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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소란
고정순 지음 / 여섯번째봄 / 2021년 11월
평점 :
유난히 깊고 아름다웠던 가을이 저물 즈음, 내내 궁금했던 작품을 만났다. 그림책 작가이면서 에세이스트인 고정순 작가가 ‘청소년 노동’을 소설로 쓴 <내 안의 소란>.
소설은 일터에서 아빠를(아빠는 청소년 노동자였다) 잃은 소녀 무연의 시선을 따라 무연과 주변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엮어 내며 우리 안에 존재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는 소외된 존재들을 보여 준다.
이야기는 화자이면서 주인공이기도 한 무연의 의식을 따라 자유롭게 시간을 넘나들면서 부모의 학대로부터 도망쳐 미혼모로 살아야 했던 엄마 소연, 어린 나이에 일터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아빠, 아빠에게 버려지고 생리대가 없어서 피 묻은 속옷을 쿠키 상자 속에 숨겨야 했던 소란, 그리고 아빠를 잃고 친구마저 잃어야 했던 무연의 이야기들이 씨실 날실이 되어 얽히고설키다 결국엔 하나의 조각보로 완성된다. 조각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삶을 살아 내는 소년들의 얼굴을 새겨 넣으며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작가의 마음이 보인다.
읽는 내내 어쩐지 작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무연은 물론이고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에 작가 자신의 심장 일부를 조금씩 떼어 주었고, 덕분에 그들은 각각 생생하게 살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주인공 무연은 평소에 제법 어른스러운 척하지만, 절친 소란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하고, 엄마와 싸우고 며칠 동안 말을 안 하고, 아빠 없는 아이란 걸 들키기 싫어서 아빠는 시인이고 멀리 출장을 갔다는 거짓말을 하는 아이면서 할머니와 손을 잡고 춤을 추면서 수다를 떨 줄 아는 능청스러움을 갖고 있는 애처로우면서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무연의 또 다른 자아처럼 보이는 소란은 물론이고, 소연, 송 여자, 심지어는 무연의 비밀을 터뜨려 버린 얄미운 양민혜까지도 그녀가 애처로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그녀의 전하지 못한 진심을 담아 각각 이야기를 쏟아낸다.
특히,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며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무연의 아빠, 영무의 존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청소년 노동 문제의 현실을 아프게 보여 준다.
무겁고 아픈 이야기이지만, 마치 작은 술집에서 작가와 술잔을 마주하고 그녀가 낮은 소리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듯 생생하고 가깝다.
이렇게 그녀가 잊지 않기 위해 소환한 무영, 소란, 무연은 어느새 나의 마음속에 다른 이름으로 깊게 자리 잡았다. 책을 읽기 전 나는 잘 모르는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제3자로 함께 공감하고 다정하게 들어줄 수 있지만, 사실은 나와는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아이들, 그리고 사람들. 하지만 무연을 만나면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내 주변에 있는 너무도 평범한(그렇게 보이는) 아이들,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수없이 많은 그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나도 이제, 뜨거운 찜통 안에서 흐물거리지 않도록 호빵을 지켜 주는 종이처럼(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 고정순표 은유이다) 누군가에게 작지만 기대고 싶은 존재로 옆에 서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작가의 첫 소설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풀고 연결하는 솜씨에 혀를 내두르고 만다. 아마도 수십 번 뒤엎고 다시 짓기를 반복했을, 그리고 기어이 완성하며 울음을 터뜨렸을 작가의 마음과 수고를 만난 듯하여, 그 울음 앞에 작은 손수건을 내 주고 싶다.
“냉면을 좋아해.”라고 말하는 소란의 입 모양을 좋아해서, 고무줄을 씹어도 냉면 맛이 난다면 좋아할 거라는 무연처럼,
고정순 작가의 맛이 담긴 글이라면 그림책이든, 만화책이든, 에세이든, 소설이든 무조건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녀의 단단한 글 사이사이를 비어져 나오는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다정한 위로가 주는 힘을 달리 이겨 낼 재간이 없으니 말이다.
나는 오늘 (그녀의 작품에 감히 순서를 매길 수 없지만) 내 마음속 책장 가장 높은 자리에 주저 없이 <내 안의 소란>을 두었다.
" ...왜 그런 거 있잖아. 입으로는 잔소리하는데, 눈은 다정하게 날 바라보는 그런 사람. 너네 엄마 그런 사람이잖아." ..살기 위해 센 기억을 밀어 낸 아이 명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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