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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푸셰 -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전면 새번역 ㅣ 누구나 인간 시리즈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상원 옮김 / 이화북스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어제가 10.26 사태 40주기였다. 정국이 요즘 어수선한 탓인지 그 때 생각이 많이 난다. 그런 틈틈이 이 책을 읽었다.
푸셰라는 이름은 생소하지만 저자가 슈테판 츠바이크이고 주인공이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을 이긴 철새정치인이라니 단번에 궁금해 졌다.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올린 인물은 박정희였다. 변절을 거듭하며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인물이기 때문이리라.
푸셰의 생애는 격동의 시대사와 뗄래야 뗄 수 없이 맞물려 있다. 소시민 출신이 의원과 장관이 되고 잠시나마 프랑스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프랑스 대혁명 덕이다. 자유 평등 우애의 기치를 내걸며 낡은 질서를 한 순간에 무너트린 프랑스 대혁명은 정말 흥미롭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다룬 이런 저런 책을 읽었지만 전형적 영웅과는 상극인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시대사는 처음인 것 같다. 이념과 열정에 사로잡힌 영웅과는 달리 오직 권력과 부를 노리는 냉혈한 푸셰의 전기를 읽으면서 그 참신한 접근에 이제껏 가려져 있던 풍경, 다시 말해 적나라한 정치의 민낯이 시원히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푸셰의 인생역정만큼이나 흥미로운 부분은 츠바이크가 정치의 작동원리와 지배자와 피지배자 심리를 비롯한 정치의 천태만상을 묘사한 부분이다. 인간심리 분석의 대가답게 츠바이크는 인간의 비겁함과 탐욕, 권력자의 비정함과 자기도취 등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로베스피에르 공포정치 시절의 분위기를 서술한 대목이다.
"옛날에는 몹시도 용감하고 정열에 넘치던 의원들은 지금은 겁먹고 당혹스러워하며 말없이 자리에 앉아있다.
신경을 갉아먹고 영혼을 으스러뜨리는 끔찍한 독소가 그들의 의지를 마비시킨 것이다. 이 독소의 이름은 불안이다.
그러나 독소에는 오랜 비밀이 하나 있다.
독소 안에 독소를 치유하는 힘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독소를 인공적으로 증류하여 그 안에 숨겨진 갖가지 힘들을 압축하기만 하면 된다.
이 경우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두려움은 역설적으로 로베스피에르로부터 목숨을 구하는 힘이 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몇 주 동안 혹은 몇 달 동안 다른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는다면,
불확실한 상태를 지속시켜서 상대의 영혼을 파괴하고 의지를 마비시킨다면 아무도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 단 한 사람의 독재를 오래 참아야 하는 경우 인류는,
혹은 인류의 일부인 어떤 집단은 그 독재자를 반드시 증오하게 마련이다. 바로 이런 억눌린 자들의 증오가 여기저기에서 은밀히 끓어오르고 있다." 103
1794년 얘기가 마치 유신 말기의 분위기를 묘사한 것 같다.
말 한 마디만 생각 없이 내뱉어도 영장 없이 끌려가던 시절 부마항쟁이 일어났다는 건 정말 믿기지 않는다. 독소 안에 독소를 치유하는 힘이라니! 츠바이크의 유려한 문체에 정말 경탄하게 된다.
푸셰는 경찰장관이 되어 온 국민을 사찰하고 심문하는 근대적 정보기관을 창출하고는 정보를 무기 삼아 실세 정치인으로 입지를 굳힌다.
"그는 점차 프랑스 전역에서 임명장 없는 고해신부 노릇을 하며 여러 사람들의 비밀을 손 안에 넣게 된다. 일찍이 리옹에서처럼 그는 테러에 의해 사람들을 지배한다. 다만 테러의 도구는 이제 목을 내려치는 어설픈 도끼가 아니라 인간심리를 파고드는 독소이다.
이 독소는 불안과 죄의식으로 작용한다.
도청당하고 있음을 느끼고 발각되었음을 깨닫는 순간 독소는 퍼져 버린다. 이 독소로 그는 수천 명의 숨통을 옥죈다. 1792년 국가에 대한 모든 저항을 억압하기 위하여 발명된 단두대는
1799년 조제프 푸셰가 고안해낸 세련되고 지적인 경찰청 기계장치에 비교한다면 어설픈 연장에 불과하다."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가 뿜어내던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와 닿는다.
박정희를 영웅시하며 그 시대를 미화화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뇌를 갖고 있는 걸까?
박정희가 생각나는 대목은 또 있었다. "학식과 권력을 갖춘 황제가 항상 높은 위치에서만 세계를 내려다본다고 치자. 그는 굽실대는 백성이 황송해하며 모든 명령을 받들려고 하는 위험스러운 상황만을 경험하게 된다. 언제나 스스로 측량의 기준을 정하는 자는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지를 잴 수 없게 된다." 15년 넘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는 급기야는 종신 대통령이 되려 했다.
너무 오래 몸소 측량의 기준을 정한 탓에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지를 잴 수 없게 되었던 걸까?
물론 푸셰는 박정희와는 많이 다르다. 푸셰는 막후의 인물이며 유연성과 인내심으로 위험한 정국을 요리조리 뚫고 나갔다. 그에 걸맞게 푸셰의 말년은 쓸쓸하긴 해도 드라마틱한 비극은 없다. 정치동료들이 한창 나이에 목숨을 잃었지만 그는 환갑을 넘겼으니 당시 기준으로는 오래 산 셈이고 말년까지 부를 누렸으니 말이다.
죽음을 앞두고 다시 종교로 귀의한 건 기회주의자인 푸셰에 어울리는 듯 하다.
최고의 마키아벨리스트이면서도 그 말 한 마디로는 다 묘사할 수 없을 만큼 모순적이고 다면적인 인물 푸셰, 작가는 이 인물에게 섣불리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흑백논리를 피하며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한다. 그는 전쟁광 나폴레옹을 저지하려 했던, 현실감각을 지닌 정치인이며 좋은 남편에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무미건조한 관료 형 인간이라는 가면 뒤에 신경질적이고 교활한 도박사의 면모가 숨어 있듯이 믿어서는 안될 위험한 사람 푸셰 뒤에는 프랑스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량한 시민이자 남편의 면모가 수줍게,
보이지 않게 숨어있다. 가정이라는 가장 좁은 범위 안에서만 마음을 놓고 편안해 하는 외로운 남자가 숨어있다. 이 교활한 모사가는 마음 깊숙이 박힌 선량함과 정직함을 집에서 아내를 조용히 사랑하는데 썼던 것이다."
여태껏 읽은 츠바이크의 전기 중 내용과 문체가 이토록 탁월했던 게 있었나 싶다.
정치의 이면을 들여다 보고 싶은 이들, 혼란한 정국에서 나름의 나침반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