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
고정순 지음 / 만만한책방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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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당차고 매력적인 여느 그림책 속 주인공과 달리 늙은 산양이 초라한 허리를 힘껏 구부리며 바닥에 떨어진 노란 지팡이가 구원이라도 되는 듯 최선을 다해 주우려고 한다.

고개를 갸웃하며 책장을 넘기고, 흰 여백에 꽤 커다란 글자로 나에게란 낯선 글을 만나는 순간, 어쩐지 가슴이 저릿하다.

그러고 보니 우린 늘 자신보다 타인을 의식하며 살았지.

 

그간 소외되고 힘없는 존재들에 뜨거운 관심과 애정을 갖고 그들의 이야기를 쓰고 그리는 데 온 힘을 다한 작가가 처음으로, 남이 아닌 자신을 위로하고 응원하기 위해 늙은 산양 이야기를 꺼내놓았다고 한다.

 

죽음을 예감한 늙은 산양이 이왕이면 멋진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인데, 어쩐 일인지 그 여행은 슬프기 보단 호기롭다.

늙은 산양은 한때는 힘껏 달렸던 넓은 들판을, 높이 올랐을 절벽을, 멋진 모습을 비추며 우쭐했던 강을 찾아 여행을 한다. 결국 그가 돌아온 곳은 집.

그의 여행이 헛걸음이 아니었냐고? 아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늙은 산양은 비로소 늙고 약해진 지금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평안은 그에게 깊은 잠을 선물한다. 모두가 꿈꾸는 영원한 황금빛 안식을.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어쩌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삶 이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좀 더 편하고, 자연스러우며, 이왕이면 멋진 죽음을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먹고 자고 일하고 움직이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늙은 산양 씨가 내게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더 이상 힘차게 달리고 더 높이 오르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으로 괜찮으니 조금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책장을 닫고 다시 보니 처음에 보였던 산양의 굽은 허리와 지팡이는 잘 보이지 않고, 어느새 양의 머리 위로 단단하게 솟은 두 개의 뿔이 두 눈 가득 들어온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힘차게 살다 간 그는 누가 뭐래도 멋진 산양이었다.

 

이야기가 내내 작가 특유의 솔직함과 그동안 작가의 작품 속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던ㅋ시크한 유머까지 더해져 깊은 감동과 풋 하고 삐져나오는 웃음까지 선사하는 멋진 작품이다.

 

아참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산양 씨가 깊은 잠에 들기 전, 그즈음 어딘가에서 만나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이, 거기 산양 씨~, 지팡이 좀 짚고 불편하게 걸으면 어때요? 비틀거리면서 당신이 남긴 발자국들이 멋지기만 한 걸요. 게다가 노란색 지팡이는 힙! 하기까지 하다고요!”

"어이, 잘 있게. 친구. 나는 죽기 딱 좋은 곳을 찾아 떠나네."
"마지막으로 멋지게 달리다 죽는 거야."
- 와우! 이런 호탕함이라니. 멋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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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2 2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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