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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올해의 문제소설 - 현대 문학교수 350명이 뽑은
한국현대소설학회 엮음 / 푸른사상 / 2014년 2월
평점 :
- 이기호의 ‘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 에 대하여 : 이기호의 살짝 아래로 굽은 시선
나정만과 같은 사람들 여럿이 있었다. 졸지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그들은 살기 위해 저항했다. 원한 것은 보장받아 마땅한 주거권과 생존권뿐이었으나 그것들을 보장받도록 도와주어야 할 권력에 의해 오히려 죽임 당했다. 나정만은 결국 그 참사에 엮이지 않았다. 그의 붐대도 굽지 않았다. 그러나 작품 속 작가는 굳이 그를 찾아 인터뷰한다. 그는 권력층 가해자도 아니고 참사의 피해자도 아니며 직접적인 목격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 참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무언가 바꿔보려 목소리를 높이는 정의의 사도는 더더욱 아니다. 엄연히 말하면 나정만은 그저 붐대가 휘지 않은 것에 기뻐하고 참사를 이야기하면서도 후식 냉면을 찾는 일개 시민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기호는 - 작품 속 작가는 이기호 본인과 대응되는 인물일 것이다 - 왜‘용산 참사’라는 심각한 사건을 이야기하면서도 게서 얼마쯤 비켜나있는 인물의 목소리를 담았을까. 심지어 인터뷰어의 말은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고 오로지 일개 시민 나정만의 이야기만이 소설을 채운다. 만남과 대화, 오해와 화해의 인터뷰 속에서 엿보는 나정만의 인생은 비겁, 한심, 이기, 변명 같은 단어들과 맞닿아 있다. 현대 사회의 한가운데서 그는 흥미와는 관계 없이 진로를 선택했고, 주관 없이 일하며, 가족들과 먹고 살 돈을 벌기 위해 버틴다. 그의 삶에서 돈은 법과 자존보다 우위에 있다. 그런 그에게 ‘용산 참사’가 관련 없는 일, 자신에게 피해를 줄뻔한 일, 하지만 피해갈 수 있어 다행인 일에 불과한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는 더 나아가 그 투쟁이 ‘끝도 빤히 보이는데 떼쓰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죽었고,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이들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었다는 그 비참한 사실에도 분노는커녕 피해자들에게 화살을 돌리는 꼴이 아닌가. 소름 끼치도록 무정한 일면이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책을 덮고 싶어지는 그 불쾌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현대 사회의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나정만만의 일면이라며 비난하고 섣불리 책을 덮기에 이 세상은 책 속 세상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1920년대, 일제 강점의 한가운데 섰던 이들은 ‘용산 참사’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권력층에 당당히 저항하였고, 변화를 바라며 불같이 타올랐다. 당시 쓰여진 소설들 또한 그렇다. “당신은 최하층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탄 같아야 합니다. 가정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같은 여성에 대하여, 남성에 대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반항하여야 합니다. (중략) 당신은 또 당신 자신에 대하여서도 반항하여야 되오. 우리는 다같이 굳센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근대 소설의 대표 격인 조명희의 「낙동강」에서 작가는 직접 부딪히는 삶을 사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려 모든 부당에 목소리 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폭발탄처럼 맹렬히 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필연 이 격동의 시기가 지나고 해 뜰 날이 올 것이라 말한다.
다시 이기호와 우리의 시대로 돌아와보자. 조명희의 시대에서 백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일제는 무너졌고, 신분 차별은 철폐되었으며 의식주 환경은 비할 수 없을 만큼 나아졌다. 그렇다면 지금은 조명희와 「낙동강」이 꿈 꾼 그 해 뜬 때인가. 세월의 간극 속에서 무수한 투쟁이 일어났다. 약자의 승전보가 울리기도 했다. 그러니 무너진 것들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결국 그 위로 꽂히는 깃발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자본주의에 몸을 불리며 오는 강자의 것이었다. 이런 현실을 계속해서 마주하게 되는데 희망에 찬 분노가,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이, 함께 행복해지려는 마음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것들을 잃고 잃어 종내 우리는 비겁, 한심, 이기, 변명 같은 단어에 지배당하게 되어버렸다. 술에 취해야만 겨우 터지는 폭발탄 같은 고백도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 아니냐고요?” 하는 두려움밖에는 담지 못 하게 되어버렸다.
대부분의 우리는 권력층 가해자도 참사의 피해자도 직접적인 목격자도 아닌 채로 어떠한 불의에서 얼마쯤 비켜나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눈을 감는다. 화내고 저항하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이 마음 한 켠을 차지하기도 한다. 이기호는 문제를 관통하는 시선을 살짝 굽혀 나정만을 인터뷰함으로써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그 아래 또 다른 나정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작가의 목소리까지 생략된 일방적인 폭로는 또 다른 나정만들, 다시 말해 일개 소시민과 같은 ‘우리’를 그 폭로 속에 더욱 무방비한 상태로 노출시킨다.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구질구질’한 일면들이 결코 나정만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깨닫게 된다. 그 후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은 자기성찰과 이 사회에 대한 성찰, 그리고 조금은 바뀌어도 될까, 분노해도 될까, 하는 생각들이다.
이 모든 것이 진정 이기호의 의도였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또 이 사회가 나정만을 비난할 수 있을 만큼 떳떳하지 않다는 것이다. 두려움 섞인 나정만의 마지막 물음에 이기호 조차도 그렇지 않다 당당히 대답할 수 없는 세상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기호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제가 몸담은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깨닫고, 비로소 성찰할 기회를 내어주고 있다. 진정 인간다운 삶의 모습을 찾을 기회를 내어주고 있다. 변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