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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ㅣ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이 <타인의 고통> 역시 Genocide나 Holocaust, 內戰, 인종차별 등, 깊은 관심을 갖고 읽어 온 많은 책들과의 관련 하에서 그야말로 한줄 한줄 고통스럽게 읽은 책이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전쟁이나 지진, 기아 등의 참혹한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며 '타인의 고통'을 소비해 왔다. 전쟁없고, 굶주림없고, 내 육체의 온전한 보존이 가능한 안락한 곳에 앉아 저 멀리 아프리카의 내전을 담은 끔찍한 이미지의 사진들을 감상하며 방관자로 살아왔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실명한 영국 병사들을 찍은 사진이나 저 유명한 로버트 카파의 '어느 공화국 병사의 죽음' 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 오마하 비치를 찍은 흔들리는 사진 등, 우리의 뇌리에 남아 과거를 반추하게 만드는 이미지들.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991년의 걸프戰은 그때까지의 전쟁을 나와 가까이 있는 실체로써가 아니라 텔레비전을 켜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스펙터클로 만들었다. 전쟁이 게임처럼 진행되고 첨단 무기들끼리 부딪치며 끝나고 나면 깨끗하게 정리되는 사건현장처럼 그렇게 소비된다. 사람들은 서서히 전쟁에 대해 잊게 되고 오직 충격적인 이미지들로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전시되거나 우리의 눈 앞에 다시 제시된다. 즉, 사람들은 저 멀리서 벌어진 전쟁에서 몇 사람이 죽었고, 몇 채의 집이 파괴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蠻行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오직 텔레비전의 화면과 몇 장의 사진을 통해서만 '보는' 것이다. 전쟁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은 다음 번 전쟁을 막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다.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면서 이번엔 어떤 이미지로 전쟁을 정리할 것인가가 중요할 따름이다. "...곳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극적인 사건들에 노출된 시청자들이 어떤 분쟁을 중요하다고 의식하도록 만들려면, 이제는 그 분쟁을 다룬 단편적인 필름들을 일상적으로 확산시키고 또 확산시켜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들이 가져다 주는 충격을 통해서 전쟁을 이해한다."(p.43) 이렇게 내가 아닌 타인에게 이 곳이 아닌 저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고통들은 오락거리로 전락하여 오늘자 신문에 실렸다가 내일자 신문에서는 더욱 참혹한 사진들로 신속하게 대치되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나와는 관계없는 열등한 인종이 살고 있는 곳이니까 하고 외면하거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체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라며 시선을 돌리는 동안,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뿌리 뽑혀 나가고 있다. 즉,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구가하고 있는 소위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현장들을 담은 사진들이 아무리 화랑에 전시되고 텔레비전에 비추어진다 해도, 내 육체의 훼손이나 정신의 파괴가 아닌 이상 그저 구경거리에 불과할 뿐,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거나 연대의식을 느끼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그곳에 태어난 것이 죄일뿐, 나는 그곳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가 용인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곳에 태어났고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다면 똑같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아니, 육체적 고통 이전에 강제로 목숨이 먼저 끊겼을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참혹한 이미지들은 시공을 넘어 인간조건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왜 이토록 폭력적인가? 아니, 왜 폭력에 경도되는가? 적을 상정하고 타자화, 또는 비인간화하여 자신의 내면의 광기를 여과없이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것이 인간인가?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진을 통해 전달되는 타인의 고통은, 특히, 죽음의 순간(혹은 바로 그 직전)을 찍은 것일 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마련이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염려없이 그저 타인의 죽음에 '나중에' 입회한다는 시공간적 후발성에 의해 정서적 축소를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저 사람의 죽음에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말하자면 사진을 보고 있는 나는 사진 속 희생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그 사진을 더욱 주관적 경험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거리감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특히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에 의해 대량으로 학살당한 캄보디아인들의 처형 직전 찍은 사진들(p.97)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성의 폭력적 근원에 대해 도대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하는 절망적인 상념마저 불러 일으킨다. 왜 그들의 사진을 찍은 것일까? 곧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겁에 질린 모습을 카메라로 기록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이것이야 말로 공포의 재생산이 아닌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또는 현상된 자신의 얼굴을 결코 볼 수 없었던, 강제로 목숨을 박탈당하기 직전 사람들의 사진은, 그 사진을 찍도록 명령한 권력자의 잔학성 아래 권력이 부여하는 '완전한 지배'에 대한 맹목적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저항할 수없는, 아니, 저항할 의지마저 놓아 버린 同種을 학살하면서 권력자는 극한의 성적쾌락을 경험할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공포에 익숙해지면서 공포를 넘어서는 인식의 무디어짐에 익숙해지고 결국 외부의 충격에 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강제된' 적응이다. 아무런 대안도,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그러면 왜 인간은 집단적 교훈을 얻고 나서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일까? 사진을 통한 기억의 보존이 오히려 동일한 잔악행위를 유발하는 것일까? 혹시 참혹한 대량학살의 이미지가 또 다른 대량학살이 재생산되는 추동력은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재현의 실패가 아닐까?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진을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이미지만을 소비하고 나의 안락함 뒤로 숨는다는 뜻은 아닐까? 그러면 근본적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중략)....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p.154) 즉, 내가 누리고 있는 안전과 신체의 보존은 결국 타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거나 빌려온 것이라는, 이제까지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인간애 또는 인류애라는 보편적 연대의식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안락과 평화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고 그들의 권리를 빼앗은 폭력의 결과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책읽기였다. 그래도 진실의 문에 한 발 다가선 느낌이다. 평화를 원하는가? 이 책을 읽고 자문자답해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