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이 (백색인), 신들의 아이 (황색인)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10년 4월
장바구니담기


엔도 슈사쿠. 20세기 일본 문학의 거장이라는 그의 초기작인 이 소설은 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끔 한다. 신의 존재가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큰 백색인과 별 영향이 없는 황색인의 관념을 천주교신자인 작가의 글에 나타난다.



역자 역시 천주교이고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번역하고 있는듯 그의 번역작은 모두 슈사쿠의 작품이다. 원제는 백색인과 황색인으로 동시에 진행되었지만 각각 개별의 작품이면서도 맥락을 같이 한다.

어머니로부터 철저한 종교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지만 오히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독일인과 프랑스인의 혼혈 청년.

사팔뜨기로 태어나 친아버지로 부터 '넌 평생 여자들로 부터 인기를 끌지 못할거야'라는 말과 창밖에서 보았던 늙은 개를 괴롭히던 하녀의 하얀허벅지는 그의 인생이 악한 사디스트가 되는 계기가 된다. 학창시절 자신을 개화시키려고 노력한 추한모습의 신학생을 저주하며, 그와 관련된 처녀 마리테레즈를 농락한다. 프랑스를 침공한 독일인의 통역사가 되어 우연히 만난 신학생을 고문하며 쾌감과 고뇌를 동시에 느끼는 주인공. 신학생에 집착하는 모습은 신의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백색인을 보여준다.



신들의 아이 황색인은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신부의 성당에서 어린시절 세례를 받은, 신을 믿지 않고 신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은 일본인 청년 치바가 브로우 신부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전개 된다. 일본여성 기미코와 육체관계를 가지게 되어 파문된 전직신부 듀랑의 일기가 중간중간에 섞여있다. 파문당해 신을 배반한 듀랑은 기미코와 살면서 브로우 신부에게 생활비를 얻어쓰며 살고 있다. 후배이제 현직 신부인 브로우를 배신하는 모습은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모습처럼 나타난다.



신의, 신들의의 차이는 유일신과 다수의 신이 공존하는 동양과 서양의 모습을 대변한 제목이다. 신의 존재가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서양과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동양의 차이를 나타낸다. 교회가 별로 없다는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와 천주교의 십자가들이 전국을 뒤덮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신의 존재는 인생과 밀접한듯 하다. 무슨일을 해도 신과 연관을 시키기 때문이다.



작가가 천주교라는 것을 소설에서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객관적인 관점에서 쓰여진듯하다. 독자로 하여금 신의 섭리에 대해 설득하고자 하는 느낌은 없다. 그냥 신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신의 존재는 인간에게 평안을 주기도 하고, 전쟁을 일으키게 하기도 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식이든 인간과 뗄레야 뗄 수가 없다. 천주교나 개신교가 타종교나 무신론자들에게 신의 탈을 쓰고 행한 많은 죄악들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고, 그들도 인정하지만 신을 버리지 않는다.

시대적 관념에 따라 종교도 조금씩 달라지는 듯하다. 마녀사냥을 하던 시대에는 개인의 소망을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고, 종교인의 절제를 요구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도한다. 자본주의가 중요한 시대가 되면서 종교적 관념도 변한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 나라는 요지부동하다, 확고하다라는 문구를 지구가 움직이지 않고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해석했고, 그것이 모두에게 알려진 진리였다는 것도 아이러니다. 은유적으로 쓰여진 성경을 인간들이 그 시대에 따라 해석을 달리 하는 것이다. 신을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이책을 읽으며 신의 존재는 인간에게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보게끔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요즘 나오는 종교 에세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나열하며 자신이 신을 믿었기 때문에 어떤 이득을 얻었고 어떻게 감사하다는 식으로 쓰여진 책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질을 얻었고 또 더 좋은 천국에 가기위해 신을 믿는 행위는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심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이런것들은 원래 종교의 본질이 아니고 현 시대의 패러다임이 반영된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시대의 종교 논리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종교를 더 깊이 이해하고 본래의 참 의미, 예수님이 어떤 가르침을 주려고 했는지를 더 생각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인도자의 이야기를 맹신하는 것보다 자신이 그 의미를 깨달아 가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 일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