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의 아들.

짧지만은 않은 스물 하나의 이야기를 담아오며, 그 시간 속에 종교에 대한 나름의 고민과 애정을 가졌던 사춘기의 기억이 스치듯 지나운다. - 절대 신에 대한 부족한 생각의 깊이로 인해 가장 가까웠던 벗과 언쟁을 벌였었고, 그로인해 종교와 그 친구를 잠시 피해 있었던 시간 - 그러했기에 종교는 나에게 가장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면서도, 주위 분들과는 언급해서는 안 될 이야기로 남아 있었다. 특히 기독교에 대해선 말을 더욱 삼갔다. 그런 와중 <사람의 아들>을 손에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주위의 이야기처럼 책장이 쉽게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괜스레 장을 더할 적마다 난해한 신들의 나열로 인해 더 큰 산들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힘겹게 조동팔이 독약을 먹고 죽는 마지막 장면을 덮는 그 순간까지도 책을 읽었다는 느낌보다는 난해한 영화 한편을 보았다는 느낌이었다.

나아가 비기독교인 이라는 편견 때문일까... ‘천상의 구원’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로 다가온 예수 보다는 ‘지상의 구원’을 우선시 하는 아하스 페르츠에게 좀더 진한 애정의 깊이가 느껴졌다. 이는 초월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한 예수의 구제와는 달리,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다가선 아하스 페르츠의 민중에 대한 구원과 신을 향한 고뇌 앞에, 그에 대한 연민의 정이 솟아난 듯싶다.

감히 다룰 수 없었던 신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신을 창조하기까지의 이야기.

70년대 대한민국을 살아간 민요섭과 조동팔이 만들어 놓은 합일된 신을 바라보며, 결국 그들을 (자의든 타의든) 죽음으로 이르게 한 신이란 존재에 대해 뜻 모를 쓸쓸한 미소가 배임은 무슨 까닭일까. 쿠아란타리아서 위대한 지혜와 선을 동시에 지닌 신. 양면성을 지닌 신이란 존재 앞에 끊임없는 의구심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의심이 무얼 뜻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바보 같은 이 생각은 무엇일까.

민요섭은 자신이 그려놓은 메아리 없는 신의 존재에 회한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기독교로 돌아가고자 했다. 나아가 조동팔의 귀의 역시 바랬으나, 그의 행동주의적인 모습을 뒤로 하고 결국 떠나버린다. 왜 그토록 부정하고 변혁하려 했던 기독교로 돌아간 것일까? 자신의 모든 것 바쳐 만들어 놓은 신이란 존재에 대해 포기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조동팔은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판단에 관여하지 않는 신, 먼저 있는 존재를 뒤에 온 말씀으로 속박하지 않는 신,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시인하는 신, 천국이나 지옥으로 땅 위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 신, 복종과 경배를 원하지 않고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지 않는 신, 우리의 지혜와 이성을 신뢰하며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신이 우리들의 신이라 했다. 즉, 신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 손에 부치었다 했다. 우리끼리 용서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서 용서된다고 했다.

‘신은 누구인가? 신은 무엇인가?’

사춘기 시절 짧게나마 고민했던 신에 대한 모습과 신이란 이름을 함부로 내뱉기엔 이 사회가 너무도 경직되어 있음을 깨닫고 함구해버린 지난 이야기. 그로인해 애써 무시했던 신에 대한 이야기. 나는 다시금 새벽 차창 너머, 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아본다. 그리고 그가 우리 곁에 있음을, 우리가 그를 믿고자 하면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숨쉬고 있음을 느껴본다. 나아가 신이란 존재에 대해 우리가 설령 못 느낀다 할지라도 조동팔의 마지막 말처럼 언제나 고독한 신성으로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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