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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의 문 ㅣ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평점 :
아빠 지자가 남동생 우체를 때려죽인 걸 본 나쑨은 아빠를 따라 떠난다. 우체와 나쑨 모두 오로진이었지만 나쑨이 자신을 많이 닮았기 때문에 지자는 차마 이 아이를 죽일 수 없었다. 지자는 오로진을 고쳐 멀쩡하게 만들어주는 곳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면서 무작정 길을 떠나지만, 계절이 도래한 때에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찾아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그러다 마침내 찾아낸 목적지에서 나쑨과 지자는 샤파를 만난다. 샤파는 나쑨을 보자마자 오로진이라는 걸 알고 자신의 공동체 "찾은달"로 가자고 말했다. 제키티라는 도시에 정착해 지자는 돌쇄공인으로 살게 되고, 나쑨은 샤파를 따라 오로진 아이들과 함께 조산술 훈련을 한다.
통키, 스톤이터 호아와 함께 지하 카스트리마 향에 도착한 에쑨은 몸이 점점 돌로 변해가는 알라배스터를 만난다. 끝이 왔음을 직감한 듯 알라배스터는 에쑨에게 오벨리스크를 다루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말하지만, 에쑨은 그가 에둘러 말하는 가르침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에쑨은 여자 오로진 이카가 향장으로 있는 카스트리마에서 어린 오로진들을 교육하며 그곳에 정착한다. 그러다 얼마 후에 구 산제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레나니스가 카스트리마에 있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곳을 공격받으면 모든 사람들이 무향민이 되어 계절 속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들의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 레나니스에 간 에쑨은 오로진의 조산술을 막을 수 있는 수호자의 공격을 받는다.
"부서진 대지 3부작"의 1편 <다섯 번째 계절>에서는 수호자 샤파의 손에 이끌려 펄크럼으로 간 어린 오로진 다마야, 조언자 알라배스터와 함께 하는 시엔, 그리고 오로진 아들, 딸을 남편에게 잃은 에쑨이 등장했었다. 그들이 동일 인물이라는 게 밝혀지기도 전에 눈치챘어도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었다.
3부작의 2편 <오벨리스크의 문>에서는 에쑨과 딸 나쑨의 시점을 오가면서 보여줬다.
남편 지자와 딸 나쑨을 찾으려던 에쑨은 카스트리마에서 알라배스터를 만나면서 오로진과 수호자 관계의 비밀, 그리고 몰랐던 달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 그것에 오벨리스크 역시 깊은 관련이 있었는데, 모든 오로진이 오벨리스크를 다룰 수 있는 게 아닌, 알라배스터나 에쑨처럼 강한 조산력을 가진 오로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알라배스터의 지시로 지상으로 올라가 토파즈 오벨리스크와 접속하려고 하지만, 토파즈보다 먼저 오닉스가 그녀의 부름을 받았다. 그 모습을 보며 에쑨이 주인공이라 그런지 이 세계관의 최강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후반에 레나니스를 상대하면서 수많은 오벨리스크와 접속하는 에쑨은 알라배스터를 능가할 정도가 아닌가 싶었다.
한편, 나쑨은 엄마 에쑨보다 아빠 지자를 훨씬 더 좋아했다. 에쑨은 오로진의 능력이 얼마나 무서운 일을 일으킬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만큼이나 조산술이 강한 아이를 어쩔 수 없이 무섭고 엄격하게 가르쳐야만 했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였던 나쑨은 혼내기만 하는 엄마보다 혼내지 않고 다정한 아빠가 훨씬 더 좋았다. 실은 그 누구보다 자식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라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다정한 아빠가 실은 오로진을 혐오하는 차별주의자라는 것 역시 나쑨은 몰랐다.
오로진인 나쑨이 병에 걸린 것으로 치부해 고치려고만 하는 아빠와 여행을 하다가 다정한 수호자 샤파를 만난 이후 이상적인 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진 그를 아버지 대체(代替)로 삼게 된다. 나쑨이 펄크럼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호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해서 그에게 애정을 준 것이라 안타까웠다. 거기다 샤파는 머릿속에 사악한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가까워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나쑨은 이미 그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고 있었다.
가상의 세계를 바탕으로 한 SF 소설이지만 현시대에서도 통하는 소재를 담고 있었다. 오로진을 같은 사람으로 대접해 주지 않고 차별하고 무시하며 심지어는 계절이라는 재난 시기가 오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마음껏 이용해 먹다가 버리는 짓을 관습이라 여겼다. 인종 차별 외에 눈에 띄었던 부분은 여자 오로진 이카가 향장으로 사람들을 통솔한다는 점과 동성 간의 사랑 역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작가가 온갖 차별에 편견 없이 대하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소설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위기를 맞이하고 에쑨과 가까운 호아와 알라배스터 역시 변화했다. 이카 덕분에 에쑨이 각성하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나쑨은 먼 곳에서 어머니 에쑨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3부작의 마지막 시리즈는 아무래도 에쑨과 나쑨의 모녀 대결일 것 같은데, 에쑨에게는 그녀를 지키는 호아가 있어서 다행이지만 샤파가 나쑨의 곁에 있어서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다. 오벨리스크도 당연히 더 큰 뭔가를 보여줄 테고.
소설이 어떻게 될지 가늠이 안 된다. 세계관이 엄청나기 때문에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그저 감탄하며 읽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에쑨, 달은 원래 이 세상에 존재했던 거다. 하늘 저 높은 곳에, 별들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지. 달이 사라졌기 때문에 계절이 시작된 거야." - P147
지금도 그럴 수 있다면 정말로 좋을 텐데. 진짜 미래와 진짜 공동체, 진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너는 둔치들의 선한 본성을 믿은 대가로 이미 자식 셋을 잃었다. - P407
바로 그 순간, 나쑨의 안에 있던 뭔가가 왜곡되고 삐뚤어진다. 지금 이 순간 이후 아버지를 향한 나쑨의 모든 애정 어린 행동은 신중하게 계산되고 연기된 것이다. 그러한 의도와 목적에 따라, 나쑨의 어린 시절이 여기서 죽는다. - P121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항상 이 점을 명심해라, 시엔. 어떤 것들에는 끔찍한 대가가 따른단다. 물론 가끔은 그럴 가치가 충분하지만 말이야."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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