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캉티뉴쓰 호텔
리보칭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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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일 새벽. 캉티뉴쓰 호텔 사장 바이웨이둬가 호텔 뒤 절벽 호숫가 산책로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심장에 총알이 박혔고, 손과 얼굴에는 경미한 찰과상이 있었다. 특이한 건 온몸이 물에 젖어 있었고 진흙투성이였다는 건데, 바이웨이둬가 총에 맞아 즉사한 게 아니라 호숫가에 빠졌다가 산책로로 기어 나와 과다출혈로 사망한 걸로 보였다.
호화로운 호텔이라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고 산책로 또한 그 경계 안에 있었는데, 놀랍게도 CCTV에는 범인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 CCTV에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 어디에서 총을 쏴서 죽였는지 살펴봐도 도무지 각도가 나오질 않았다.

경찰도 어쩌지 못하는 이 상황에 하필이면 그날 그 호텔에 머물던 여러 사람들이 추리를 시작한다. 조류학 교수이자 명탐정이라고도 불리는 푸얼타이, 전직 경찰 뤄밍싱, 변호사 거레이, 장물을 훔쳐 파는 걸로 유명했던 괴도 인텔 선생이었다.



피살된 바이웨이둬는 캉티뉴쓰 호텔뿐만 아니라 여러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원한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와 가까이 지냈던 이들은 바이웨이둬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호텔 직원들에게 친절한 사람이었고 아내 란니와도 다정한 사이였다. 이런 사람이 총에 맞아 죽었다니 놀랄 노자였다.
지방검사 왕쥔잉이 사건을 맡고 차이궈안 형사가 현장에 나타나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단서라고 할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명탐정이라 불리는 푸얼타이를 필두로 마침 그 호텔에 있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추리를 펼쳤다. 푸얼타이는 대학 시절부터 친구인 의사 화웨이즈와 샤위빙의 약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날부터 호텔에 머물렀다. 뤄밍싱은 경찰 시절 자신의 정보원이었던 매춘부 샤오쉐리의 죽음을 쫓다가 캉티뉴쓰 호텔에 다다랐다. 변호사 거레이는 오랜 친구인 란니가 남편 바이웨이둬의 바람을 의심하고 있어서 그를 미행하는 와중에 란니의 초대를 받아 연말, 연초를 보내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괴도 인텔 선생은 목적을 위해 자신의 진짜 정체를 숨기며 호텔 곳곳을 돌아다녔다.

소설은 프롤로그인 바이웨이둬 사건의 윤곽이 드러난 후, 푸얼타이의 시점부터 차례로 이어지며 사건을 진행시켰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사연들이 있었고, 개개인에게 엮인 캐릭터들과 호텔 직원들 등이 여기저기서 얼굴을 드러냈다. 각 캐릭터들의 시점이 끝날 때마다 범인을 지목했는데, 바통을 넘겨받은 다음 캐릭터의 이야기가 펼쳐지면 사건은 묘하게 꼬여 있었고, 범인 또한 한 명이 아닐 때가 있었다. 그런 부분이 조금 웃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반전이라고 할 만한 비밀들이 연이어 밝혀져 충격을 줬다. 등장한 여러 캐릭터들의 정체가 정말 놀라웠고, 그들의 관계 역시 당황스럽게 만들 때가 있었다.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그 충격이 더해져 계속 뒤통수를 맞았다.

아닌 것 같은 어설픈 추리들이 모여 나중에 하나로 합쳐졌을 때 그게 얼추 맞았다는 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등장인물이 꽤나 많은 편이고 정체나 관계 또한 비밀이었던 경우가 종종 있어서 조금 정신없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즐겁게 읽었다.

"정확히 추리해낸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하마터면 무고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울 뻔했네요."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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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싱 걸스
M.M. 쉬나르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시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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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경위로 승진한 형사 조 푸르니에는 호텔 룸에서 죽은 채 발견된 지닌 해먼드의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회사에서 연수차 이 지역으로 온 지닌은 마치 무언가를 하다가 멈춘 듯한 기묘한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지닌 해먼드의 방에는 그녀의 흔적 외에 다른 사람의 것은 없었다. 호텔 CCTV를 살펴본 결과, 중절모를 쓴 남자와 다정하게 들어왔다가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을 떠났다. 아쉽게도 중절모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몽타주를 뽑기 어려웠다. 피해자에겐 성폭행 흔적이 없었고, 사라진 물건 또한 없었다. 유일하게 결혼반지만 없어졌다.

조는 오랜 파트너였던 밥 아넷 형사와 새로 전근 온 크리스틴 로페즈와 사건을 수사한다. 그러다 지닌 해먼드와 똑같은 사건이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사실을 알고 연쇄 살인이라는 걸 직감하지만, 그 지역 경찰은 물론이고 FBI 또한 조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아넷, 로페즈와 단독으로 범인을 쫓기 시작한다.



소설은 범인이 지닌 해먼드와 함께 호텔 방에 들어가 살인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짧은 몇 페이지 안에서 알 수 있었던 건 범인이 단순히 성욕 때문에 여자를 살해하는 게 절대 아니었다는 것이고, 살인하는 행위 자체를 통해 어마어마한 희열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넥타이로 목을 졸라 살해하는 범인은 오로지 살인이 목적인 무서운 인간이었다.
여기에 피해자 여성의 결혼반지만 가지고 떠나는 걸로 봐서 이 인간쓰레기에게도 어떤 사연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쓰레기의 자기 합리화였겠지만 말이다.

조는 현장에서 더 이상 수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로 승진을 했지만, 지닌 해먼드의 사건에 직접 뛰어들었다. 먼저 피해자의 가족과 남편, 직장 동료, 친구들을 만나 탐문을 하며 범인과의 연결고리를 어떻게든 찾으려고 했다. 피해자의 남편은 넉넉한 생활에도 구두쇠 기질이 있긴 했지만 아내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았다. 피해자의 친구들 또한 지닌이 남편만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녀에게 특별히 원한을 가질 법한 사람이 없었고, 조용한 성격이라고 했다. 피해자가 범인과 어디서 어떻게 만나 알게 되어 호텔 방까지 함께 들어가게 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연수를 왔다가 술집 같은 데서 우연히 만났다고 하기엔 CCTV에 찍힌 둘의 모습이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너무나 다정했다.
이런 상황에 거의 똑같은 사건이 또 발생했으니 조는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두 번째 피해자 에밀리 카슨 역시 유부녀였고, 워크숍을 왔다가 호텔 방에서 살해당한 뒤 기이한 포즈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결혼반지 또한 사라졌다.




조가 사건을 수사하는 와중에 범인의 정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마틴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프리랜서라서 직장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유부녀만 골라서 살해하는 방법이 밝혀졌고, 왜 유부녀만 골라 살해를 하게 됐는지에 대한 과거가 드러났다. 그런 과거를 보며 마틴이 가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인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었다. 비정상적인 가정 환경이 마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쳐 타인을 죽이는 행위에 대한 희열에 눈 뜨게 만들었다. 마틴을 그렇게 만든 건 엄마이긴 했지만, 그 스스로가 본능적인 살인 욕구를 깨달았기에 문제는 본인에게 있었다.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고, 점점 주기가 짧아지는 살인 욕구로 인해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길지 걱정이 됐다.
그러다 마틴이 새로운 타깃 다이애나를 점찍게 되면서 그녀의 시점이 추가가 됐다. 그녀에게도 마틴 못지않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두 사람이 만나게 될 순간이 기다려졌다. 이후 결말로 이어진 소설은 너무나 큰 충격을 줬다. 다이애나에게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런 장면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마틴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처벌이었던 것 같았다. 그동안 한 짓에 비하면 너무 쉬운 벌이었지만 말이다.

조 푸르니에 연작의 첫 작품이라고 하는데, 첫 작품이라 그런지 경찰의 활약이 도드라지진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범인이 된통 당했다는 것은 통쾌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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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춤을 췄어. 내 뜻대로 먹고 마셨고, 내가 의도한 대로 불타오르는 욕정을 느꼈지. 그리고 이제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지. - P12

양쪽 피해자 모두 팔이 삐딱하게 놓인 것이 마치…… 뭘 닮았다고 해야 할까?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동작을 하던 도중에 화면 정지를 누른 것처럼 묘한 역동성이 느껴졌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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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이브 - 잭 더 리퍼에게 희생된 다섯 여자 이야기
핼리 루벤홀드 지음, 오윤성 옮김 / 북트리거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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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8월 31일.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런던 화이트채플에서 폴리 니컬스라는 여자가 살해됐다. 이후 9월 8일에는 애니 채프먼, 9월 30일에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와 캐서린(케이트) 에도스가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리고 11월 9일에 메리 제인 켈리가 자택 침대에서 훼손된 채 발견됐다. 이 다섯 여자들은 모두 목이 잘렸고, 이들 중 네 명은 내장까지 뜯겼다. 메리 제인을 제외하면 모두들 어두운 야외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경찰은 범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단독범인지 공범이 있었는지조차 알아낼 수 없었다. '잭 더 리퍼'라 불리게 된 희대의 연쇄 살인마를 잡기 위해 경찰은 애를 썼을 테지만, 언론은 오로지 선정적인 기사를 뽑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윤색되고 날조한 이야기인 가짜 뉴스를 실으며 시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잭 더 리퍼의 살인이 일어난 곳이 빈민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해자 여성들은 매춘부라고 단정 지어졌다. 그녀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후 13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피해자 여자들의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을 뿐 매춘부라는 날조만 진실로 남았다. 그리고 잭 더 리퍼의 명성 아닌 명성만이 드높아졌다.

저자는 끔찍한 연쇄 살인마 잭 더 리퍼의 이름에 가려진 여자들의 삶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식시켜주고 진정한 삶을 되찾아주고자 이 책을 썼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아서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던 메리 제인 외에 다른 네 명의 여자들은 평범한 노동자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들 중 몇몇은 당시 계급의 여성들과는 달리 학교 교육을 받아 글을 읽고 쓸 수 있었기에 조금은 나은 형편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기 때문에 현실에 들이닥친 여러 문제들이 그녀들을 괴롭혔고, 극빈 상태에 이르게 했으며, 구빈원을 들락거리게 만들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도 아내에게는 이혼을 청구할 법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편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구빈원에 스스로 걸어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반면에 남편은 결혼 생활에 있어 아주 자유로웠고, 아내 외에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는 것 또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성들이 싸워서 남성과 같은 권리를 얻은 게 10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당연한 사회적 멸시였지만, 그럼에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혼을 할 수 없는 현실에 공식적인 별거로 진행되면 홀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여자의 사정은 나빠지기만 했다. 여기에 아이들까지 부양해야 한다면 죽기 직전까지 극빈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한 알코올중독이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남자들이 술을 많이 마시는 행위에 대해 관대했던 반면, 여자들에게는 죄악으로 치부되어 남편은 물론이고 여자의 가족들에게까지 외면을 받았다. 술에 대한 의존증은 성별의 문제가 아닌데 여자들에게만 엄격했던 건 보수적인 시대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여성들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에 희대의 연쇄 살인마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죽음 이후 윤색된 거짓으로 오랫동안 모욕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삶이 너무나 기구해 더없이 안타까운 마음을 느꼈다. 잭 더 리퍼의 뒤틀린 명성에 가려진 다섯 여자의 이름과 그녀들의 삶, 그 속에서 가졌을 희망과 미래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이름과 행각만 알고 있었던 잔인한 살인마 잭 더 리퍼가 제발 끔찍하게 죽어서 지옥에서라도 고통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잔인한 가해자보다는 피어나지 못했던 피해자의 삶을 기억하고 잘못 알려진 것들을 바로잡으려 한 저자의 마음이 깊게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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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지금까지 폴리, 애니, 엘리자베스, 케이트, 메리 제인의 이야기에 달라붙어 그 형태를 결정해 온 것은 다름 아닌 빅토리아 사회의 가치관이다. 성별은 남성이고 성격은 권위적이며 계급은 중산층인 그 가치관 말이다. 그 시대 여성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거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 시대 빈민은 게으르고 타락한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여성이자 빈민인 사람은 최악의 교집합에 속했다. 지난 130여 년 동안 우리는 저 시대에 만들어진 먼지투성이 짐 꾸러미를 꼭 껴안고만 있었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살펴보려 하지 않고, 피해자들이 어떤 사람이며 그들의 진짜 역사는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꽁꽁 싸맨 그 두꺼운 포장을 풀 생각도 없이. - P32.33

지주와 고용주는 집이나 회사에서 합법적이지 않은 커플을 발견하면 가차 없이 쫓아내거나 해고했으며, 이에 뒤따르는 모든 사회적 지탄은 여자 혼자 감당해야 했다. 남자는 동거 관계를 쉽게 정리할 수 있고 그 어떤 뒷일도 감당할 필요가 없었던 반면, 그동안 스스로 돈을 벌 능력은 줄고 먹여야 할 자식들이 생긴 여자는 곧 극빈 상태에 빠졌다. - P299

폴리, 애니, 엘리자베스, 케이트, 메리 제인은 태어난 첫날부터 그들에게 불리한 게임에 참여해야 했다. 그들 대부분이 노동자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들 모두가 여자로 태어났다. 그들은 말을 배우기도 전부터 같은 가족의 남자 형제보다 덜 중요한 존재, 다른 계급 가족의 딸보다 더 많은 짐을 져야 할 존재로 여겨졌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러 나서기도 전에 가치를 절하당했다. - P392.393

우리가 잭 더 리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1888년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일련의 가치관, 즉 여자들에게 너희는 가치가 적으니 치욕과 학대를 당하리라고 가르치는 그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쁜 여자‘는 벌을 받아 마땅하고 ‘매춘부‘는 여성의 하위종이라는 관념을 강화하는 것이다. - P40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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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령 1
전형진 지음 / 비욘드오리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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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도호부의 술도가인 '백선당'에서는 가문 대대로 '산곡주'라는 명주를 만들어오고 있다. 당주 양일엽은 가업을 잇기 위해 그의 아들 양상규를 가르치면서 함께 술을 빚었고, 산곡주의 비밀 재료인 '천남성'은 오래전 백선당에 찾아온 이의 아들인 천덕이 구하러 다녔다. 산곡주를 한 번 마신 사람은 그 향과 맛을 잊을 수 없어 몇 배의 값을 치르고서라도 손에 넣으려고 하는데, 뚝심 있는 양일엽은 정해놓은 양 외에는 절대 많이 만들지 않았고, 값 또한 모든 상인들에게 똑같이 받았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절이 지나는 와중에 임금이 금주령을 내렸다. 술을 마셔서도 안 되고, 유통해서도 안 되며, 술을 빚어서도 안 된다는 어명이었다. 백선당의 식솔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막막했지만, 양일엽이 근처의 땅을 사들여 식솔들에게 소작을 하여 생활을 이어가도록 했다. 이런 와중에 산곡주를 탐내던 울산도호부 관아 이방 아전인 김치태가 밀주를 빚으라고 양일엽을 압박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금주령이 내려진 뒤, 훈련대장 장붕익은 어명을 받아 밀주 시장을 장악한 '검계' 무리를 소탕하고자 한다. '금란방'이라 불리게 된 조직의 우두머리 장붕익을 포함해 우별장 강찬룡, 파총 나경환, 좌별장 박영준, 별군관 이학송, 종사관 이규상이 몸을 담게 된다. 비밀스러운 조직인 만큼 뛰어난 무관이었던 그들은 처음엔 서로를 의심하며 데면데면해 했지만, 이내 호형호제하며 끈끈한 사이가 되어 뜻을 모았다.

한편, 검계의 회주라 불리는 표철주는 12년 전 장붕익에게 당한 수모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수하인 이철경은 검계를 찾아낸 금란방 관원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난 후, 명령을 받아 울산도호부로 몸을 숨겼다. 매일을 무료하게 보내던 이철경은 김치태가 준 산곡주를 마시고 깜짝 놀라 백선당을 찾아간다.



조선 영조 때를 배경으로 금주령을 소재로 한 소설은 삼대에 걸친 대하드라마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단순하게 말하면 검계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관리들과 고통받는 민초들, 그리고 정의의 편에 서서 검계의 뿌리를 뽑으려는 금란방 관원들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소설 속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조선 후기 백성들의 삶과 부패한 관리들의 행태가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무협지를 읽는 것처럼 칼과 화살 등으로 치열하게 대립하는 모습은 긴장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소설 초반엔 백선당과 금란방, 검계 이 세 부분으로 시점이 나누어져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었다.
왕의 신임을 얻어 검계 소탕에 앞장서게 된 장붕익 대장은 예순이 넘었음에도 불세출의 명장이라 불릴 만큼 무예 실력이 뛰어났고 두려움이 없었다. 품성 또한 뛰어나서 그를 따르는 이가 많았다. 장붕익과 비슷하게 양일엽도 너그러운 품성을 지니고 있었다. 백선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당주 덕분에 먹고사는 데에 어려움이 없어 존경하며 기꺼이 따르고 있었다.
이렇게 존경받을 만한 이들이 있으면 당연히 악당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12년 전 장붕익에게 맞아 이마가 함몰된 표철주는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처단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를 따르는 이철경은 개인적인 일로 장붕익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젊은이였기에 어떤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어느 정도 대립 구도가 세워진 후 금란방 관원들과 검계 무리들이 한바탕 맞서 싸우게 됐는데, 몇몇 캐릭터들이 생각보다 빨리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장붕익과 양일엽 또한 죽음을 면치 못했기에 놀라웠다.

장붕익과 양일엽의 죽음으로 그들의 업은 자연히 후대에 이어지게 됐다. 그들의 아들이 아니라 장붕익의 손자 장기륭, 양일엽의 손녀 양숙영에게 넘어가기까지 제법 오랜 세월이 흘렀다. 두 사람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기륭은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중이었고, 숙영은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 존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기륭과 숙영의 부모가 자신의 아버지만큼이나 고된 삶을 살았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나마 기륭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장붕익과 인연이 깊은 일여 스님의 묘적사에 몸을 숨긴 덕분에 목숨을 보전했지만,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된 숙영의 부모는 안타까운 끝을 맞이했다. 숙영이 천덕을 대신 아버지로 여기며 살긴 했지만, 마음속에 원한이 사그라들진 않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기륭과 숙영은 마주치게 됐고, 나중엔 함께 같은 뜻을 이루고자 했다.
두 사람을 찾아낸 이학송은 무예를 가르쳤고, 그들이 자란 후엔 선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을 한데 모은 사람이 세자 이선(사도세자)이라는 사실도 밝혀져 소설은 점점 흥미진진해졌다. 하지만 실제 역사로 인해 세자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기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좋지 않기도 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흥미로웠고 한시도 지루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읽는 역사 소설이라 초반엔 문체나 화법이 익숙하지 않고, 예스러운 느낌이 강해 진도를 나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삼대에 걸친 검계 소탕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예상했던 부분은 씁쓸하게 막을 내렸고, 간악한 무리들과의 싸움에는 대가가 있었다. 그들이 목숨 바쳐 지켜내고자 한 질서가 의미 있게 다가왔다.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인 소설이라 그런지 역시 재미있었다. 드라마로 잘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 리뷰는 펍스테이션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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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기를 보여야지. 백성을 대상으로 파렴치한 짓을 일삼는 관리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고, 두려움을 갖게 해야지!" 1권 - P93

"검계와 결탁한 관리 같은 건 없소. 검계가 곧 그들이니까. 선을 넘지 마십시오, 대감. 전면전이 벌어지면 도성 전체가 피바다가 될 것이오." 1권 - P212

"관리라는 자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백성을 핍박하는 데 쓰고, 또 어떤 관리는 백성이 도탄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체하고 있는데, 어찌 난리를 일으키지 않고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2권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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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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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베른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교수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학교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 비가 오던 날 아침 8시 15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한가운데에 어떤 여자가 편지로 보이는 종이를 읽다가 구겨서 허공으로 던지는 걸 보게 된다. 그 여자가 왠지 뛰어내릴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서 달려가던 그레고리우스는 우산을 놓쳐버렸고 들고 있던 책 또한 바닥에 쏟아진다. 난간에서 내려온 여자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그레고리우스의 이마에 전화번호인듯한 숫자를 적었다.

이후 여자와 학교로 간 그레고리우스는 도무지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수업에 함께 들어왔던 여자가 조용히 떠나자, 그레고리우스는 외국어 억양으로 말하던 그녀의 모국이 포르투갈이라는 걸 떠올렸고 수업 도중에 학교를 나와 배회한다. 그러다 에스파냐 책방에서 어떤 여학생이 읽다가 놔둔 '언어의 연금술사'를 발견한다. 책방 주인에게서 책의 일부분이 무슨 내용인지 듣게 된 그레고리우스는 무작정 리스본으로 향한다.



아내와 이혼 후 15년 동안 한결같은 삶을 살아온 교수가 낯선 여자를 만난 뒤 그녀의 모국어 쓰인 책을 접하곤 리스본으로 훌쩍 떠나게 된다. 갑자기, 문득, 어떠한 이유도 없이 말이다. 평범했던 그레고리우스의 일상에 변화를 준 건 그 여자였지만, 떠날 마음을 먹게 만든 건 '언어의 연금술사'를 쓴 아마데우 드 프라두였다. 리스본에 도착한 그레고리우스는 책에 대해 알아보다가 점차 프라두의 인생에 대해 알게 되었고, 생전에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귀족 집안의 자제였던 프라두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의사가 되어야만 했다. 10대 시절부터 그런 바람에 부응하기 위해 애를 쓰긴 했지만, 스스로가 원하는 인생과 아버지가 정해준 인생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 커서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잃게 된 것 같았다. 부모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았던 프라두는 너무나 괴로웠을 것이다. 귀족 집안, 판사 아버지, 장남이라는 그의 처지로 인해 늘 모든 이에게서 기대를 받으며 살 수밖에 없었기에 정체성을 잃어갔다.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스스로에 대한 인식,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담긴 책이 바로 그레고리우스가 발견한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아마 그레고리우스 또한 스스로를 그렇게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태껏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혼한 아내에게서 이따금 들었던 말들이나 학교에서 그를 완벽한 선생이라는 뜻으로 부른 별명들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그것에 맞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칭찬이나 기대가 좋은 영향을 줄 때도 있지만 어떤 이를 틀에 가둬놓기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책을 발견한 후에 틀에서 벗어난 여행을 하며 그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깨달음을 얻어 갔다. 그리고 프라두는 무언가를 계속 쓰는 행위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프라두가 성인이 되어 의사로 살아가던 시대는 살라자르가 독재를 하던 시기였다.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던 의사 프라두는 독재 체제 하의 비밀경찰의 목숨을 구해준 사건 이후로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기대와 사랑을 받던 그는 그런 것들이 부담스러웠을 테지만, 완전히 외면을 당하자 그것 역시 견딜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만 한 사람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때부터 저항군에 들어가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생을 뒤흔들어버린 여자 에스테파니아를 만나게 되지만, 그녀가 오랜 친구인 조르지의 연인이라는 걸 알고 괴로워한다. 스스로의 인생을 선택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던 남자는 사랑 또한 마음 가는 대로 할 수가 없었다. 에스테파니아의 마음이 프라두와 같았을지라도 인생에 하나뿐이라고 할 수 있는 친구와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었기에 그는 타오르는 마음을 내려둘 수밖에 없었다.
평생 그렇게 괴리를 안고 살아야 했던 프라두의 삶이 안타까웠다. 적어도 그가 살았던 시대가 독재 체제는 아니었더라면 어그러진 삶이 그것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싶어서 더욱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프라두의 삶을 되짚어보던 몇 주 간의 뜻밖의 여정으로 인해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린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안에 숨어있던 진짜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여행은 여운을 남겼다.

몇 해 전에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그래서 책을 구매해서 읽어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영화 내용도 가물가물해진 지금에서야 갑자기 책이 떠올라서 읽게 됐는데, 다행히 몇몇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책을 읽는 동안 너무 좋은 문장이 많아서 몇 번이고 읽기를 멈추고 메모를 해야만 했다. 다 읽고 나니 꼭 소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너무 좋은 책이었다.
영화도 다시 한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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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 P28

_그들도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서 받는 인상과 그들 스스로 경험하는 방식 사이의 엄청난 괴리를 느낄까? 그들에게도 내면의 익숙함과 외부의 익숙함이 서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동일한 사람의 익숙함이라고는 생각될 수 없을 정도일까?
이런 의식이 불러오는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는, 스스로의 눈에 비치는 우리의 바깥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모습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욱 커진다. - P105.106

_"현재 완성되지 못한 자기 인생에 대한 의식 자체가 불행이라면 누구나 평생 필연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지. 반대로 완전하지 못하다는 자각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인생을 위한 조건이야. 그러니 불행을 만드는 요소는 분명히 이와는 다른 그 무엇이지. 그건 바로, 완성되고 완전한 경험을 하는 건 앞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이야." - P264

_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 P3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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