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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공범자들
임지현 지음 / 소나무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우리는 한겨례고 단군의 자손이고,, 주저리 주저리,, 5000천만년의 유구한 역사,,
의례 이뒤엔 통일의 불가피함이 결론으로 자리한다.
너무도 익숙한 도식이다. 하지만 이 도식에 한번도 왜라는 물음을 가져보지 못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일년에 한두번은 꼭 있었던 통일과 관련된 글짓기날,,
그 어린나이에 통일의 경제적측면과 비용은 거시기하더라도 왜 통일이 당위적이 되어야만하는지는 한번이라도 생각해봄직했다. 그 당연한 물음을 떠올리지 못한것은 어린꼬마의 인식틀을 규정했던 민족이란 단어의 마력때문이리라.
웬지 영속적이고 무한한 흐름을 연상시키는 민족,, 한국인에게 민족이란 말이 갖는 함의는 특수함을 넘어 애절함이나 간절함까지 느껴진다. 마치 ‘정‘ 이나 ’한‘과 같이 말이다.
외세에게 990번이 넘는 침략을 받았으나 한번도 다른나라를 침범한적없는 민족이란 사실을 주입받은 한국인들이 민족주의의 배타성이나 배제의 논리를 들여다보는것은 쉽지않은 일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해도 저항민족주의에 매몰된다는것은 또다른 억압,차별기제를 내포하는것이고, 식민주의의 기억에 대한 세습적 희생자의식은 우리를 가해자의 입장으로 포지셔닝 할수 있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된다고 말한다.
현재 중동지역에서의 이스라엘 시오니스트들의 강경 기조는 우리의 반면교사가 될수있다고 한다. 어린 이스라엘 군인들이 똑같은 사람인 팔레스타인의 주검앞에 당당할수 있는것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세습적 희생자’라는 각인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들을 희생자의 위치에 묶어둠으로써 그네들이 현재자행하는 부조리에 눈을 감게하고, 면죄부를 부여하는 이율배반적인 틀거리가 우리에게도 체화될수있음을 깨닳아야한다고 필자는 말한다.
필자에겐 60-70년대 경제독재개발 시대를 살았던 민주화세력들이 기댔던 민중 민족주의도 절대선이 될수 없다는 점에서 ‘민족주의’ 자체가 양날의 검이다.
포스트 9.11후 미국의 헤게모니 작동방식에서의 반이슬람주의와 빈라덴의 반미주의노선이 서로의 정치적입지를 강고히하는 은폐된 동맹이라 규정한후 실질적인 피해자는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민중이란 지적은 통렬하다.
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일본의 내셔널리즘또한 적대적 공생관계로 바라볼수 있으며, 이런 기만적인 동맹을 깨뜨릴수있는 첩경으로 새로운 역사관을 갖자고 말한다.
절대선이나 최선으로 여겨지던 국사란 틀을 깨뜨리잔것이다.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와 이해를 반영한것이 '국사'란 패러다임이고, 이전의 역사과정들을 만들어진지 200여년됨직한 ‘근대‘란 개념안에 포섭시킨다는것이 골프구멍에 에드벌룬을 넣는것과 같다고 말한다.
필자가 주장하는것들이 새롭고 신선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등의 외교분쟁에있어 감정을 앞세웠던 내게 그보다 근본적인 판을 걷어내야 된다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열린 민족주의, 닫힌 민족주의 든 시민 민족주의든 그 그릇안에 믹스되는 재료에 따라 그릇의 성질도 바뀔수있다는점, 어떤 선의 사상이나 개념이든 권력담론에 포섭될수 있고 타자들을 공격할수 있는 창이 될수 있다는것.
끝까지 뚜렷한 대안을 발견하지 못한것은 아쉽지만 기존의 통념과 당연한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물음을 가져보는것이 성찰하는삶의 출발점임을 일깨워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