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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뿌리 깊은 나무- 이정명
보통 역사를 재구성하기에 알맞은 소재는 연산군, 광해군, 장희빈, 사도세자 등 특정인물이 정해져 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광기, 권력의 암투 등으로 볼 수 있는데, 작가 이정명이 선택한 소재는 교과서나 위인전에 자주 등장하는 세종대왕 시대의 집현전 학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소재를 가지고 이정명은 그 어떤 추리소설이나 역사소설보다도 흥미롭고 가슴 벅찬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소설 '뿌리 깊은 나무'이다.
우리 나라 역사에 있어서 그 어느 곳보다 신성시 여겨지는 궐이란 장소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을 신분이 낮은 겸사복 강채윤이란 인물이 추적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건은 여러가지 복선과 뜻을 알 수 없는 문자, 기호, 천문, 그림, 건축양식, 학자들의 문신 등 다양한 지식과 소재로 강채윤의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방대한 지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사건을 오리무중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깊은 곳으로 끌어들이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작가가 생각해낸 방대한 지식의 산에서 헤매이던 독자들과 주인공 강채윤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드러나는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게 되고, 거기에 숨겨진 우리 역사의 비밀을 알게 된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뀐 시대 속에서 세종은 사대부의 전유물인 유교경전과 경학, 중국의 고전만을 궁리하고 번성케하는 문관들 만으로는 부국강병과 국태민안이 어렵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아 젊은 학사들을 중심으로 한 개혁정치를 시작한다. 악서를 편찬하게 하고, 새로운 악기를 발명하고 도량형을 정비하고, 화폐제도를 창설하였고, 이 땅의 토질과 기후에 맞는 농사직설을 편찬하는 등 이러한 개혁정치는 백성의 삶을 일정부분까지 윤택하게 하지만 그 이상을 바라기 위해서는 제 나라의 말과 그 뜻이 상통하는 문자가 있어야 함을 느끼고 새로운 문자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경세실용학파의 개혁정치가 경학의 도를 따르는 사대부와 대제학을 자극하여 궐에서 일어나는 학사들의 살인사건의 원인이 된다.
이런 경세실용학파를 생겨나게 한 금서 고군통서의 저자와 그 서책의 행방을 좇으며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겸사복 강채윤이 좇는 것은 연쇄살인의 범인이 아닌 우리 문자를 만들어낸 세종대왕과 학사들의 노력과 의지다. 그리고 그들이 걸어온 외롭고 험한 길을 보여준다. 새로운 시대를 바라며 자국의 문화가 궐을 벗어나 우민한 백성들을 깨우치고 문자와 소리가 그들의 삶 속에서 녹아들고 찬란한 역사와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일신의 안위도 잊고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그들의 개혁 정치에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벅차고 뜨거웠다.
가끔 이야기 중간 중간 흐름을 끊는 부분과 마지막에 와서 서둘러 탈고한 듯 맥이 풀리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세자빈 봉씨를 개혁의 희생물로 만든다던가 하는 시대를 다르게 볼 수 있었던 작가 이정명의 잘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정말 그럴싸하다. 추리고 추려진 간결한 문체와 빠른 진행, 그 시대의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따듯한 시선이 녹아든 이 작품은 책 겉에 쓰여진 것 처럼 '멋진, 아름다운, 뿌듯한 역사는 없었다' 이다. 책 뒤에 부록으로 나와있는 세종대왕 연보와 훈민정음 해례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껴지던 우리 역사와 문자의 위대함에, 이 글을 타국에서 번역된 다른 언어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