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배심원
윤홍기 지음 / 연담L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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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위가 일찍 찾아온 11월의 어느 날, 노숙자 강윤호와 지적장애를 가진 정명구는 화산역 대합실 내 자신들의 지정석에 10대 소녀가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비키라고 하다가 시비가 붙는다. 20대 성인 남자인 강윤호는 어린 소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고, 일주일 뒤 저수지 공원에서 소녀의 시체가 발견된다. 대합실 CCTV에 촬영된 영상을 증거로 강윤호가 체포되었는데, 그는 범행을 인정했고 늘 함께 다니는 정명구는 강윤호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화산지방법원에서 국민 참여 재판 전담 공판검사로 일하고 있는 윤진하 검사에게 강윤호 사건이 떨어지고, 김수민 국선 변호사가 강윤호의 변호를 맡게 된다.

20대 노숙자의 10대 가출 소녀 상해치사 사건은 전직 대통령 장석주가 배심원으로 뽑힌 후 재판이 주목받게 된다.

 

 

 

윤진하 검사는 서울대 법대를 중심으로 한 학연과 혈연, 지연 등의 라인이 중요한 검찰 내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이 없었다. 더 높은 곳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라인이 없었기에 노력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공판검사 자리에서 묵묵히 열심히 할 뿐이었다.

그런 윤진하가 맡은 강윤호 사건에 전례 없이 전직 대통령이 배심원이 되면서 검찰은 물론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것도 대검찰청 중수부 과장인 차병준까지 화산지방법원으로 찾아와 윤진하에게 도움을 준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이 있기 때문에 윤진하는 이번 재판에서 자신의 목표대로 강윤호의 10년형을 받아내야 했다.

 

국민 참여 재판에서 유리한 말주변과 호소력, 좋은 목소리에 심지어 배우 뺨치는 외모를 가진 윤진하의 상대는 로스쿨 출신의 또라이라 불리는 김수민 변호사가 아닌 인권 변호사 출신의 전직 대통령 장석주였다. 한낱 배심원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더군다나 현장검증이나 다른 의문도 제시하는 바람에 윤진하는 물론 판사조차도 그를 어려워한다.

그리고 중반으로 가면서 장석주와 관련해 다른 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이 묘해진다. 김수민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윤진하는 화산을 벗어나 서울로 입성하지만 좌천이나 다름없는 한직일 뿐이었다.

 

소설은 강윤호 사건으로 시작되어 후반으로 갈수록 검찰, 전직 대통령 등의 인물을 통해 예상할 수 있는 음모와 비리가 등장했다. 알아주는 엘리트와 일 잘한다고 소문난 캐릭터가 등장했을 때부터 꿍꿍이가 있을 것 같다고 느꼈는데, 역시나 그런 캐릭터는 한치의 예상을 빗나가질 않았다.

이러한 사건들을 윤진하의 시점에서 주로 보여주고 있었기에 출세욕이 있는 그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요즘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이 늘 착하고 바른 선택만 하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양심을 저버릴 수 있을 정도로 눈먼 사람은 아니었다.

너무 드라마틱 한 전개와 마지막에 반전의 키를 쥐고 있던 캐릭터가 상당히 다혈질이라 아쉽긴 했지만, 그 사람을 통해 복잡하게 설계해놓은 사건을 해결하는 결말을 보여준다.

 

작가가 여러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책을 읽는 동안 장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마치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특정 인물이 등장할 때나 언급되는 사건을 볼 때마다 누군가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많고 욕심 많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는 걸 보여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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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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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계약직 강사로 일하고 있는 세라는 최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다. 곧 있을 승진 심사위원회를 통해 전임 강사가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세라는 그녀의 상사인 러브록 교수의 성추행 및 성희롱을 어떻게든 피하고 폭발하지 않기 위해 견뎌내며 강력한 인사권을 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방송에 출연하고 책을 출판하기도 하는 러브록은 대외적으로 뛰어난 학자이자 연구자로 명성이 자자하지만, 여자와 단둘이 남게 되면 본색을 드러냈다.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들먹이며 슬쩍슬쩍 선을 넘는 신체 접촉을 했고, 빙빙 돌려서 잠자리를 요구했다. 지난 2년간 러브록의 타깃이었던 세라는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그를 피하고 적당히 거절하며 넘겼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던 중, 세라가 우연찮게 한 아이를 구해주게 되면서 선택권이 그녀에게 넘어온다. 구해준 아이의 아빠인 러시아 남자 볼코프는 세라에게 빚을 졌다면서 특별한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이름을 하나 말해준다면 그 사람을 흔적도 없이, 세라와 엮일 가능성도 전혀 없이 사라지게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소설의 도입부부터 숨이 턱 막혀왔다. 세미나가 끝나고 동료들과 호텔로 돌아가려던 세라를 러브록이 납치하다시피 택시에 태웠기 때문이었다. 좁은 택시 안, 옆에 앉아 술 냄새를 훅훅 풍기며 음흉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다리가 예쁘다는 성희롱에 허벅지까지 만지며 자신의 방으로 가서 얘기를 더 하자는 러브록이 정말이지 시작부터 너무 역겨웠다. 궁지에 몰린 세라가 시작부터 안타까웠는데 러브록의 더러운 수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연구실로 불러 자꾸만 잠자리를 강요하고, 세라가 자꾸만 피하자 승진에서 가장 유력했던 그녀를 탈락시키고, 그녀의 아이디어조차 자신의 것이라고 가로챈 파렴치한 모습을 보인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엄청난 건 물론이고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도 더 찢어 죽였을 인간이었다.

 

이런 미친놈 때문에 앞길이 막막해진 세라 앞에 생각지도 못한 선택권이 주어졌지만 그녀는 일단 없다고 한다. 하지만 볼코프는 생각할 시간을 72시간이나 줬고, 그 사이에 러브록은 세라에게 또 나쁜 짓을 적립했으니 분노 때문에 그야말로 돌아버린 세라는 볼코프가 준 구형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 29초 동안 통화를 하게 된다.

 

이후로는 사이다만 나올 줄 알았으나 당황스럽게도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 출근길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러브록을 찾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고 직원들 모두를 면담하는데, 세라에게 하는 질문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거기다 어떤 실수로 세라는 이전보다 더 나쁜 상황에 떨어지고 만다. 이보다 더 나쁜 곳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세라가 정말 시궁창으로 떨어져서 차마 눈뜨고 못 볼 끔찍한 상황에 처해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 가슴을 졸였다.

 

읽는 내내 어찌나 답답하고 조마조마했는지 모르겠다. 거기다 짜증스러운 상황은 더 심해져서 진짜 읽는 내내 욕을 했더랬다. 제발 저 xx를 엿 먹여달라고 말이다. 어쩜 저렇게 파렴치한 인간이 있을 수 있는지 너무 역겨웠다.

소설을 읽는 것일 뿐인데도 이렇게 답답하고 화가 나는데 실제로 이런 일을 겪었을,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을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싶었다. 권력을 업고 마구 휘두르며 개인적인 욕구까지 해결하려고 하는 더러운 인간들을 실제로 보는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결말은 통쾌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조금 씁쓸했다. 러브록이 가진 권력보다 더 무시무시한 누군가가 나타나 상황을 완전히 뒤집지 않는 이상 힘없는 계약직처럼 불리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은 그저 당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인간관계를 망가뜨리고 미래를 향해 걸었던 과거까지 없던 일로 만드는 권력이 이런 폐기물 쓰레기에게 주어져선 안 되지만, 그게 또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게 안타깝고 갑갑했다.

아무튼, 이런 쓰레기들은 제발 소크라테스의 명언처럼 너 자신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 추접스럽고 너무 더러운 인간들이다!

 

내용은 좀 답답하고 짜증났지만 소설은 금세 읽어버렸을 만큼 재미가 있었다. 세라가 어떻게 될지, 결말이 어떨지 궁금해서 후다닥 읽어버렸다. 마지막 복수는 정말 유쾌, 상쾌, 통쾌했다. 그리고 영화로 만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누가 러브록을 하느냐.)

T. M. 로건의 책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첫 소설인 <리얼 라이즈>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앞으로 믿고 읽는 작가가 될 것 같다.

 

 

 

* 이 리뷰는 아르테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내게 이름 하나를 주십시오. 한 사람의 이름을. 내가 그 사람을 사라지게 해주지. 당신을 위해서." - P135

당연히, 세라는 볼코프에게 알려줄 이름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이런 경우 말하고 싶은 이름이 하나쯤은 있다. 그렇지 않은가? - P150

"도덕적 우위를 점한다고 해서 끝에 이기리라는 보장은 없어. 상대가 이미 시궁창에 있다면, 때로는 너도 시궁창으로 내려가서 상대에게 결정타를 날려야 해."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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