함께 다양한 방법으로 치료를 시도하지만 예외적인 소수를 제외하고는 정형화된 방법의 치료가 이루어지지 못한 역사들을 차분하게 소개한다. 아무 생각없이 쓰여진 글을 따라가기만 하던 내가 약간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은 책의 중간쯤인 430페이지에 자폐 스펙트럼이란 말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이 개념은 오스트리아의 의사 아스퍼거가 발견했다고 보고한 타인과 교류가 어려우나, 지능이 특별히 뛰어나고 따라서 학자나 음악가 등으로 성공적인 경력을 보여준”, 후일 또다른 자폐증자가아스퍼거 증후군과 맞닿아 있다. 1980년대 런던 자폐자 연구그룹의 로나 윙이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자폐성향을 언어와 지능의 양 극단에 일렬로 늘어서게 만드는 하나의 스펙트럼이라는 개념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아스퍼거 증후군은 많은 논란을 불러있으켰고 미국정신의학협회에서 발간하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소위DSM) 1994년이 되어야 채택되었다. 하지만 2013DSM-5에서는 아스퍼거 증후군이라는 진단명은 사라지게 된다. 한데 아스퍼거 증후군이 자폐라는 넓은 스펙트럼의 한켠에 자리하고 특정한 부분에서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자폐가 장애라는 개념은 애매하게 되버린다. 스펙트럼의 끝에서 자폐증은 정상상태와 만나게 되며, 이 경계는 아주 흐릿하게 되었다. ‘아스피라는 고기능 자폐인이 이렇게 많다면 사회가 왜 이들을 질환자로 규정하고 지원해야 하는가? 아니 왜 이들이 환자로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한 발 더 나아가 자폐가 질병인가? 이런 질문들과 함께 신경다양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 개념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폐증은 단순한 발달장애가 아니라 신경학적 차이로 봐야 하며, 따라서 모든 자폐인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독특한 존재이다. 한데 그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자폐를 없애기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여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가? 우리는 신경다양성이라는 말에서 쉽게 성적 다양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성소수자들의 정체성 켐페인을 문화적 배경으로 하여 신경다양성의 주장 역시 자폐증자의 존재론적 지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내가 왜 자폐 스펙트럼이란 말에 불편해지지 시작했는지가 분명해진다. 자신의 목소리로 발언할 수 있는 아스피들이 자폐증자 - 나는 의도적으로 자폐증자라고 적는다. 소위 정치적올바름(PC)을 주장하는 이들이 자폐가 질환이 아니라며 자를 빼고 적을 것을 주장하나, 자폐가 질환이 아니라면 왜 굳이 자폐를 고치려 그토록 많은 수고를 하고 있는가? 장애를 장애라고 말하는 것은 비하가 아니다. 오히려 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그 질환이 보이지 않게 되고, 이런 방식으로 그 질환과 대면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 PC의 나쁜 문제해결 방식이다 -를 대표하여 자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내세울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심한 장애를 겪는 자폐인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자연스럽게 잊어버릴수 있게 된다.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못하는 사람들, 밤중에 나가 돌아다니다 물에 빠지거나 차에 치일까봐 24시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 성인이 된 후에도 하루에 두 번이상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이들 자폐인들은 인터뷰를 할 기회도, 저녁뉴스에도 결코 나오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정도 자폐인(장애인)이다는 말이 감동을 주는가? 그렇다면 속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내 견지에서는 그렇다. 만일 신경다양성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자폐를 신경학적 차이로 봐야 한다면, 사회가 왜 자폐증자들을 돌봐야 하는가? 그들이 사회속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배려와 지원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폐인들 대부분은 성인이 되어서도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가족단위에서 각자 알아서 감당해야하는 우리 상황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택받은 몇몇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경우는 가족에게 버림받거나, 가족이 파탄나는 경우가 수다한 것이 현실이다. 나는 그래서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싫다! 그 드라마가 당의정을 듬뿍 바르고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는 모양을 취해서 흥행에 성공하는 것을 보는 것이 불편하다. 나는 우영우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전장연의 시위가 오버랩 되곤 한다. 만일 드라마 우영우의 메시지가 소수자, 장애인에 대한 가치를 옹호하는 것이고 그에 대해 그토록 많은 시청자들이 공감한다면, 왜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심 밖이고 싸늘한 시선일까? 감히 주장하건데, 드라마 우영우의 인기는 전장연의 날 것 그대로의 장애를 보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그 날 것이 있다는 것을 외면하는데서 느끼는 죄책감을 덜어주며 장애를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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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질서 - 긴축이 만든 불평등의 역사
클라라 E. 마테이 지음, 임경은 옮김, 홍기훈 감수 / 21세기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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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질서]긴축이라는 자본의 선전포고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경제용어 중 하나가 된 긴축은 임금과 가격 그리고 공공 지출 삭감을 통해 국가 경제의 경쟁력을 회복한다는 취지의 자발적 디플레이션 정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2007년과 2008년에 닥쳤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구제 금융과 재자본화와 같은 조치들은 잠시동안 긴축을 뒷전으로 미뤄놓기도 했었지만, 이 비용의 대부분은 각국 정부가 시장 붕괴 비용을 떠맡으면서 정부의 대차대조표에 자리를 잡게 됐다. 이렇듯 글로벌 금융 위기를 수습할 책임이 국가에게 떠맡겨졌기 때문에 국가부채 위기라는 그릇된 명칭이 붙게 되었고, 긴축은 이 위기의 해결책으로 다시금 무대 중앙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긴축이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되어버린 시대이기에 더더욱 놓쳐서는 안될 질문들이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긴축의 역사를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즉 긴축은 언제 어떠한 이유로 시작되었고, 긴축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선언은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었는가를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보여주듯이 그 결과가 부정적이라면, 긴축이 정말 목적하는 바가 무엇이며 긴축이 아닌 다른 대안은 어떤 것이 있을지 찾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에게 긴축은 뉴딜로 대표되는 케인스주의의 과도한 국가 개입의 폐해를 벗어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이해되고 있다. 때문에 긴축에 대한 비판과 대안은 흔히 케인스주의로부터 찾고자 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더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더 발본적인 비판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20세기 이전의 고전적 자유주의에서는 긴축에 대한 이론적 숙고도 실천적 적용도 이루어진 바가 없다. 그 이유는 너무도 단순하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세계 경제는 호황과 불황을 오갔지만 이 당시의 국가들은 재정 규모가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국가가 감축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고, 소수에게 선거권이 제한되어 있어, 정책을 실행함에 있어 다수 인민의 눈치를 봐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긴축은 최근의 역사적 사실이기에, 자유주의로부터 긴축에 대한 진지한 이론적 고찰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를 마크 블라이스는 보통 경제사상은 무역 이론처럼 토대가 되는 과거의 몇몇 명제들에서 시작하여 시간이 흐르며 체계화되고 엄밀해진다. 그러나 긴축의 경우 이런 식의 긴축 이론이 없다. 다만 자유주의 경제학의 태동에서부터 배태되어 있었던, 데이비드 콜랜더가 말한 식의 국가에 대한 정서적 태도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시장이 실패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해 긴축이라는 답을 자동적으로 내놓게 한다.”[긴축-그 위험한 생각의 역사 P191~2]고 설득력 있게 논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할 때, 긴축을 현실로 고려하기 위해서는 국가 재정 규모의 확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긴축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붕괴를 막을 방편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왜 1차 세계대전 직후일까? 저자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균형예산의 전통은 제 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깨졌다. 균형예산에 상응하여 전 세계가 따르던 금본위제도 덩달아 폐기되어야 했다. 금본위제 시대에 각국 정부는 예산 운용에 제약이 따랐기에 금 유출을 초래할 수 있는 확장적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족쇄가 사라지자 대출에 의한 투자와 확장적 신용정책 같은 비정통적 재정 운용술이 새로운 시대사조로 자리 잡았다. 국가가 개입하는 통화정책은 이제 그동안 상상할 수 없었던 양의 자원을 생산할 수 있게 했다.”(P47) “전쟁기 동안 국가는 기존의 행동반경을 허물었다. 생과 사, 승과 패의 기로에 선 전시 정부는 그전까지 들어본 적도, 나아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방식으로 경제를 운용해야 했다. 시장의 자기조절능력은 전례 없는 규모의 군수품을 생산해야 하는 전시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 났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는 국가가 생산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전시에 주요 산업은 국가 통제하에 놓였다. 여기에는 군수품뿐 아니라 전략적 에너지와 석탄, 해운, 철도 등 운송 부문도 포함되었다. 이 점에서 사유재산과 공유재산 사이, 기업가와 관료 사이의 한때 확고했던 경계는 더 이상 고정불변으로 보이지 않았다. 국가는 전쟁 집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신성한 민간 생산 영역에 쳐들어갔다. 또한 정치적 필요가 민간의 경제적 이윤보다 처음으로 우선시되었다.”(P41) 다시 말해 총력전으로서 1차 세계대전은 국가의 재정 규모를 엄청나게 확장시켰고 긴축이라는 생각을 현실화시킬 조건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정규모의 확대가 곧바로 자본주의의 붕괴 위기로 이어지지는 것은 아니기에 긴축으로 이어지는 길은 부르주아 체제의 위기라는 역사적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일종의 예외 상황들을 만들어 냈다. 좀 길지만 저자가 설명하는 이러한 예외들은 자세히 인용할 가치가 있다. “영국의 1917년 토지 경작 명령은 생산량을 보완하기 위해 사유지를 소유자의 동의 없이 몰수해 시민 공영 농장으로 전용할 수 있는 권한을 지방 당국에 부여했다. 이처럼 국가는 생산적, 분배적 필요를 위해 사유재산의 불가침성을 명시적으로 깨뜨리며 물자를 징발했고, 이어서 시민에게 토지와 건물 점유권을 인정하는 국내법을 제정했다. … 1917년 이탈리아 정부는 지주가 협조하지 않으면, 그의 토지를 점유할 권리를 농민 조합에 부여했다. … 1916년 국가는 오랜 고민과 망설임 끝에 가정용 재화에 자유시장 메커니즘을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식품 산업의 대대적인 국영화를 실시했다. 여기에는 국가의 식량 수매와 유통, 가격 상한제, 징발(예를 들어 곡물과 가축), 배급제 등이 포함되었다. 영국에서도 1918년 식량부가 민간인이 소비하는 전체 식량의 4/5 이상을 사고 팔았다. 그리고 인구의 90%가 먹을 양의 식량에 가격 상한선을 정했다. 국가의 경제 개입은 기본적 필요가 충족된 생활이 이제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정부가 이를 지켜줄 의무가 있다는 대중의 인식을 고취했다. 경제의 우선순위가 소수의 이윤에서 다수의 필요 보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P51~2) 이에 더해, “가장 중요한 것은 양국 모두에서 사업장 내 자체 위원회가 점점 더 대표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규율, 조정 등 일상 문제를 처리하는 고충 처리 위원회로, 공장 내 노조원이 직접 위원을 선출했다. 이처럼 전쟁 이후 노동자들이 평의를 열어 자기 손으로 대표를 뽑는 방식이 활성화되었고, 비숙련 평노동자끼리 스스로 조직을 결성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전쟁기는 이런식으로 양국 노동자가 자생적 조직을 결성할 씨앗이 심긴 시기였다. 1919년까지 이들 위원회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 도전하는 강력한 대안으로 성장해나간다.”(P56~7) 이 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에서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조치들이 시도되고 법제화되었다. 더 살펴보자. “1918 12월 자유주의자인 윈스턴 처칠도 던디에서 열린 유세에서 철도 국유화를 옹호했고, 정부가 철도 지분을 취득해야 한다는 제안에도 찬성했다. (……) 영국 정부는 석탄 산업의 영구적 국유화를 논하기 위해 법관 존 생키를 의장으로 지명해 생키 위원회를 소집했다.”(P64) 이에 더해 “7 6일 정부는 지자체장들에게 물건값을 최대 50%까지 인하해 통제할 권한을 부여하는 명령을 서둘러 통과시켰다. 명령 제6조에는 적정 가격은 각지의 공공기관과 소비자 협동조합이 정한 가격을 기준으로 결정된다.”라고 명시되었다. 가격은 이제 인격 없는 시장의 힘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어느덧 민주적 의사결정이 되어 있었다.”(P79) 전쟁은 이처럼 당시 지배계급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양보를 요구했다. 게다가 이러한 경험은 노동자와 피억압계급에게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가능케 했다. 전쟁으로 인해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주의는 임금 관계와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자연스러운게 아니라, 계급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선택된 결과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되자, “이전에는 노동자의 요구가 근무시간 단축이나 임금인상과 같이 철저히 경제적 측면에 한정되었다면, 이제는 (사실상 고용주가 된) 국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제도적 측면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고용주를 향하던 산업 투쟁은 국가가 생산에 직접 개입하게 된 직후 국가를 향한 정치 투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동자는 생산 과정의 민주적 통제에 권력을 사용하라고 국가에 요구했다. … 더욱이 동요의 주된 원인은 당장 국가가 개입해서 경제적 이윤을 재분배해달라는 요구가 더 이상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가장 큰 동기 부여 요인은 사회 혁명이었다.”(P103)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에 대한 반격은 영국 재무부관료들이 주축이 되어 1919년 브뤼셀에서, 그리고 1921년 제노바에서 소집한 두 차례의 국재재정회의에서 긴축이라는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이 긴축을 수행할 기관으로 정치로부터(까놓고 말해서 민주적 통제로부터)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요구했다. 사실 이 두 회의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해 당시 계급투쟁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두 회의는 흔들리는 자본주의의 기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의제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요컨대 두 회의는 기술관료제의 지휘 아래 긴축을 구축하고 실행하기 위해 유럽 지배층을 다시 뭉치게 했다. 이 두 회의의 진행 과정은 기술관료제, 즉 경제 전문가에 의한 지배의 첫번째 기본 특징을 구체화했다. 경제학자들은 경제 정책에 대해 조언하고, 그 실행 과정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그들의 사회적 권위는 기술관료제의 두 번째 기본 특징과 연결되었다. 경제학자들은 무계급성중립성의 경지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몰역사적 대상으로 여겨지는 보편적, 가치중립적인 경제 진리의 대변인으로 인식된다. 긴축은 이 진리가 실현된 형태로, 본질적으로 기술관료주의적이다.

그러나 브뤼셀과 제노바 회의에 모인 전문가들은 현실적 문제에 직면했다. 공익과 대중의 정서에 완전히 반하는 정책을 어떻게 설계할(즉 제약 없이 작동하고 정착하게 할) 것인가? 해결책은 말할 것도 없이 강압이었다. 그들은 특히 중앙은행을 비롯한 은행들이 재정을 신중히 운용한다는 방침을 확실히 따르게끔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독립적 기술관료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목적에 따라 중앙은행이 없는 국가도 중앙은행을 설립할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제노바 회의는 중앙은행의 재량어떤 명확한 규제에 의해 구속되어서는 안 되므로, 중앙은행이 절대적 재량권을 누릴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밝혔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견해는 긴축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랄프 호트리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앙은행은 절대 설명도, 후회도, 사과도 하지 말아야 한다.” 파시즘이든 자유주의든 양쪽 진영의 경제 전문가는 경제적 자유를 위해 국가가 정치적 자유라는 의제를 버리거나 최소한 구석으로 밀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점에서 케인스 역시 그들과 한편이었다. 케인스도 호트리의 생각에 진심으로 동의하고는 이렇게 썼다. “제 생각도 이 업무는 일거수일투족이 정치적 간섭을 받지 않는 준자치적 기관이 맡아야 한다는 호트리 씨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경제가 정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들의 공통된 야심은 철두철미했다. 이 회의에서 결의한 결의문 5조를 보면 오늘날의 상황과 겹쳐 묘한 기시감이 들기까지 한다. 결의문 5조는 자본주의 생산 체제를 지키기 위해 대안 체제에 대한 노동자의 열망을 없애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들의 열망을 좌절시킬 두 방법은 바로 민영화와 노동통제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본의 공격으로서 긴축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긴축의 실행은 고금리, 디플레이션, 임금 삭감, 균형 재정정책 등을 의미한다. 영국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자. 1919년에는 생산량과 소득 수준이 전쟁기보다 향상했으나 1년도 안돼 도로 아미타불이 됐고, 1921 12월에 실업률은 18%로 최고치를 찍었다. 오늘날 일부 경제학자는 긴축을 경제정책상 실수로 평가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분명 이점이 있었다. 자본 축적의 기본 원리인 착취가 앞으로도 존속하려면, 실업의 해악은 그다지 해악도 아니었다. 실업은 노동자의 지위를 약화했고, 더 광범위하게는 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침묵시켰으며, 인건비를 확실하게 낮췄다. 전쟁 후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명목임금이 41% 하락했고, 그 덕에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자본가의 이윤은 금세 회복세를 탔다. 이렇게 보면 경기 침체의 가장 큰 이점은 자본주의 계급구조를 명백히 복원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영국은 이탈리아처럼 직접 정치적, 경제적 강제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으나, 겉으로만 정치적 중립성을 표방하는 재무부와 영란은행의 기술관료들에 의탁해 통화 디플레이션과 예산 삭감으로 비슷하게 목적을 달성했다. 거시경제정책의 형태를 띤 제도적 폭력은 파시스트 민병대의 물리적 폭력과 결국 같은 효과를 냈던 것이다. 이제 이탈리아를 살펴보자. 1922년 로마 진군이후 정권을 장악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만큼 산업의 평화보장에 전심전력을 기울인 정부는 없었다. 파시스트 정부는 저소득층으로부터 자원을 더욱 (그리고 조용히) 추출하기 위해 1920년대 내내 꾸준히 소비세를 인상했다. 그리고 사치재에 대한 과도한 세금을 폐지했다. 긴축 원칙에 따라 전쟁기와 전후기에 생긴 모든 누진세가 폐지되면서, 이탈리아 중상위 소득 계층은 감세 혜택을 누렸다. 1923 7월 재무장관 데 스테파니는 사실상 상속세를 완전히 폐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상위층으로 갈수록 감세 폭이 커지는구조였고, 데 스테파니도 소득 세수가 ‘50~75%’ 줄었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세수가 줄어도 상관없었다. 정말 중요한 목표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자본 질서의 부활이었다. 또한 파시스트 정권은 이러한 독재 조치를 통해 긴축의 핵심 목표인 유례없는 임금 삭감을 달성했다. 1929년에 일일 명목임금은 1926년에 비해 26% 감소했다. 이렇게 1920년대 전반에 걸쳐 산업 성장과 노동생산성 향상은 가혹한 실질임금 하락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실제로 영국과 달리 독재 치하의 이탈리아 산업 긴축은 임금을 억제하기 위해 경기 침체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1923년에서 1925년 상에 실질임금은 국가 경제가 성장하는 중이었음에도 대폭 감소했다.

여기서 마크 블라이스를 다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 블라이스는 역사적으로 실행된 긴축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20~30년대의 긴축정책이 주는 첫 번째 교훈은 다음과 같다. 긴축은 아무리 여러 번 시도해 봤자 작동하지 않는다. 이를 인식하고 나면 자연히 두 번재 교훈에 이르게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금본위제를 운용할 수 없다. 결국 긴축정책은 지속되지 못한다. 체제 붕괴 전까지 사람들이 긴축정책에 투표로 지지를 보내 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의 책 P300 강조는 저자의 것] 블라이스는 이와 더불어 나치의 사례를 들어 오늘날 긴축의 문제에 (잘못) 대응하는 좌파에 교훈을 전달한다. 1930년대 초에 독일은 중앙당의 브뤼닝이 수상으로 있었으나, 다수당은 사회민주당이었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른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정책 방향은 오로지 경기순환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자신들과 모든 면에서 반대였던 오스트리아 학파의 진영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개입은 역사 발전의 필연적 경로를 지연시킬 것이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민주적인 좌파 진영이라고 추정되는 집단의 심장에서 나왔을 뿐, 실로 강경한 긴축 진영의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긴축 상황을 견디기 어려운 독일노동조합은 불황에 대한 전면적 케인스주의적 공세라 할 수 있는 입안자들의 이름을 딴 베테베 계획을 수립하여 요구했고, 사회민주당으로부터 거부당하게 된다. 이에 나치는 베테베 계획과 같은 구상을 가져다가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다. 1932 7월 선거를 맞아 나치가 펼친 선거전의 중심에는 소위 시급한 경제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는 나치가 긴축의 대안으로 내세운 것으로 베테베 계획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국가사회주의당은 당시 긴축 기조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유일한 정당이었다. 아마도 1930년대 독일이 경험한 긴축의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좌파에 의해서 거침없이 시행되었고, 우파에 의해서 너무나 신속하게 폐기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지금도 이런저런 이유로 긴축을 옹호하고 심지어 집권후에 보수당보다 더 철저히 시행하는 신자유주의 좌파 정당들을 보면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아무리 여러 번 지적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오늘날 긴축은 주되게 국가의 경제 개입, 정부 재정정책의 문제로 다루어지곤 한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긴축을 비판하는 입장들은 많은 경우 케인스를 이론적 배경으로 하는 새케인스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와 케인즈주의는 긴축의 중요한 목표가 경제를 비정치화해 자본주의의 대안 체제를 봉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교집합을 갖는다. 이 교집합의 근원은 다른 누구도 아닌 케인즈 본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제학자 제프만의 2017년 저서 <언젠가는 우리 모두 죽는다>는 현대케인즈주의자들도 실은 자본주의 외에 다른 어떤 사회질서도 상상할 수 없기에 이러한 실존적불안에서 늘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케인즈는 긴축 프로젝트의 가장 깊은 본질에서 절대 벗어난 적은 없다. 케인즈는 기술관료들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를 지지했다. 케인즈의 경제이론도 그의 긴축파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계급 갈등이라는 개념을 몰아내고 계급 억압을 은폐했다. 노동 가치설과 착취의 중요성을 무시한 채 자본 축적을 설명하는 케인즈의 모형은 모두의 번영을 이끄는 기업가와 그의 투자가 경제의 핵심 원동력이라고 전제한다. <일반 이론>은 유효 수요가 부족한 이유를 궁극적으로 기업가의 투자 부족으로 돌린다. 따라서 거시경제를 관리하는 목적은 최적의 투자환경, 보통의 사업가에게 적합한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또한 케인즈도 동료 긴축파처럼 경제학자가 계급을 초월하는 진리의 수호자이므로 무엇이 국민에게 이로운지 알고 국민을 대신해 경제적 의사결정을 맡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는 사람들의 현실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빈곤과 실업문제가 정치 담론에서 제외되고 논리적, 합리적인 전문영역에서 다뤄야 할 기술적 문제로 이해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경제 영역을 비정치화하려는 욕구는 사회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핵심 해결책으로 존속한다. 그에 더해 케인즈학파가 긴축과 과감히 결별하고 경제주체로서 국가의 역할 확대를 지지한 근거가 바로 기술관료들의 직관적 통찰과 똑같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두 기둥은 보호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전문가가 정해준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거듭해서 이상한 역사적 망각을 지적한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자본주의가 커다란 실존적 위협에 직면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고도 자주 간과되는 요소 중 하나이며 이상하게도 긴축을 연구하는 정치학자와 경제학자는 통상 이 시기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고려에 넣고서야 저자의 당시 긴축이라는 대안에 대한 요약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긴축의 가장 큰 목적은 경제의 비정치화였다. 즉 전쟁기의 정치 지형으로 한때 구분이 흐릿해졌던 정치와 경제 사이에 다시 경계선을 긋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계선의 재설정은 현실에서 세 가지 형태를 취했다. ‘비정치화는 국가가 경제 행위에서 물러선다는 뜻이다. 그러면 첫째, 생산관계(자본가 대 노동자)가 다시 인격 없는 시장의 힘으로 통제된다. 그 결과 임금 관계나 사유재산제에 정치적 논쟁을 제기할 여지가 틀어막히게 된다. 그러나 비정치화에는 그 이상의 함의가 있다. 비정치화의 둘째 특징은 특히 독립적경제 기관을 설립하고 보호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이 기관들은 정밀한 민주주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경제적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셋째, 경제 개념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처럼 선전해, 경제이론이 계급관계를 초월하게 한다. 이 일종의 전지전능함은 긴축의 목표 중 하나인 합의 구축을 위한 기반이 된다. 이 세 가지 관습은 상호 보완적이었다. 예컨대 경제적 객관성이라는 개념을 구축하려면 먼저 시장의 비인격성 규칙을 회복해야 했다. 이는 뒤숭숭한 당시 사회 분위기상 특히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오직 민주주의의 통제를 받지 않는 여건에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긴축은 기술관료제와 끈끈한 동맹을 맺었다. 기술관료제는 객관적 진리를 연구하는 경제학자의 힘을 신뢰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했다.”(P160)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긴축은 위기의 산물이었다.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라 사회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위기였다.” (P188)

이 책은 나에게 올해의 발견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꼭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었고, 만일 읽지 못하더라도 이 글을 통해 저자의 설명이 전달되기를 바랬기에 글이 길어지는걸 감안하고서도 길게 인용하고 설명하려 노력했다. 저자는 이 책의 감사의 글에 개인사를 살짝 언급하고 있다. 잔프란코 마테이라는 그녀의 조부이야기다. 27세에 밀라노 공대의 화학교수였던 그는 반파시스트 활동을 하다가 내부고발자의 밀고로 악명높은 파시스트 민병대 감옥에서 고문을 받던 중 동료의 이름을 대기를 거부하고 자살한다. 그의 유언은 그의 모친에게 전달되는 데, “힘들어도 힘내세요, 저도 그랬으니까요였다. 그리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헌사로 마무리한다. “나는 그의 동료들을 지킨 용감한 희생, 폭군과의 꿋꿋한 투쟁, 모두를 위해 세상을 바꾸려 한 이타적 헌신을 마음에 새기며 내 삶을 개인적, 정치적 목표의식을 잃지 않으려 한다. 잔프랑코 마테이종조부와 모든 혁명가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그녀의 다음 책이 기다려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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