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든버러
알렉산더 지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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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 피(아피아스)는 열두 살 때 성가대에 들어간다. 맑은 목소리를 가진 소년들을 통솔하는 사람은 큰 에릭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그곳에서 피는 또래의 피터, 잭을 만나 가까워진다.

 

성가대 여름 캠핑 첫날, 파트별 반장들과 큰 에릭이 먼저 캠핑을 시작하면서 텐트를 치고 벌거벗은 채로 연못에서 수영을 한다. 남자들끼리라 어색하진 않았지만, 큰 에릭이 알몸으로 수영하는 그들을 카메라로 찍고 밤에 텐트에서도 다 같이 알몸으로 자는 건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후 성가대 소년들 모두가 모여 캠핑을 하게 되면서 피는 불쾌한 감정을 느낀다. 건물 두 군데에 소년들을 나눠 묵게 한 큰 에릭은 밤마다 1호 숙소 아이들과 벌거벗은 채로 뭔가를 하는 것 같다. 2호 숙소의 반장이 된 피는 1호 숙소에 피터가 있다는 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

 

그 캠핑 이후 피터는 몇 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났고, 피와 비밀스러운 관계였던 잭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피터를 사랑했던 피 또한 언제부턴가 자살 시도를 하게 된다.

 

 

 

어쩌면 피는 피터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랬기 때문에 캠핑을 갔을 때 신경이 온통 그쪽에만 쏠려 있었다. 무슨 일을 당했을지 알진 못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는 피였기에 상처 입은 피터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저 친구 사이인 잭과 남몰래 관계를 이어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피터에게 있다는 건 굉장히 잔인한 행동이었다. 피에게는 가벼운 관계였을지 몰라도 잭에게는 다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큰 에릭의 범죄는 의외로 빨리 밝혀져 바로 처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상처받은 소년들은 시간이 흘러도 그때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 피터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었는지 자살 시도를 몇 번이나 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를 사랑하는 피에겐 또 다른 상처가 되어 성인이 된 후에도 가슴에 남아 잊혀지지 않았다. 더불어 피의 말에 충격을 받은 잭 역시 둘만의 비밀 장소에서 자살을 하게 된 게 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애정을 가진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피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흔이었다.

 

피의 성장을 보면서 다른 소설이 떠오르곤 했다. 몇 달 전에 읽었던 소설과 비슷하게 어릴 때의 경험으로 성인이 된 후에도 죽고 싶어 하는 남자의 일생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시점이 피에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서 소설은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어떤 소년이 학교에 수영 코치로 새로 온 피에게 반하게 되면서 소설이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소년의 정체가 가벼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거기다 소년과 관련된 어떤 인물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없게 만들었다.

피는 그 소년이 오랫동안 사랑했던 피터와 닮은 존재였기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고, 소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피에게 빠져들어 남자를 사랑하는 게 아닌 그를 깊이 사랑하게 된다. 이들의 관계는 부정해야만 하는 애정으로 엮인 게 아니라는 것은 어떤 인물의 비밀을 소년이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소년의 손에 당한 이의 입장에서는 잔인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행동에 대한 처벌로는 너무나 가벼운 것이었다. 진작에 그랬어야 마땅한데 너무 늦었고 당한 사람들에 비해 큰 고통 없이 평온한 죽음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 죽음이 남달랐던 건 피터를 닮은 소년이 피터가 현혹됐었던 불로 끝낸 것이라는 점이다. 소년은 몰랐겠지만 그 사실을 아는 피에게는 그 사건이 마침내 과거를 떨쳐낼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소설의 특징은 한국계 미국인이 쓴 성장형 퀴어 소설이라는 점이다. 시작부터 위안부로 끌려간 할아버지의 누이들에 대한 언급과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사람으로 변신한 붉은 여우에 관한 부분이 등장했다. "레이디 타마모"라는 붉은 여우가 제 몸을 불태운 것이 후손인 피와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피가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향 섬에 갔을 때 무당에게 굿을 받는 장면도 독특해서 기억에 남는다.

 

지울 수 없는 끔찍한 기억에 대해 말하지만 불편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었다. 절제된 문장으로 내면의 상처를 표현한 부분이 여운으로 느껴졌다.

피터에게는 카네이션 향기가 나고, 아주 희미하게 담배연기 냄새도 난다. 누군가 바에 두고 간 코르사주처럼. 널 사랑하고 있어. 그때 나는 생각한다. 그래 맞아, 널 사랑하고 있어. - P24

누군가 내 인생에 들어와 그날 밤 내 피부에 들러붙은 모든 신경을 끊어내 주었더라면 내 인생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감각이 없다면, 그럼 얼마나 좋을까. - P179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싶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고, 그들 하나하나를 찾고 싶다. 한 명 한 명에게 그의 몸을 떼어주고 싶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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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의 문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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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지자가 남동생 우체를 때려죽인 걸 본 나쑨은 아빠를 따라 떠난다. 우체와 나쑨 모두 오로진이었지만 나쑨이 자신을 많이 닮았기 때문에 지자는 차마 이 아이를 죽일 수 없었다. 지자는 오로진을 고쳐 멀쩡하게 만들어주는 곳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면서 무작정 길을 떠나지만, 계절이 도래한 때에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찾아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그러다 마침내 찾아낸 목적지에서 나쑨과 지자는 샤파를 만난다. 샤파는 나쑨을 보자마자 오로진이라는 걸 알고 자신의 공동체 "찾은달"로 가자고 말했다. 제키티라는 도시에 정착해 지자는 돌쇄공인으로 살게 되고, 나쑨은 샤파를 따라 오로진 아이들과 함께 조산술 훈련을 한다.

 

통키, 스톤이터 호아와 함께 지하 카스트리마 향에 도착한 에쑨은 몸이 점점 돌로 변해가는 알라배스터를 만난다. 끝이 왔음을 직감한 듯 알라배스터는 에쑨에게 오벨리스크를 다루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말하지만, 에쑨은 그가 에둘러 말하는 가르침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에쑨은 여자 오로진 이카가 향장으로 있는 카스트리마에서 어린 오로진들을 교육하며 그곳에 정착한다. 그러다 얼마 후에 구 산제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레나니스가 카스트리마에 있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곳을 공격받으면 모든 사람들이 무향민이 되어 계절 속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들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 레나니스에 간 에쑨은 오로진의 조산술을 막을 수 있는 수호자의 공격을 받는다.

 

 

 

"부서진 대지 3부작"의 1편 <다섯 번째 계절>에서는 수호자 샤파의 손에 이끌려 펄크럼으로 간 어린 오로진 다마야, 조언자 알라배스터와 함께 하는 시엔, 그리고 오로진 아들, 딸을 남편에게 잃은 에쑨이 등장했었다. 그들이 동일 인물이라는 게 밝혀지기도 전에 눈치챘어도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었다.

3부작의 2편 <오벨리스크의 문>에서는 에쑨과 딸 나쑨의 시점을 오가면서 보여줬다.

 

남편 지자와 딸 나쑨을 찾으려던 에쑨은 카스트리마에서 알라배스터를 만나면서 오로진과 수호자 관계의 비밀, 그리고 몰랐던 달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그것에 오벨리스크 역시 깊은 관련이 있었는데, 모든 오로진이 오벨리스크를 다룰 수 있는 게 아닌, 알라배스터나 에쑨처럼 강한 조산력을 가진 오로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라배스터의 지시로 지상으로 올라가 토파즈 오벨리스크와 접속하려고 하지만, 토파즈보다 먼저 오닉스가 그녀의 부름을 받았다. 그 모습을 보며 에쑨이 주인공이라 그런지 이 세계관의 최강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후반에 레나니스를 상대하면서 수많은 오벨리스크와 접속하는 에쑨은 알라배스터를 능가할 정도가 아닌가 싶었다.

 

한편, 나쑨은 엄마 에쑨보다 아빠 지자를 훨씬 더 좋아했다. 에쑨은 오로진의 능력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일으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만큼이나 조산술이 강한 아이를 어쩔 수 없이 무섭고 엄격하게 가르쳐야만 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였던 나쑨은 혼내기만 하는 엄마보다 혼내지 않고 다정한 아빠가 훨씬 더 좋았다. 실은 그 누구보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다정한 아빠가 실은 오로진을 혐오하는 차별주의자라는 것 역시 나쑨은 몰랐다.

오로진인 나쑨이 병에 걸린 것으로 치부해 고치려고만 하는 아빠와 여행을 하다가 다정한 수호자 샤파를 만난 이후 이상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진 그를 아버지 대체(代替)로 삼게 된다. 나쑨이 펄크럼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호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해서 그에게 애정을 준 것이라 안타까웠다. 거기다 샤파는 머릿속에 사악한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가까워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나쑨은 이미 그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고 있었다.

 

가상의 세계를 바탕으로 한 SF 소설이지만 현시대에서도 통하는 소재를 담고 있었다. 오로진을 같은 사람으로 대접해 주지 않고 차별하고 무시하며 심지어는 계절이라는 재난 시기가 오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마음껏 이용해 먹다가 버리는 짓을 관습이라 여겼다. 인종 차별 외에 눈에 띄었던 부분은 여자 오로진 이카가 향장으로 사람들을 통솔한다는 점과 동성 간의 사랑 역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작가가 온갖 차별에 편견 없이 대하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소설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위기를 맞이하고 에쑨과 가까운 호아와 알라배스터 역시 변화했다. 이카 덕분에 에쑨이 각성하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나쑨은 먼 곳에서 어머니 에쑨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3부작의 마지막 시리즈는 아무래도 에쑨과 나쑨의 모녀 대결일 것 같은데, 에쑨에게는 그녀를 지키는 호아가 있어서 다행이지만 샤파가 나쑨의 곁에 있어서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다. 오벨리스크도 당연히 더 큰 뭔가를 보여줄 테고.

소설이 어떻게 될지 가늠이 안 된다. 세계관이 엄청나기 때문에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그저 감탄하며 읽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에쑨, 달은 원래 이 세상에 존재했던 거다. 하늘 저 높은 곳에, 별들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지. 달이 사라졌기 때문에 계절이 시작된 거야." - P147

지금도 그럴 수 있다면 정말로 좋을 텐데. 진짜 미래와 진짜 공동체, 진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너는 둔치들의 선한 본성을 믿은 대가로 이미 자식 셋을 잃었다. - P407

바로 그 순간, 나쑨의 안에 있던 뭔가가 왜곡되고 삐뚤어진다. 지금 이 순간 이후 아버지를 향한 나쑨의 모든 애정 어린 행동은 신중하게 계산되고 연기된 것이다. 그러한 의도와 목적에 따라, 나쑨의 어린 시절이 여기서 죽는다. - P121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항상 이 점을 명심해라, 시엔. 어떤 것들에는 끔찍한 대가가 따른단다. 물론 가끔은 그럴 가치가 충분하지만 말이야."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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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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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동네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헨(헨리에타)과 로이드 부부는 동네 주민들을 위한 파티에 참석한다.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았던 헨은 로이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티에 가게 되는데,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줄인 이름에 대해 여러 번 말하고 대부분 아이가 있는 부부들 사이에 있다 보니 역시 괜히 왔다는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다 자신들처럼 아이가 없는 매슈와 미라 부부를 만난다. 알고 보니 바로 옆집에 살던 그들은 아이가 없다는 공통점으로 얼마간 대화를 나누게 되고, 미라가 헨에게 왠지 모를 호감을 느껴 식사 초대도 하게 된다. 미라 부부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집 구경을 하던 헨은 매슈의 서재에서 그가 수집해 진열해둔 여러 물건들을 보다가 기절할 듯한 충격을 받는다. 정확히는 펜싱 트로피를 보고 놀란 것이었다.

 

헨 부부가 이곳에 이사를 오기 전에 살던 동네에서 더스틴 밀러라는 남자가 자신의 집에서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에 조증으로 약을 먹던 헨은 그 사건에 집착해 자세하게 찾아봤던 기억이 있다. 더스틴은 의자에 묶여 머리에 강력 접착테이프로 고정된 비닐봉투를 쓴 채 질식사했고, 지갑과 노트북, 그리고 펜싱 트로피가 사라졌다. 유소년 체전 펜싱 대회에서 받은 그 트로피는 더스틴이 고등학교 때 받은 것이었는데, 사립학교 교사인 매슈가 일하고 있는 바로 그 학교였다. 헨은 그때부터 매슈가 범인이라고 의심하며 예의주시하게 된다.

 

 

 

소설은 옆집 남자를 살인자라 확신하는 헨과 그녀가 자신의 살인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매슈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됐다. 시작부터 매슈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에 후반에 다른 반전이 있을 거라는 예상을 했다.

 

헨이 펜싱 트로피를 눈여겨봤다는 걸 눈치챈 매슈는 곧바로 핑계를 대며 그 물건을 치웠고, 헨은 잘못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옆집을 방문해 자기 집 인테리어에 참고하고 싶다는 거짓말로 미라의 안내를 받다가 트로피가 사라진 걸 보고 확신을 한다. 그때부터 헨은 매슈를 미행하는데 읽는 내내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르겠다. 매슈가 살인자라 혹시라도 헨에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슈는 여자를 절대 해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비롯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창녀 취급을 하며 온갖 학대와 폭력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접시를 바닥에 두고 어머니에게 개처럼 무릎 꿇고 밥을 먹으라고 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했던 어머니를 가여워했기에 매슈는 여자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매슈는 펜싱 대회에 나갔을 때 같은 학교 여학생을 강간한 더스틴을 죽인 것이었고, 현재 같은 학교 교사인 미셸의 남자친구 스콧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고선 그 역시 때려죽였다.

이렇게만 보면 매슈가 나쁜 놈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살인은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범죄이지만, 강간을 하고도 법적으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잘 살아가는 짐승 같은 인간들을 처단하는 게 과연 나쁘다고만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매슈가 강간범을 살해함으로써 훗날 발생할지도 모를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논리에 나도 모르게 설득됐다.

 

헨은 어느 정도 자란 후부터 음산한 책이나 죽음에 관련된 것들에 관심이 생겼다. 어둡고 징그러운 그림으로 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현재는 그 경험으로 기괴한 분위기의 동화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 1학년 때 죽음에 대한 집착이 조증과 겹쳐 다른 학생과 문제가 생기고 만다. 그 학생의 기숙사를 습격하는 바람에 헨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양극성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현재도 헨은 약을 먹고 있었다.

이런 문제가 괜히 언급되는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슈가 범인이긴 하지만 헨이 정서적으로 완벽하게 맑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착각이거나 잘못 봤거나 하는 등의 반전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쫓고 쫓기는 헨과 매슈 외에 다른 가족들도 종종 언급됐다.

같은 집에서 똑같은 광경을 보고 자랐을 매슈의 동생 리처드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었다. 여자를 성적으로만 보고 지배하려는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기에 매슈는 동생을 멀리했지만, 끔찍해도 어쩔 수 없는 형제라 출장이 잦은 미라가 집을 비울 때 가끔 리처드를 불러 만나곤 했다. 미라가 리처드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처드가 이웃에 사는 헨에게 관심을 보이고, 스콧 사건으로 알게 된 미셸에게까지 관심이 이어지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미라의 시점도 종종 등장했는데, 스콧 사건으로 매슈가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그녀는 과거를 회상했다. 예전 남자친구 사건으로 매슈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내내 가지고 있었지만 미라는 그런 생각을 한쪽으로 치워두었다. 하지만 스콧 사건으로 다시금 그 문제가 떠올라 자신의 남편을 옹호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속으로 갈등하게 된다.

 

스릴러 소설을 읽으면 결말이나 반전을 그려보게 되는데 나는 대부분 맞히지 못했다. 범인을 맞힌 적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젬병이지만, 그래도 이런 소설을 읽을 때 매번 생각해보긴 한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반전을 그려봤다. 하나는 헨의 남편 로이드가 의심스럽다는 점이었는데 당연히 이건 틀렸고, 다른 하나는 정확하게 맞혔다. 아무래도 소설 속 반전이 다른 여러 스릴러 소설에서 차용된 것이라 쉽게 예상했던 것 같다. 초반에 낌새가 있었고 중반엔 확실한 단서도 있어서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반전을 눈치채긴 했어도 소설은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페이지가 술술 잘 넘어가서 뚝딱 읽어버렸을 만큼 재미있었고,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을 덮을 수 없기도 했다. 역시나 재미있는 피터 스완슨의 스릴러 소설이었다.

by. 매슈
"그들은 세상에 불행을 퍼뜨렸을 겁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그런 자들을 세상에서 삭제하는 건 곧 세상에 행복을 더하는 겁니다." - P262

by. 헨
"난 당신을 이해 못 하겠어요. 미안하지만 전혀요. 난 당신이 잘못된 도덕관을 가졌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살인이 하고 싶어서 그 잘못된 도덕관을 계속 자기 자신에게 주입하는 거예요. 당신은 살인을 좋아해요. 그건 분명하다고요."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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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수학이 필요한 순간 - 질문은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가
김민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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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나에게 수학은 필요 없는 과목이었다. 중학교 이후 학년이 점점 올라가면서 수학 성적은 낮아지기 시작했고, 그렇기 때문에 시험을 보면 평균을 과하게 깎아먹는 과목이라 너무 싫었다. 다른 과목은 공부를 하면 이해가 되고 시험 성적도 잘 나오는데 수학만은 절대 그렇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문과에 갔지만 문과 수학도 너무나 어려워서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문과인데 왜 이렇게 어려운 수학을 배워야 하나 욕을 하면서, 그럼 이과 아이들은 대체 뭘 배우는 건가 의아해하면서 시험 기간에는 다른 과목 공부를 더 열심히 했었다. 해도 점수가 안 나오는 수학에 매달리기보다 다른 과목 성적을 높게 받아 수학에서 못 받은 점수를 만회하려는 심산이었다.

이렇다 보니 수학은 풀기보다는 찍는 게 훨씬 더 익숙했다. 시험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돌아서 100 몇 번째 숫자 구하기 같은 문제를 일일이 다 대입해볼 정도였고, 도형 관련 문제는 그림을 그려서 풀었던 기억이 난다. 찍기를 워낙 많이 했던 터라 어떤 때는 주관식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찍어서 맞추는 경지에 이르렀다. 덕분에 그 시험은 다시없었던 최고 등수를 받았다.

 

전형적인 수포자였기 때문에 집합, 방정식까지는 배워서 문제를 풀었었고, 함수나 싸인, 코사인, 탄젠트 등의 용어는 기억나지만 그게 뭔지는 모른다. 성인이 된 후에는 사칙연산 이상의 숫자놀이는 접할 일이 전혀 없었다.

수학과 나의 거리는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멀고 멀지만,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라 이 책을 읽게 됐다. 수학적인 사고에 대해 이야기할 것 같아서 내게 딱 필요한 부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본격적인 책 내용에 앞서 어려워 보이지만 간단하게 설명하는 부분이 먼저 등장했다. 아무렇게나 그린 사각형의 변의 중심점을 이은 선은 평행사변형인데 꼭짓점을 옮겨도 가운데 도형은 평행사변형이 나온다는 "바리뇽의 정리"를 보며 신기하다고 탄식했다. 이렇게 쉽게 설명만 해줘도 잘 이해가 되어 좋을 것 같았다.

 

수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분야에도 수학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의외였던 건 피타고라스가 음악 화음의 구조를 수로 설명했다는 것이었다. 주파수, 파장의 길이 비율과 화음의 연관성을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2장에서 녹음 기술과 초음파 검사기, 보청기 기술도 소리를 정보로 처리한다는 걸 알려줬다. 주파수는 일종의 함수이고, 빠르게 진행되는 함숫값으로 인해 주파수를 음높이로 감지하게 된다는 게 신기했다. 함수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함수의 개수로 차원이라는 게 결정된다고 했는데, 위도와 경도가 지구 표면상의 함수라는 것도 알게 됐다.

 

수학적 사고로 증명하는 방법은 비슷하게 해본 적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삼단논법이나 대우법, 이중부정법 등을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줬다. 그 예시를 추상적 기호로 표현한 논리학은 왠지 재미있기까지 했다.

 

 

 

 

2장에서는 내 기준에 훨씬 어려운 수학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4차원 공간에 대한 수학적 개념을 비롯해 우주 모양 자체를 말하는 아인슈타인 방정식, 시간의 선형성 등을 이야기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공식이 많아져 이해도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해 무슨 말인지 당최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무엇에 대해 설명하는지는 알겠으나 그것에 대한 수학적 개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보통 책을 읽을 때 이해가 잘되지 않으면 이해가 될 때까지 읽는 편인데,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되질 않아 나중엔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아무래도 내가 수학을 워낙 멀리해서 그런가 수학적인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수학에 대한 기본 개념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었다.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에 대해 말할 줄 알았는데 수포자의 시선에는 더 어려운 수학에 대해 말하는 책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학교 다닐 때 내가 왜 수학을 싫어했는지 다시금 떠올랐다. 문학 외에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보기 위해 처음으로 접한 수학에 관한 책인데 내게는 너무 어렵기만 했다.

읽으면서 깨달은 건 세상에는 수학과 관련된 것들이 너무나도 많지만, 그건 잘하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다. 수학과 거리가 먼 나는 좋아하는 문학이나 다른 관심 분야를 더 알아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을 잘하고 좋아하는, 그리고 어느 정도 이상의 수학적 개념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읽으면 좋을 책이었다.

 

 

 

* 이 리뷰는 인플루엔셜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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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것들
필립 지앙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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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시스의 딸 알리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프랑시스는 왠지 딸이 비행기를 타지 않았을 거라 예감했기에 차분했지만, 사위 로제는 사라진 아내 걱정에 불안해했다. 정신없는 사위 탓에 프랑시스는 알리스의 쌍둥이 딸들을 얼마 동안 맡기로 했는데, 돌보는 건 대체로 재혼한 아내인 쥐디트가 맡았다.

알리스의 직업이 배우였기 때문에 사건이 외부에 알려질까 걱정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알리스가 나타나지 않고 연락도 받지 않아서 경찰에 신고를 한다. 그리고 동료 배우들에게 알리스를 보지 못했는지 수소문을 했고, 프랑시스는 사설탐정 안 마르그리트를 고용했다.

 

알리스의 실종으로 프랑시스는 여러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휴가를 가던 길에 차에 남아 있다가 눈앞에서 불에 타 죽은 아내와 큰딸, 그 이후 알리스와의 관계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 쥐디트와 재혼했을 때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해 그녀를 화나게 했지만, 의외로 프랑시스의 딸 알리스와 쌍둥이 손녀들과는 잘 지냈다. 그리고 안 마르그리트의 아들 제레미는 강도 미수로 교도소에 갔다가 막 출소했는데, 일적으로 유능한 그녀는 아들 문제에는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소설은 프랑시스와 쥐디트, 알리스와 로제처럼 부부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기도 했는데 대체로는 부모 자식 간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아내와 딸을 잃은 뒤 둘만 남았던 프랑시스와 알리스는 돈독한 사이가 되어야 마땅했지만 그 이면에는 비밀이 있었다. 나름 이름이 알려진 작가인 프랑시스가 출판사 여사장과 하룻밤을 보낸 사건으로 아내와 싸우고선 휴가를 갔다가 사망했다. 프랑시스는 아내의 화가 곧 풀려 용서하겠거니 생각했는데 결국 그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는 용서받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알리스는 마약을 시작하고, 역시나 마약에 빠진 당시 남자친구 로제를 집에 끌어들여 함께 살게 된다. 프랑시스에겐 죄책감이었을 테지만 알리스에겐 배신이었다. 엄마를 두고 다른 여자와 잔 아빠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엄마와 언니를 한꺼번에 잃었으니 마음에 쌓인 감정을 분노로 표출하고도 남았다.

안 마르그리트와 제레미의 사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레미의 16살 생일 며칠 뒤에 아버지가 그의 품에서 사망하면서 그는 삐뚤어졌고, 급기야는 강도짓을 하는 바람에 교도소에까지 갔다. 출소한 뒤에는 안 마르그리트의 부탁으로 아버지뻘인 프랑시스가 그를 살피지만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았다. 제레미와 안 마르그리트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았다. 남편과 아버지라는 사람을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라는 게 이렇게도 어려운 것이었다.

 

부부 사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랑시스는 과거에 바람을 피워놓고선 현재 부인인 쥐디트가 외도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제레미에게 미행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미행에 완전히 집착해 제레미가 그런 일은 못 한다고 해도 협박, 부탁, 애원을 하면서 해달라고 했고, 소설 집필에 도무지 집중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찾아낸 알리스도 제 아빠와 똑같았다. 과거에 그토록 아빠를 몰아세웠으면서 그녀는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아빠보다 더 심한 짓을 저질렀다.

 

이런 관계들의 후반에 다시금 놀라게 만든 또 하나의 관계까지 일어나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한 사람들은 가족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는 걸 보여줬다. 고집쟁이 프랑시스나 바쁘다고 집에도 잘 안 들어오는 쥐디트, 거짓말로 모두를 속인 알리스도 그랬다. 병에 걸린 안 마르그리트가 죽는 날까지 제레미 걱정을 했어도 아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머니가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었다.

제레미는 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이고 후반에 프랑시스를 배신한 사건도 있고 해서 끝까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다고 화자인 프랑시스도 별반 다르지 않았고, 알리스, 쥐디트 모두 다 캐릭터가 별로였다. 그나마 안 마르그리트만 가여웠다.

 

나쁜 순간들은 모두에게나 있었다.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혹은 맞아서 아픈 사람들, 물리적인 아픔 외에 외도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은 것들 모두 나쁜 순간이었다. 그 아픔들은 얼마간 지속되겠지만 기나긴 인생과 비교해보면 누구에겐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상처 내놓고 평생 아파하는 프랑시스 같은 사람도 있을 테고.

 

소설은 3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짧은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짧은 소설을 무려 사흘 동안 읽었다. 보통 몇 시간이면 다 읽을 법한 분량인데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은 소설이 과거와 현재를 두서없이 오가서 굉장히 산만했고, 생략된 부분이 너무나도 많아 읽다가 빠뜨렸나 싶어 앞장을 몇 번 뒤적거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알리스를 찾아내 발견하고 깜짝 놀란 프랑시스의 모습으로 단락이 끝나고선 이후 그 놀람에 대한 언급은 하지도 않아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쥐디트가 후반에 총을 맞아 회복 중이라고 했는데 총을 맞았던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건은 물론 이외에도 많은 생략을 해서 자꾸만 집중력이 흐려졌다. 생략의 미학이 빛을 발할 때도 있지만 너무 과했던 터라 다소 아쉬웠던 소설이다.

때때로 인생이 우리를 조롱하고 있는 것 같은 이 느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 P67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인의 고통과 관련해서는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나는 결국 내가 그녀에게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서 받은 고통을 몇십 배로 되갚아주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걸 다 갚으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는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 P108.109

"프랑시스, 이건 분명히 잠시 스쳐 지나갈 나쁜 순간일 거예요."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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