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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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타인의 고통> 역시 Genocide나 Holocaust, 內戰, 인종차별 등, 깊은 관심을 갖고 읽어 온 많은 책들과의 관련 하에서 그야말로 한줄 한줄 고통스럽게 읽은 책이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전쟁이나 지진, 기아 등의 참혹한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며 '타인의 고통'을 소비해 왔다. 전쟁없고, 굶주림없고, 내 육체의 온전한 보존이 가능한 안락한 곳에 앉아 저 멀리 아프리카의 내전을 담은 끔찍한 이미지의 사진들을 감상하며 방관자로 살아왔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으로 실명한 영국 병사들을 찍은 사진이나 저 유명한 로버트 카파의 '어느 공화국 병사의 죽음' 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일 오마하 비치를 찍은 흔들리는 사진 등, 우리의 뇌리에 남아 과거를 반추하게 만드는 이미지들.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멀리서 벌어지고 있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991년의 걸프戰은 그때까지의 전쟁을 나와 가까이 있는 실체로써가 아니라 텔레비전을 켜면 언제든 볼 수 있는 스펙터클로 만들었다. 전쟁이 게임처럼 진행되고 첨단 무기들끼리 부딪치며 끝나고 나면 깨끗하게 정리되는 사건현장처럼 그렇게 소비된다. 사람들은 서서히 전쟁에 대해 잊게 되고 오직 충격적인 이미지들로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전시되거나 우리의 눈 앞에 다시 제시된다. 즉, 사람들은 저 멀리서 벌어진 전쟁에서 몇 사람이 죽었고, 몇 채의 집이 파괴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蠻行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오직 텔레비전의 화면과 몇 장의 사진을 통해서만 '보는' 것이다. 전쟁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이미지들은 다음 번 전쟁을 막는 데 크게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다.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면서 이번엔 어떤 이미지로 전쟁을 정리할 것인가가 중요할 따름이다. "...곳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극적인 사건들에 노출된 시청자들이 어떤 분쟁을 중요하다고 의식하도록 만들려면, 이제는 그 분쟁을 다룬 단편적인 필름들을 일상적으로 확산시키고 또 확산시켜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오늘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들이 가져다 주는 충격을 통해서 전쟁을 이해한다."(p.43) 이렇게 내가 아닌 타인에게 이 곳이 아닌 저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고통들은 오락거리로 전락하여 오늘자 신문에 실렸다가 내일자 신문에서는 더욱 참혹한 사진들로 신속하게 대치되는 것이다. 아프리카는 나와는 관계없는 열등한 인종이 살고 있는 곳이니까 하고 외면하거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체첸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라며 시선을 돌리는 동안,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뿌리 뽑혀 나가고 있다. 즉,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구가하고 있는 소위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현장들을 담은 사진들이 아무리 화랑에 전시되고 텔레비전에 비추어진다 해도, 내 육체의 훼손이나 정신의 파괴가 아닌 이상 그저 구경거리에 불과할 뿐,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거나 연대의식을 느끼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그곳에 태어난 것이 죄일뿐, 나는 그곳에 태어나지 않았으니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가 용인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곳에 태어났고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다면 똑같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아니, 육체적 고통 이전에 강제로 목숨이 먼저 끊겼을 것이다. 따라서 전쟁의 참혹한 이미지들은 시공을 넘어 인간조건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왜 이토록 폭력적인가? 아니, 왜 폭력에 경도되는가? 적을 상정하고 타자화, 또는 비인간화하여 자신의 내면의 광기를 여과없이 드러내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것이 인간인가?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진을 통해 전달되는 타인의 고통은, 특히, 죽음의 순간(혹은 바로 그 직전)을 찍은 것일 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마련이다.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염려없이 그저 타인의 죽음에 '나중에' 입회한다는 시공간적 후발성에 의해 정서적 축소를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저 사람의 죽음에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말하자면 사진을 보고 있는 나는 사진 속 희생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그 사진을 더욱 주관적 경험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거리감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특히 폴 포트의 크메르 루즈에 의해 대량으로 학살당한 캄보디아인들의 처형 직전 찍은 사진들(p.97)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성의 폭력적 근원에 대해 도대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하는 절망적인 상념마저 불러 일으킨다. 왜 그들의 사진을 찍은 것일까? 곧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겁에 질린 모습을 카메라로 기록해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이것이야 말로 공포의 재생산이 아닌가?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또는 현상된 자신의 얼굴을 결코 볼 수 없었던, 강제로 목숨을 박탈당하기 직전 사람들의 사진은, 그 사진을 찍도록 명령한 권력자의 잔학성 아래 권력이 부여하는 '완전한 지배'에 대한 맹목적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저항할 수없는, 아니, 저항할 의지마저 놓아 버린 同種을 학살하면서 권력자는 극한의 성적쾌락을 경험할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공포에 익숙해지면서 공포를 넘어서는 인식의 무디어짐에 익숙해지고 결국 외부의 충격에 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강제된' 적응이다. 아무런 대안도,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그러면 왜 인간은 집단적 교훈을 얻고 나서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일까? 사진을 통한 기억의 보존이 오히려 동일한 잔악행위를 유발하는 것일까? 혹시 참혹한 대량학살의 이미지가 또 다른 대량학살이 재생산되는 추동력은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은 재현의 실패가 아닐까?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진을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이미지만을 소비하고 나의 안락함 뒤로 숨는다는 뜻은 아닐까? 그러면 근본적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중략)....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p.154) 즉, 내가 누리고 있는 안전과 신체의 보존은 결국 타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거나 빌려온 것이라는, 이제까지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인간애 또는 인류애라는 보편적 연대의식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안락과 평화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고 그들의 권리를 빼앗은 폭력의 결과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책읽기였다. 그래도 진실의 문에 한 발 다가선 느낌이다. 평화를 원하는가? 이 책을 읽고 자문자답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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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과 국민 사이 -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서경식 지음, 이규수.임성모 옮김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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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을 읽고 처음 알게 된 뒤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고 나서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있던 서경식 선생의 가족사와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양가적 사유체계를 담고 있는 <난민과 국민사이>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책 곳곳에 나오는 저자의 두 형과 부모님이 겪었던 가슴아픈 일들, 일본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수십만 조선인들의 스산했던 삶에 대한 통렬하고 절절한 사연들,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사회의 한결같은 차별과 노골적인 무시 내지 외국인 혐오증의 도를 넘은 일본정부의 정책 등, 국가에 귀속되어 세금을 내면서 투표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남한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처연함에 수시로 책을 내려 놓고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과거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반성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사과하지도 않으면서 외국인에 대한 차별의식과 다른 민족에 대한 적대감을 강화하며 국가주의로 급속히 기울어 가는 일본, 더욱이 이미 세계 유수의 군비를 보유하고 있는 일본이 헌법상의 제약마저 벗어 던진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p.9) 헌법 제 9조의 수정조항을 둘러싸고 일본이 벌여온 일련의 행동들은 과거 아시아를 지배하던 제국주의 시절을 다시 한 번 재현하고 싶어하는 야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의 대한국관은 과거 대조선관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않았다. 과거 "...센진(조선인에 대한 멸시적 표현)의 썩은 머리를 깍을 기계는 없다며 이발을 거부하고 쫓아 보낸다, 정거장 대합실에서 자리를 양보하라며 구둣발로 찬다, 오늘은 조선이 일본에 패한 날이라며 조선 아이를 욕하는 소학생..."(p.50) 등의 조선인에 대한 일상적 차별은 저자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조센, 조센, 꺼져, 꺼져"(p.55)라는 경험과 겹치며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민족적 차별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그만 울컥해진다. 정신대에 대한 대목에서는 일본인들의 후안무치하고, 조선을 식민지배했던 과거의 오만함이랄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는 편견의 극한에 그만 일본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생각이 스칠 정도로 깊은 인식의 골이 패여 있다. 여기에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광범위한 역사왜곡까지, 일본과 얽힌 악연은 언제나 한국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날 수 밖에 없다.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들 대부분은 일제시대 때 강제동원되어 일본의 탄광 등에서 노동하다 죽어간 조선인들의 후손이다. 말하자면 일본이 필요에 의해 (그들 표현대로) 내지에 끌고 와 실컷 부려먹고는 해방 후 모든 권리를 박탈한 채 방기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이 조선을 강제 합병하지 않고 구미의 마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겠다는 비논리적인 정책을 펴지 않았더라면 결코 일본에 살지 않았을 사람들이 바로 재일 조선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모든 책임은 일본에게 있는데 도리어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비윤리적인 태도가 재일조선인들을 절망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해방 후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이 얽어맨 저자의 가족사 역시 비극 자체다. 고국인 남한으로 유학 온 저자의 두 형들은 간첩으로 몰려 꽤 오랜 시간동안 옥살이를 했고, 저자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인간의 조건에 대해 깊은 성찰에 이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나 대량학살로 인해 조국을 등질 수 밖에 없었던 디아스포라적 인식에 눈을 뜨게 되었고 모든 폭력과 정치적 희생자에 대한 연민내지 연대의식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자. 나를 포함한 현대의 한국인들은 재일조선인(이 표현은 저자가 고집하는 표현이다)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와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또한 일본에 대해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해방 후 한국의 정책이 재일조선인들에게 얼마나 조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는가? 아니, 재일조선인들에 삶에 대해 생각이나 제대로 해보았던가? 그들이 얼마나 차별을 받았을지, 얼마나 스산한 삶을 이어왔을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민족 차별에 일본으로 귀화하는 조선인을 단순히 비난하며 도덕적인 단죄를 강요하지는 않았는가? 사실 나도 서경식이라는 이름을 알기 전 까진 재일조선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서경식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차별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한국인의 후손으로써 일본 사회에서 계속적 투쟁을 하겠다는 결의임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재일조선인 개개인의 삶에 대해 어렴풋하나마 관심이 생긴 것에 불과하다. 처절한 반성을 해야 할 대목이다.  

서경식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출판된 책들을 모두 읽어서 그동안의 나의 무지와 무관심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다. 글을 마치기 전 몇 가지 질문을 제시해 보겠다. 지금도 외국인등록증 상시 휴대를 의무화하여 재일조선인들을 치안방해의 대상으로 항상 감시하는 일본정부의 비뚤어진 자세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재현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한국의 대일본관은 과연 어느 선상에 서있는가?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수 없이 이용해야 하는 경제적 파트너인가? 아니면 북한의 핵위협에 공동대처하며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군사협력을 강화해야 하는 전략적 파트너인가? 일본인을 믿어야 하는가? 국가로써의 일본과 일본국민은 어떻게 다른가? 한국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일본과의 공생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한 번씩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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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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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게시한  Sven Lindqvist의 <야만의 역사>를 읽고 난 뒤, Genocide와 Holocaust에 관한 책들을 찾아 부지런히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접하게 된 책이 바로 같은 저자의 <A History of Bombing, 2000>의 우리말 번역서인 <폭격의 역사,2003>다. 항공기가 발명된 이후 어느 누구에 의해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전쟁에 이용해보자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을테고 실제로 이용해보니 효과가 좋아서 전쟁수행의 효과적인 방법으로 쓰이기 시작했을 폭격. 게다가 항공기는 서구에서 먼저 발명된 것이니 만큼 최초의 이용도 결국 서구인에 의한 아프리카인 대량학살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 계속해서 폭격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가 반란이 일어난 식민지를 공격할 때도 일상적으로 활용되었고, 20세기 들어와 벌어진 수많은 전쟁과 내전에서 빼놓을수 없는 합리적 수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 과연 폭격과 대량학살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내가 직접 현장에서 내 손으로 '야수'들을 살해하는 것과 하늘 위에서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폭탄을 퍼붓는 것과의 사이에는 어떤 도덕적 간극이 있을까? 그러니까 폭격을 통한 대량학살을 가능하게 만든 원칙 또는 윤리적 선택이 있는가? 여기에서 대량학살을 합리화하고 자신의 조그만 양심마저 마비시키는 하나의 이론, 바로 인종주의가 등장한다.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을 지배할 권리가 있고, 문명인이 야만인을 문명화시킬 의무가 있다는 극히 편견에 가득찬 담론. 근대국가 성립기 유럽에서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고, 지배와 피지배를 확립하며 제국이 식민지를 개척해나가는 과정에서 등장한 가장 저열한 사이비 과학, 인종주의. 나는 백인종이고 너는 흑인종이니까, 백인은 문명인이고 흑인은 야수이니까, 사람이 야수를 죽이는데 무슨 도덕적 양심이 필요한가? 그것도 저 높은 하늘에서 보이지도 않는 '야수'들을 향해 폭탄을 떨어트려 즉사시켜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서구인의 가공할 오만 앞에 흑인종, 황인종은 그저 인간이 아닌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에 불과할 뿐, 벌레들을 대량으로 죽인다고 한들 양심에 거리낄 것은 전혀 없지 않은가? 지독한 타자화, 나와 너를 철저히 구분하여 너를 비인간화 하는 폭력성의 극한, 우글거리는 벌레들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근대 도구적 기술의 극치, 폭격. 하긴 흑인종, 황인종 뿐아니라 같은 유럽인들끼리도 무던히 죽였지. Battle of Britain이나 독일 본토 폭격이나 결국 폭탄을 떨어트려 적대국의 국민들마저 싹쓸이 하겠다는 단순명쾌한 전술적 귀결이 아니었던가? 저 아래 주거지에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먹고 어떤 문화와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인간이 아닌 야수, 벌레들을 가능한 신속하게 처리하고 내가 속한 인간집단으로 돌아가 나와 내 가족, 내 민족만 인간답게 살면 되는 것이다. 



1945년 8월 6일 아침, 8시 16분 2초에 초강력 무기의 꿈은 실현되었다. 12,500톤의 TNT의 위력을 가진 최초의 원자폭탄이 아무 경고도 없이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발하였다.....(중략).....구조팀이 그날 나중에 그 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을 때, 구조할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들의 임무는 주로 수만 구의 시체를 모으고 제거하는 데 있었다. 즉사했던 사람들은 폐허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분이나 몇 시간 더 살았던 사람들은 다리 위나 강변에 무더기로 쓰러져 있거나 불기둥으로부터 목숨을 구해보고자 했던 곳인 물 위에 떠다니고 있었다. 약 10만 명의 사람들(그 중 95,000명이 민간인)이 즉사하였다. 그 대부분이 민간인인 또 다른 10만 명이 방사능 효과로 서서히 오랜 시간에 걸쳐 죽어갔다.(p.240~1)



과연 인종주의적 심성이 사라졌으리라 생각하는가? 곧 무인 폭격기가 등장하여 그나마 폭탄을 떨어트릴 때 일말의 도덕적 양심마저 제거하여 더욱 쾌적하고 스마트한 전쟁을 수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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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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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태즈메이니아族을 아는가?

 

 

태즈메이니아족은 絶滅된 인종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 종종 절멸된 인종 모두의 상징으로 거론되곤 하였다. 태즈메이니아는 아일랜드 크기만한 섬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남동부에 위치해 있다. 최초의 식민주의자들 - 죄수 24명, 병사 8명, 6명의 여성을 포함한 자원자 12명 - 은 1803년에 도착했다. 이듬해 최초의 원주민 대학살이 발생했다. '산적들', 즉  도주한 죄수들은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캥거루와 원주민들을 죽였다. 그들은 원주민 여자들을 데리고 갔다. 시신들은 개한테 던져주거나 산채로 불에 구웠다. 캐러츠라는 사람은 태즈메이니아인을 살해한 일로 유명해졌다. 그는 태즈메이니아인을 살해한 다음 그 부인에게 남편의 머리를 목에 걸고 다니도록 윽박질렀다. 원주민들은 인간으로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야수들'이거나 난폭한 짐승들이었다(p.187)

 

 

위 인용문은 Sven Lindqvist라는 스웨덴의 진보적 저널리스트가 1996년에 저술한 <Exterminate All the Brutes>라는 책의 우리말 번역본인 <야만의 역사, 2003>에서 발췌했다. 내가 이 책을 읽었던 때는 경기도 이천에 있는 현대 Hynix 반도체 내에서 청강문화산업대학에 적을 두고 있던 직원들을 대상으로 독해와 영작문을 가르치던 2004년 초였다. 당시 점심을 먹고 다음 수업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어서 한 번 Hynix 영내를 돌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직원용 복지관에 딸려 있던 서점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발견하고는 그야말로 경악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니까 당시 아직은 Genocide나 Holocaust 등의, 이른바 대량학살에 관한 체계적 독서가 부족했던 때, 이 책은 첫 페이지를 펼치고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분노하지 않고 넘어가지 못했을 정도로 너무도 광기어린 학살의 모습에 전율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책을 읽고 난 이후에 나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이라크의 쿠르드족 학살, 일본의 난징대학살, 남한의 제주 4.3 학살 등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게 되었고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같은 인간에 의한 광기의 희생자들의 고통과 두려움, 절망에 공감하면서 그들과 연대의식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원주민' 또는 학살자들 표현대로 하면 '야수'들의 죽음이 곧 내 피붙이의 죽음이고, 내 민족의 멸족이며 그로 인한 정신심리적 외상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치유될 수 없는 큰 상처로 남게 된다는 것도 내 몸의 아픔으로 실감했다. 이 책에 기록된 학살은 물론 백인들에 의한 것이고, 학살의 대상은 백인들이 야수라 불렀던 아프리카인들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그리고 북미 원주 인디언들과 남미의 인디오들이었다. 그런데 백인들은 무슨 근거로 이들을 야수라 불렀고 자의적으로 지상에서 절멸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바로 생물학. 정확히 말하면 사이비 과학의 일종인 骨相學과 Charles Darwin의 <진화론>에서 이른바 자연선택과 생존경쟁 이론, 특히 適者生存을 과대해석한 Social Darwinism으로 왜곡한 인간의 우열 나누기가 바로 그것이다. 과학적 근거(백인들이 생각하기에는 합리적이었을)를 등에 업고 유럽을 제외한 거의 모든 대륙에서 행해졌던 대량학살의 광풍은, 소위 학살의 심성과 결합하여 수많은 목숨들을 강제로 박탈했다. 이것은 지구상에 백인들만 살 가치가 있는 인종이라는 뜻인가?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아무리 사이비 과학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해도, 원주민들을 절멸해서라도 빼앗고 싶었던 그 어떤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점점 불어나는 우수 인종(?) 백인들의 생존공간을 확보하고자 하는 절박한 요구때문이었을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본래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제거할 생각을 했던 것은 과연 합리적인 선택이었을까? 유럽인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유럽사에서 예외적인 하나의 사건이라고 말하면서 도덕적 책임감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사실은 유럽인의 정신 속 어딘가에 학살에 대한 심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유대인 대학살은 이미 오래전부터 행해져 온 학살의 연장선 위에서 현대에 '재현'된 최종 형태는 아닐까? 만약 일본인들이 韓민족 전체의 말살을 목표로 실행에 옮겼다면? 현재 북미에 남아 있는 인디언의 숫자는 95%가 절멸되고 난 뒤의 한 줌에 불과한 비극의 증인이라면? 과연 흑인은 야수인가? 그러면 백인은 문명인인가? 문명의 어떤 면이 대량학살을 합리화해주는가? 사실은 백인이 야수는 아닌가? 자신 속의 야수성은 교묘히 감추고 타자를 야수화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이 문명과 종교를 자랑하는 백인의 참 모습인가? 경계해야 할것은 정작 인간 심성 속의 절대 惡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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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
다케나카 치하루 지음, 노재명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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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왜 세계는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를 알라딘 종로에서 보았을 때, 책의 제명보다 표지 사진이 먼저 가슴을 후벼 파는 경험을 했다. 눈물을 흘리며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흑인 소년의 얼굴. 어쩌면 내전 지역의 소년병으로써 같은 또래의 敵을 사살하고 난 뒤의 참회의 눈물일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눈 앞에서 학살당하는 가족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회한의 눈물일수도 있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전쟁을 벌여 막대한 이득을 챙기고 국가를 파산 상태로 몰아간 소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 또는 무기와 돈을 지원하여 지역에서의 패권을 노리는 서구 강대국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눈물일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보는 사람의 세계 인식 여하에 따라 달라질수밖에 없겠지만, 사진 한 장이 전달하는 이토록 많은 상념이라니... 이 책 <세계는 왜 전쟁을 멈추지 않는가?>는 일본의 정치학자인 다케나카 치하루(竹中千春)가 쓴 책으로, 한국어 번역 문체로 미루어 보건데 일본의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저작인 듯싶다. 하지만, 전후 과도한 평화에 빠져 자국 이외에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일본과 그 일본에서 살아가는 중고등학생들의 세계 인식에 커다란 도움을 줄만한 책임에 틀림없다. 전쟁과 평화, 폭력과 테러리즘 등, 현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 개념에 대한 사고 자체를 등한시 하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우선 세계를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와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로 나누어 대개 전쟁이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서 일어나며 그 전쟁을 지원하여 대리전을 치루도록 획책하는 서구 선진국의 이기적인 발상에 일침을 가하는 저자의 펜 끝이 날카롭다. 특히 전쟁을 기획하는 폭력집단들 중에서 군대나 경찰, 반정부무장조직, 또는 국제테러조직 등에 대한 개별적 설명 뒤에 이어지는 폭력의 여섯가지 요소에 대한 필자의 논의는 전쟁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그 여섯가지 요소는 신념, 사람, 무기, 자금, 정보, 네트워크로 요약되는데, 특히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서는 이러한 폭력의 요소들이 너무도 쉽게 제 기능(?)을 발휘하여 국지전 또는 내전을 유발하는 근본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나는 특히 이 책의 제 3장 <분쟁의 최전선을 가다>를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본질에 대한 역사 정치적 접근,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의 미국의 중동 지배에 대한 더러운 야심,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얽힌 미국과 소련의 이념 대립과 미국의 배신 등, 기존에 알고 있었던 사실들을 재확인하며 새삼 국제정치의 비열함에서 인간성의 끝을 보았다. 결국 전쟁은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끝내 그들의 목숨을 빼앗고 삶의 근거지를 철저히 파괴하는 극한의 폭력일 뿐이다. 이러한 전쟁의 본질은 결국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이기적 발상에 의해 더욱 방치되고 있다는 것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 책 뒤 표지의 글을 옮겨 보겠다. "...현재 전 세계 난민과 이재민 약 3900만 명! 무력분쟁 사망자의 90% 이상이 일반시민. 그 중 80% 이상이 전쟁과 아무런 상관없는 여성과 어린이! 전 세계적으로 매설된 소형지뢰의 수 2억개 이상! 매달 800명의 어린이가 지회를 밟고 죽거나 발목 등 신체 일부가 절단되고 있으며, 시에라리온의 경우 반군의 80%가 10세 미만 소년병! 2002~2006년에만 전 세계 어린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42개 국가 약 15억 명의 아이들이 폭력적이고 강도 높은 분쟁 상황에 휘말림!" 어떤가? 만약 현재 고등학교 2학년생인 내 아들이 총을 쥐고 또래 적들을 죽이며 살육과 폭력에 노출된 상황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도대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까? 만약 느닷없이 터지는 지뢰에 목숨을 잃거나 신체불구자가 된다면? 과연 한국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인가? 한국은 얼마나 국제적 분쟁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이해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한국의 국제 분쟁 보도는 얼마나 객관적인가? 혹시 서구 강대국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어차피 우리와는 별 관계없는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까 신경 쓸 것 없이 내 일신만 편하면 된다고 치부하며 소시민의 안락함을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 쓰고 있는가? 도대체 폭력의 연쇄고리를 끊을 해결책은 있는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제 5장에서 몇가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단시간에 효과를 보기엔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분쟁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무기와 전투원을 어떻게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인지?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서구 선진국과 러시아, 중국, 최근엔 한국까지, 전 세계 무기 수출의 흐름이 바로 선진국과 후진국의 갈림길 아닌가? 무기 산업과 국제 분쟁의 조장, 이 두 가지는 세계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가 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해결책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필자의 주장처럼 간디의 비폭력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비폭력 정신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인류애로 확대할 수 있는 정신적 각성을 주고, '위험하고 가난한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폭력에만 의존하려는 황폐해진 정신의 늪에서 빠져나와 진정한 평화로 나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강화하는 데 절대 필요하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과 계몽을 통해 장기적으로 접근한다면 언젠가는 지구상에서 전쟁이나 폭력은 사라지고 돈독한 인류애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글 자체가 어렵지 않고 차근 차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는 점이 미덕인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세계관 내지 세계 인식의 폭을 넓히고 수정하여 진정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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