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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질서 - 긴축이 만든 불평등의 역사
클라라 E. 마테이 지음, 임경은 옮김, 홍기훈 감수 / 21세기북스 / 2024년 5월
평점 :
[자본 질서] – 긴축이라는
자본의 선전포고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경제용어 중 하나가 된 긴축은 임금과 가격 그리고 공공 지출 삭감을 통해 국가 경제의 경쟁력을 회복한다는 취지의 자발적 디플레이션
정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2007년과 2008년에 닥쳤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구제 금융과 재자본화와 같은 조치들은 잠시동안 긴축을 뒷전으로 미뤄놓기도
했었지만, 이 비용의 대부분은 각국 정부가 시장 붕괴 비용을 떠맡으면서 정부의 대차대조표에 자리를 잡게
됐다. 이렇듯 글로벌 금융 위기를 수습할 책임이 국가에게 떠맡겨졌기 때문에 국가부채 위기라는 그릇된
명칭이 붙게 되었고, 긴축은 이 위기의 해결책으로 다시금 무대 중앙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긴축이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되어버린 시대이기에 더더욱 놓쳐서는 안될 질문들이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긴축의 역사를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즉 긴축은 언제
어떠한 이유로 시작되었고, 긴축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선언은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었는가를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보여주듯이 그 결과가 부정적이라면, 긴축이 정말 목적하는 바가 무엇이며 긴축이 아닌 다른 대안은 어떤 것이 있을지 찾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에게 긴축은
뉴딜로 대표되는 케인스주의의 과도한 국가 개입의 폐해를 벗어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이해되고 있다. 때문에
긴축에 대한 비판과 대안은 흔히 케인스주의로부터 찾고자 한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더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고, 더 발본적인 비판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20세기
이전의 고전적 자유주의에서는 긴축에 대한 이론적 숙고도 실천적 적용도 이루어진 바가 없다. 그 이유는
너무도 단순하다.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세계 경제는
호황과 불황을 오갔지만 이 당시의 국가들은 재정 규모가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국가가 감축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고, 소수에게 선거권이 제한되어 있어, 정책을 실행함에 있어 다수 인민의
눈치를 봐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긴축은 최근의 역사적 사실이기에, 자유주의로부터 긴축에 대한 진지한 이론적 고찰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를
마크 블라이스는 “보통 경제사상은 무역 이론처럼 토대가 되는 과거의 몇몇 명제들에서 시작하여 시간이
흐르며 체계화되고 엄밀해진다. 그러나 긴축의 경우 이런 식의 ‘긴축
이론’이 없다. 다만 자유주의 경제학의 태동에서부터 배태되어
있었던, 데이비드 콜랜더가 말한 식의 국가에 대한 ‘정서적
태도’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시장이 실패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해 ‘긴축’이라는 답을 자동적으로 내놓게
한다.”[긴축-그 위험한 생각의 역사 P191~2]고 설득력
있게 논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할 때, 긴축을 현실로 고려하기 위해서는 국가 재정 규모의 확대가 반드시 필요하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긴축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붕괴를 막을 방편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왜 1차 세계대전 직후일까? 저자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균형예산의 전통은 제
1차세계대전을 계기로 깨졌다. 균형예산에 상응하여 전 세계가 따르던 금본위제도 덩달아 폐기되어야
했다. 금본위제 시대에 각국 정부는 예산 운용에 제약이 따랐기에 금 유출을 초래할 수 있는 확장적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족쇄가 사라지자 대출에 의한 투자와 확장적 신용정책 같은
비정통적 재정 운용술이 새로운 시대사조로 자리 잡았다. 국가가 개입하는 통화정책은 이제 그동안 상상할
수 없었던 양의 자원을 생산할 수 있게 했다.”(P47) “전쟁기 동안 국가는 기존의 행동반경을 허물었다. 생과 사, 승과 패의 기로에 선 전시 정부는 그전까지 들어본 적도, 나아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방식으로 경제를 운용해야 했다. 시장의
자기조절능력은 전례 없는 규모의 군수품을 생산해야 하는 전시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 났다. 영국과
이탈리아에서는 국가가 생산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전시에 주요 산업은 국가 통제하에
놓였다. 여기에는 군수품뿐 아니라 전략적 에너지와 석탄, 해운, 철도 등 운송 부문도 포함되었다. 이 점에서 사유재산과 공유재산
사이, 기업가와 관료 사이의 한때 확고했던 경계는 더 이상 고정불변으로 보이지 않았다. 국가는 전쟁 집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신성한 민간 생산 영역에 쳐들어갔다. 또한
정치적 필요가 민간의 경제적 이윤보다 처음으로 우선시되었다.”(P41) 다시 말해 총력전으로서 1차 세계대전은 국가의 재정 규모를 엄청나게 확장시켰고 긴축이라는 생각을 현실화시킬 조건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정규모의 확대가
곧바로 자본주의의 붕괴 위기로 이어지지는 것은 아니기에 긴축으로 이어지는 길은 부르주아 체제의 위기라는 역사적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일종의 예외 상황들을 만들어 냈다. 좀 길지만 저자가 설명하는 이러한 예외들은 자세히 인용할
가치가 있다. “영국의 1917년 토지 경작 명령은 생산량을
보완하기 위해 사유지를 소유자의 동의 없이 몰수해 시민 공영 농장으로 전용할 수 있는 권한을 지방 당국에 부여했다. 이처럼 국가는 생산적, 분배적 필요를 위해 사유재산의 불가침성을
명시적으로 깨뜨리며 물자를 징발했고, 이어서 시민에게 토지와 건물 점유권을 인정하는 국내법을 제정했다. … 1917년 이탈리아 정부는 지주가 협조하지 않으면, 그의 토지를
점유할 권리를 농민 조합에 부여했다. … 1916년 국가는 오랜 고민과 망설임 끝에 가정용 재화에 자유시장
메커니즘을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식품 산업의 대대적인 국영화’를
실시했다. 여기에는 국가의 식량 수매와 유통, 가격 상한제, 징발(예를 들어 곡물과 가축), 배급제
등이 포함되었다. 영국에서도 1918년 식량부가 민간인이
소비하는 전체 식량의 4/5 이상을 사고 팔았다. 그리고
인구의 90%가 먹을 양의 식량에 가격 상한선을 정했다. 국가의
경제 개입은 기본적 필요가 충족된 생활이 이제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정부가 이를 지켜줄 의무가 있다는 대중의 인식을 고취했다. 경제의 우선순위가 소수의 이윤에서 다수의 필요 보장으로 완전히 바뀌었다.”(P51~2)
이에 더해, “가장 중요한 것은 양국 모두에서 사업장 내 자체 위원회가 점점 더 대표적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규율, 조정 등 일상
문제를 처리하는 고충 처리 위원회로, 공장 내 노조원이 직접 위원을 선출했다. 이처럼 전쟁 이후 노동자들이 평의를 열어 자기 손으로 대표를 뽑는 방식이 활성화되었고, 비숙련 평노동자끼리 스스로 조직을 결성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전쟁기는
이런식으로 양국 노동자가 자생적 조직을 결성할 씨앗이 심긴 시기였다. 1919년까지 이들 위원회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에 도전하는 강력한 대안으로 성장해나간다.”(P56~7) 이 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에서 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조치들이 시도되고 법제화되었다. 더
살펴보자. “1918년 12월 자유주의자인 윈스턴 처칠도
던디에서 열린 유세에서 철도 국유화를 옹호했고, 정부가 철도 지분을 취득해야 한다는 제안에도 찬성했다. (……) 영국 정부는 석탄
산업의 영구적 국유화를 논하기 위해 법관 존 생키를 의장으로 지명해 생키 위원회를 소집했다.”(P64) 이에
더해 “7월 6일 정부는 지자체장들에게 물건값을 최대 50%까지 인하해 통제할 권한을 부여하는 명령을 서둘러 통과시켰다. 명령
제6조에는 “적정 가격은 각지의 공공기관과 소비자 협동조합이
정한 가격을 기준으로 결정된다.”라고 명시되었다. 가격은
이제 인격 없는 시장의 힘으로 결정되지 않았다. 어느덧 민주적 의사결정이 되어 있었다.”(P79) 전쟁은 이처럼 당시 지배계급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양보를 요구했다. 게다가 이러한 경험은 노동자와 피억압계급에게 경제적 이익을 넘어서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가능케 했다. 전쟁으로 인해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주의는 임금 관계와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계급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선택된 결과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되자, “이전에는 노동자의 요구가 근무시간
단축이나 임금인상과 같이 철저히 경제적 측면에 한정되었다면, 이제는
(사실상 고용주가 된) 국가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제도적 측면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고용주를 향하던 산업 투쟁은 국가가 생산에 직접 개입하게 된 직후 국가를 향한 정치 투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동자는 생산 과정의 민주적 통제에 권력을 사용하라고 국가에 요구했다. … 더욱이 동요의 주된 원인은 당장 국가가 개입해서 경제적 이윤을 재분배해달라는 요구가 더 이상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가장 큰 동기 부여 요인은 사회 혁명이었다.”(P103)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에 대한 반격은 영국 재무부관료들이 주축이 되어 1919년 브뤼셀에서, 그리고 1921년 제노바에서 소집한 두 차례의 국재재정회의에서 긴축이라는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이 긴축을 수행할 기관으로 정치로부터(까놓고
말해서 민주적 통제로부터)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요구했다. 사실
이 두 회의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해 당시 계급투쟁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두 회의는 흔들리는 자본주의의 기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의제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요컨대 두 회의는 기술관료제의 지휘 아래 긴축을 구축하고 실행하기 위해 유럽 지배층을 다시 뭉치게 했다. 이 두 회의의 진행 과정은 기술관료제, 즉 경제 전문가에 의한 지배의
첫번째 기본 특징을 구체화했다. 경제학자들은 경제 정책에 대해 조언하고, 그 실행 과정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그들의 사회적
권위는 기술관료제의 두 번째 기본 특징과 연결되었다. 경제학자들은 ‘무계급성’과 ‘중립성’의 경지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몰역사적 대상으로 여겨지는 보편적, 가치중립적인
경제 진리의 대변인으로 인식된다. 긴축은 이 ‘진리’가 실현된 형태로, 본질적으로 기술관료주의적이다.
그러나 브뤼셀과
제노바 회의에 모인 전문가들은 현실적 문제에 직면했다. 공익과 대중의 정서에 완전히 반하는 정책을 어떻게
설계할(즉 제약 없이 작동하고 정착하게 할) 것인가? 해결책은 말할 것도 없이 강압이었다. 그들은 특히 중앙은행을 비롯한
은행들이 “재정을 신중히 운용한다는 방침”을 확실히 따르게끔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적 기술관료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목적에 따라 “중앙은행이 없는 국가도 중앙은행을 설립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제노바 회의는 ‘중앙은행의 재량’이 “어떤 명확한 규제에 의해 구속”되어서는
안 되므로, 중앙은행이 절대적 재량권을 누릴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밝혔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견해는 긴축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랄프 호트리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중앙은행은 절대 설명도, 후회도, 사과도 하지 말아야 한다.” 파시즘이든 자유주의든 양쪽 진영의 경제
전문가는 경제적 자유를 위해 국가가 정치적 자유라는 의제를 버리거나 최소한 구석으로 밀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점에서 케인스 역시 그들과 한편이었다. 케인스도 호트리의
생각에 진심으로 동의하고는 이렇게 썼다. “제 생각도 이 업무는 일거수일투족이 정치적 간섭을 받지 않는
준자치적 기관이 맡아야 한다는 호트리 씨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합니다.” 경제가 정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들의 공통된 야심은 철두철미했다. 이 회의에서 결의한 결의문
5조를 보면 오늘날의 상황과 겹쳐 묘한 기시감이 들기까지 한다. 결의문 5조는 자본주의 생산 체제를 지키기 위해 대안 체제에 대한 노동자의 열망을 없애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들의 열망을 좌절시킬 두 방법은 바로 민영화와 노동통제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본의 공격으로서 긴축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긴축의 실행은 고금리, 디플레이션, 임금 삭감, 균형 재정정책 등을 의미한다. 영국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자. 1919년에는 생산량과 소득 수준이
전쟁기보다 향상했으나 1년도 안돼 도로 아미타불이 됐고, 1921년 12월에 실업률은 18%로 최고치를 찍었다. 오늘날 일부 경제학자는 긴축을 경제정책상 실수로 평가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분명 이점이 있었다. 자본 축적의 기본 원리인 착취가 앞으로도 존속하려면, 실업의 해악은 그다지 해악도 아니었다. 실업은 노동자의 지위를 약화했고, 더 광범위하게는 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침묵시켰으며, 인건비를
확실하게 낮췄다. 전쟁 후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명목임금이 41% 하락했고, 그 덕에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자본가의 이윤은 금세 회복세를 탔다. 이렇게
보면 경기 침체의 가장 큰 이점은 자본주의 계급구조를 명백히 복원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영국은
이탈리아처럼 직접 정치적, 경제적 강제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으나, 겉으로만
정치적 중립성을 표방하는 재무부와 영란은행의 기술관료들에 의탁해 통화 디플레이션과 예산 삭감으로 비슷하게 목적을 달성했다. 거시경제정책의 형태를 띤 제도적 폭력은 파시스트 민병대의 물리적 폭력과 결국 같은 효과를 냈던 것이다. 이제 이탈리아를 살펴보자. 1922년 로마 진군이후 정권을 장악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만큼 ‘산업의 평화’ 보장에 전심전력을
기울인 정부는 없었다. 파시스트 정부는 저소득층으로부터 자원을 더욱
(그리고 조용히) 추출하기 위해 1920년대
내내 꾸준히 소비세를 인상했다. 그리고 ‘사치재에 대한 과도한
세금’을 폐지했다. 긴축 원칙에 따라 전쟁기와 전후기에 생긴
모든 누진세가 폐지되면서, 이탈리아 중상위 소득 계층은 감세 혜택을 누렸다. 1923년 7월 재무장관 데 스테파니는 사실상 상속세를 완전히 폐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상위층으로 갈수록 감세 폭이 커지는’ 구조였고, 데 스테파니도 소득 세수가 ‘50~75%’ 줄었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렇게 세수가 줄어도 상관없었다. 정말 중요한
목표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자본 질서의 부활이었다. 또한
파시스트 정권은 이러한 독재 조치를 통해 긴축의 핵심 목표인 유례없는 임금 삭감을 달성했다. 1929년에
일일 명목임금은 1926년에 비해 26% 감소했다. 이렇게 1920년대 전반에 걸쳐 산업 성장과 노동생산성 향상은 가혹한
실질임금 하락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실제로 영국과 달리 독재 치하의 이탈리아 산업 긴축은 임금을 억제하기
위해 경기 침체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1923년에서 1925년
상에 실질임금은 국가 경제가 성장하는 중이었음에도 대폭 감소했다.
여기서 마크 블라이스를
다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 블라이스는 역사적으로 실행된 긴축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20~30년대의 긴축정책이 주는 첫 번째 교훈은 다음과 같다. 긴축은
아무리 여러 번 시도해 봤자 작동하지 않는다. 이를 인식하고 나면 자연히 두 번재 교훈에 이르게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금본위제를 운용할 수 없다. 결국
긴축정책은 지속되지 못한다. 체제 붕괴 전까지 사람들이 긴축정책에 투표로 지지를 보내 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의 책 P300 강조는
저자의 것] 블라이스는 이와 더불어 나치의 사례를 들어 오늘날 긴축의 문제에 (잘못) 대응하는 좌파에 교훈을 전달한다. 1930년대 초에 독일은 중앙당의 브뤼닝이 수상으로 있었으나, 다수당은
사회민주당이었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른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정책
방향은 오로지 경기순환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자신들과 모든 면에서 반대였던
오스트리아 학파의 진영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개입은 역사 발전의 필연적 경로를 지연시킬 것이고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는 민주적인 좌파 진영이라고 추정되는 집단의 심장에서 나왔을
뿐, 실로 강경한 긴축 진영의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긴축
상황을 견디기 어려운 독일노동조합은 “불황에 대한 전면적 케인스주의적 공세”라 할 수 있는 입안자들의 이름을 딴 ‘베테베 계획’을 수립하여 요구했고, 사회민주당으로부터 거부당하게 된다. 이에 나치는 베테베 계획과 같은 구상을 가져다가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다. 1932년 7월 선거를 맞아 나치가 펼친 선거전의 중심에는 소위
‘시급한 경제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는 나치가 긴축의 대안으로 내세운 것으로 베테베 계획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국가사회주의당은 당시 긴축 기조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유일한 정당이었다. 아마도 1930년대 독일이 경험한 긴축의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좌파에 의해서 거침없이 시행되었고, 우파에
의해서 너무나 신속하게 폐기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지금도 이런저런 이유로 긴축을 옹호하고 심지어 집권후에
보수당보다 더 철저히 시행하는 신자유주의 좌파 정당들을 보면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아무리 여러 번 지적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오늘날 긴축은
주되게 국가의 경제 개입, 정부 재정정책의 문제로 다루어지곤 한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긴축을 비판하는 입장들은 많은 경우 케인스를 이론적 배경으로 하는 새케인스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와 케인즈주의는 긴축의 중요한 목표가 경제를 비정치화해 자본주의의 대안 체제를 봉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교집합을 갖는다. 이 교집합의 근원은 다른 누구도 아닌 케인즈 본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제학자
제프만의 2017년 저서 <언젠가는 우리 모두 죽는다>는 현대케인즈주의자들도 실은 자본주의 외에 다른 어떤 사회질서도 상상할 수 없기에 이러한 ‘실존적’ 불안에서 늘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케인즈는 긴축 프로젝트의 가장 깊은 본질에서 절대 벗어난 적은 없다. 케인즈는
기술관료들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를 지지했다. 케인즈의 경제이론도 그의 긴축파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계급
갈등이라는 개념을 몰아내고 계급 억압을 은폐했다. 노동 가치설과 착취의 중요성을 무시한 채 자본 축적을
설명하는 케인즈의 모형은 모두의 번영을 이끄는 기업가와 그의 투자가 경제의 핵심 원동력이라고 전제한다. <일반
이론>은 유효 수요가 부족한 이유를 궁극적으로 기업가의 투자 부족으로 돌린다. 따라서 거시경제를 관리하는 목적은 최적의 투자환경, 즉 ‘보통의 사업가에게 적합한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또한 케인즈도 동료 긴축파처럼 경제학자가 계급을
초월하는 진리의 수호자이므로 무엇이 국민에게 이로운지 알고 국민을 대신해 경제적 의사결정을 맡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는 사람들의 현실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빈곤과 실업문제가 정치 담론에서 제외되고 ‘논리적, 합리적인 전문영역’에서
다뤄야 할 기술적 문제로 이해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경제 영역을 비정치화하려는 욕구는 사회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핵심 해결책으로 존속한다. 그에 더해 케인즈학파가 긴축과 과감히 결별하고 경제주체로서 국가의 역할
확대를 지지한 근거가 바로 기술관료들의 직관적 통찰과 똑같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두 기둥은 보호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전문가가 정해준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거듭해서 이상한 역사적 망각을 지적한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자본주의가 커다란 실존적 위협에 직면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고도 자주 간과되는 요소 중 하나이며 이상하게도 긴축을 연구하는 정치학자와 경제학자는
통상 이 시기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고려에 넣고서야 저자의 당시 긴축이라는 대안에
대한 요약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긴축의 가장 큰 목적은 ‘경제의
비정치화’였다. 즉 전쟁기의 정치 지형으로 한때 구분이 흐릿해졌던
정치와 경제 사이에 다시 경계선을 긋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계선의 재설정은 현실에서 세 가지 형태를
취했다. ‘비정치화’는 국가가 경제 행위에서 물러선다는 뜻이다. 그러면 첫째, 생산관계(자본가
대 노동자)가 다시 인격 없는 시장의 힘으로 통제된다. 그
결과 임금 관계나 사유재산제에 정치적 논쟁을 제기할 여지가 틀어막히게 된다. 그러나 비정치화에는 그
이상의 함의가 있다. 비정치화의 둘째 특징은 특히 ‘독립적’ 경제 기관을 설립하고 보호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이 기관들은 정밀한
민주주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경제적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셋째,
경제 개념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처럼 선전해, 경제이론이
계급관계를 초월하게 한다. 이 일종의 전지전능함은 긴축의 목표 중 하나인 합의 구축을 위한 기반이 된다. 이 세 가지 관습은 상호 보완적이었다. 예컨대 경제적 객관성이라는
개념을 구축하려면 먼저 시장의 비인격성 규칙을 회복해야 했다. 이는 뒤숭숭한 당시 사회 분위기상 특히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오직 민주주의의 통제를 받지 않는 여건에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긴축은 기술관료제와 끈끈한 동맹을 맺었다. 기술관료제는 객관적
진리를 연구하는 경제학자의 힘을 신뢰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했다.”(P160)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긴축은 위기의 산물이었다.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니라 사회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의 위기였다.” (P188)
이 책은 나에게
올해의 발견이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꼭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었고,
만일 읽지 못하더라도 이 글을 통해 저자의 설명이 전달되기를 바랬기에 글이 길어지는걸 감안하고서도 길게 인용하고 설명하려 노력했다. 저자는 이 책의 ‘감사의 글’에
개인사를 살짝 언급하고 있다. 잔프란코 마테이라는 그녀의 조부이야기다.
27세에 밀라노 공대의 화학교수였던 그는 반파시스트 활동을 하다가 내부고발자의 밀고로 악명높은 파시스트 민병대 감옥에서 고문을 받던
중 동료의 이름을 대기를 거부하고 자살한다. 그의 유언은 그의 모친에게 전달되는 데, “힘들어도 힘내세요, 저도 그랬으니까요”였다. 그리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헌사로 마무리한다. “나는 그의 동료들을 지킨 용감한 희생, 폭군과의 꿋꿋한 투쟁, 모두를 위해 세상을 바꾸려 한 이타적 헌신을 마음에 새기며 내 삶을 개인적,
정치적 목표의식을 잃지 않으려 한다. 잔프랑코 마테이종조부와 모든 혁명가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그녀의 다음 책이 기다려지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