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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넘 숲
엘리너 캐턴 지음, 권진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3월
평점 :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미라 번팅은 버려진 땅에서 작물을 키우는 게릴라 가드닝 단체 '버넘 숲'을 설립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미라의 곁에는 그녀의 일을 가장 잘 이해해 주고 도와주는 셸리가 있어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셸리는 이제 버넘 숲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미라의 눈에 산사태로 고립된 지역인 '손다이크 목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홀로 방문한 그녀는 곧 작위를 받을 예정인 목장 주인 오언 경에게서 땅을 사기로 약속한 로버트 르모인을 우연히 만났다. 미라는 미국인 억만장자인 로버트가 이곳에 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로버트가 뉴질랜드의 구석진 목장에 눈독을 들인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감추기 위해 미라를 이용하기로 하고 버넘 숲에 후원을 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버넘 숲의 의도는 좋았다. 버려진 땅, 노는 땅에 작물을 키우고 소비하거나 필요한 사람에게 판매해 자급자족하는 목표는 환경적으로 이상적이었으니 말이다. 한 가지 걸리는 건 다른 사람 소유의 땅, 혹은 집 마당 같은 데에 허락 없이 활동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경범죄 정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었기에 그들의 활동을 마냥 응원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 미라가 로버트를 만나 후원을 받기로 하면서 버넘 숲의 의도가 본의 아니게 흐려지고 있다고 보였다. 자급자족하는 친환경 가드닝 단체였지만 그들은 재정적인 문제가 심각했었다. 회원들이 각자 일을 하며 버넘 숲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버넘 숲만으로는 경제적 이익을 얻기가 어려웠다. 여기에서부터 버넘 숲의 목적을 이뤄나가기 어려워졌다. 어느 단체든지 활동을 하려면 재정적인 부분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친환경 단체라고 해도 최소한의 경제적 이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로버트의 후원은 버넘 숲에 온 천재일우였을 터였다.
하지만 정작 로버트를 우연히 만나 후원을 받기로 한 당사자이자 버넘 숲의 설립자인 미라는 갈수록 이 상황이 부담스러워졌다. 여느 때의 활동과 비슷하고 규모만 좀 커졌을 뿐인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 와중에 버넘 숲을 나가려고 했던 셸리는 과거 미라와 묘한 관계였던 토니가 돌아왔을 때 그에게 호감을 느끼며 같이 밤을 보내겠다는 다짐을 했었고, 로버트를 만난 이후에는 그에게로 관심을 기울였다. 셸리에게는 남자, 그것도 미라와 가까운 남자의 관심을 바라는 묘한 심리를 갖고 있었다.
버넘 숲의 회원이었지만 해외에 나갔다가 돌아온 토니는 로버트와 관련된 사항을 전해 듣고 격앙되어 의견을 피력하다가 제명되다시피했다. 그 이후 토니는 부유한 자들에 관한 고발 기사를 쓰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로버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경제적 상류층의 스테레오 타입처럼 보였다. 가만 보면 토니와 로버트는 대척점에 있는 관계였으나 자신이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은 같았다.
그리고 이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던 오언 경은 자신이 대외적으로 추구하는 환경보호론자 이미지와 맞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보여줬다. 대외적으로는 나이브한 이미지를 꾸며냈지만, 로버트에게는 본래의 가치보다 월등히 높은 액수를 받고 목장을 팔았던 걸 보면 말이다.
다섯 캐릭터의 모습을 보며 요즘 사회가 추구하는 인간의 형태를 소설 안에 펼쳐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꾸민 오언 경 같은 인간도 있을 테고, 원하는 게 무엇이고 원하지 않는 건 또 뭔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셸리와 미라도 있었다. 그리고 원하는 걸 확신하는 로버트와 토니도 존재했다.
이런 이들이 후반에 손다이크 목장과 그 주변에 모였을 때 상상도 못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소설은 급박한 전개를 띠며 각 캐릭터의 숨은 면, 숨기고 싶은 면을 드러내 당혹스럽게 했다. 한편으로는 우려스럽기도 했고 다른 누군가는 예상 그대로라 놀랍지도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과 결말은 내가 잘 아는 건 아님에도 현실적이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개운치가 않았다.
소설 <버넘 숲>은 과작을 하는 작가인 엘리너 캐턴의 신작이다. <루미너리스>를 무척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시대극인 전작과는 다르게 이번 소설은 현대를 배경으로 갈수록 현실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결말이 현실과 맞닿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집단 감시는 전체주의적이고 억압적이죠. 억만장자 계급은 그 존재만으로 연대를 잠식합니다. 그건 근본적으로 지속 불가능하고 시대에 역행하고 정의에 반해요. 시민권을 팔고 사면 안 됩니다. 저항 행위가 의뢰 가능한 일이 되어서는 안 돼요.」 - P164
「뭐가 옳은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잖아. 내 말은, 뭐가 옳은지 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안다고 자신에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선택하는 시점에는, 그러니까 그 순간에는 절대 확신하지 못하잖아. 그냥 바랄 뿐이지. 그냥 일단 행동하고 최선의 결과가 나오길 바라는 거지. 지나고 보면, 그게 옳은 일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아닐 경우에는, 적어도 노력은 했다고 말할 수밖에. 하지만 잘못된 일은 말이야, 종종 훨씬 분명해. 잘못된 일은 많은 경우 옳은 일보다 더 잘 보여. 더 명확해. 이건 내가 안 넘을 걸 아는 선, 이건 내가 절대 하지 않을 일, 이런 식으로.」 - P33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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