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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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캐나다에서 일하던 칼 오프가르가 15년 만에 돌아왔다. 유일한 가족인 형 로위가 남아 지키고 있는 산 위의 농장에, 그것도 아내 섀넌을 데리고 말이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두 형제지만 그들은 마치 어제 만난 듯 반가워하며 서로를 마주했고, 로위는 새롭게 가족이 된 섀넌도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부터 쇠락한 마을 곳곳에 호텔 사업에 투자하라는 전단지가 붙었다. 로위가 맡아서 하고 있는 주유소에 경찰 쿠르트 올센이 찾아와 이 사실을 알렸는데, 이후 칼에게 물어본 결과 가족이 4대째 소유하고 있는 산꼭대기 황무지에 스파 호텔을 짓겠다는 당찬 포부를 듣게 된다.

칼이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기 전에 그들은 여느 가족처럼 부모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평범한 가족처럼 보이지만 모든 가족이 그러하듯 그들에게도 비밀은 있었고, 가족이라는 왕국이 깨지는 게 두려워 그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로위는 비밀을 알게 된 순간부터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소설은 현재 형 로위가 있는 집에 아내 섀넌과 함께 돌아온 칼의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과거 그들 가족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회상하는 과거가 간간이 삽입되었다. 소설 전체가 로위의 시점으로 진행됐기에 그의 말이나 행동이 전적으로 진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지만, 소설이 흐르면서 그가 보여주는 모든 게 진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 작은 마을에서 의문스러운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났는데, 그 사건에는 로위와 동생 칼이 늘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들 부모가 탄 차가 산비탈을 내려오다 절벽에 떨어진 사건이 있었고, 이후 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들 부모가 단순한 사고사가 아닌 살인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던 시그문 올센 경찰이 실종되었다. 그것도 두 형제를 한 명씩 만난 이후에 말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된 쿠르트가 오프가르 부부 사건과 아버지 사건을 연관 지어 오프가르 형제를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10대 시절부터 오프가르 형제는 너무나 다른 성격을 가졌기에 친구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뚜렷하게 다르게 대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예쁘장한 외모를 가졌던 칼은 10대가 되었을 때 잘생긴 청년이 되어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까지 그와 어울리는 걸 좋아했을 만큼 리더십도 있었지만 때로는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동생을 구하러 나타난 로위로 인해 두 형제를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조용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로위는 동생을 보호할 때에는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로위는 칼보다 왜소한 몸집을 가졌지만 그 누구도 로위와 싸워서 이길 수 없었다.
이들의 이런 관계로 인해 초반엔 조금 오해하기도 했던 건 사실이다. 과거 회상 장면에서 칼과 관련된 어떤 일이 언급되었기에 당연히 로위가 관련됐을 거라 생각했지만, 추후 밝혀진 비밀은 너무 끔찍해서 몸서리치게 만들었고 로위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로위가 칼의 여자친구에게 관심을 두는 장면이나 중고차 판매원의 아내 리타와 불륜을 저지르는 걸 보며 그에게도 뭔가 뒤틀린 구석이 있다는 생각에 좀처럼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수십 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온 칼이 마을 사람들에게 투자를 받아 산정 호텔을 짓기로 하면서 마을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로위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감정이 생겨 마을을 떠나 다른 지역에 머무르는 선택을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에 보상을 받고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누린다. 그러나 그는 이 감정의 끝이 비극으로 치달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영원한 건 없다는 듯 말이다.
어떻게 보면 오프가르 형제의 아버지가 초반에 강조한 것처럼 가족이란 서로가 서로를 믿고 지켜야 하는 견고한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로위에게 칼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로 인해 서로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고, 지금 현재까지도 그 왕국이 유지되어 오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형제 사이에 틈이 생겨 새로 생길지도 모를 가족을 위해 로위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 선택을 보며 내내 냉혈한으로만 보이던 로위가 처음으로 인간미 있다 느껴졌는데, 결말에 이르렀을 때 선택의 결과가 달라졌다는 걸 보고서 행동에 옮긴 그가 왠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위에게 가족은 지켜야 하는 존재가 아닌 그를 옭아매는 올가미와도 같다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의 소설은 '해리 홀레 시리즈'만 읽었다. 스탠드얼론은 처음인데 역시 요 네스뵈답게 분량이 굉장했다. 746페이지를 꽉꽉 채운 이야기는 소설 속 추위처럼 서늘하고도 조용했지만 알 수 없는 진실로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러면서 마지막엔 완전히 뒤틀려버린 계획으로 인해 앞으로 잘 될 거라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왠지 모를 비극처럼 느껴졌다.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만 괴롭히는 줄 알았는데 단독 작품의 주인공까지 비극으로 만들어버린 걸 보면 역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그렇게라도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다.
그래도 소설은 재미있었다. 역시 요 네스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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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가족이다. 우리가 믿을 건 가족뿐이야. 친구, 애인, 이웃, 이 지방 사람들, 국가. 그건 모두 환상이야. 정말로 중요한 때가 오면 양초 한 자루 값어치도 안 된다. 그때는 그들을 상대로 우리가 뭉쳐야 해, 로위. 다른 모든 사람 앞에서 가족이 뭉쳐야 한다고. 알았지?" - P13

나는 그렇게 수치스러워하는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집에서. 거울 속에서. 그래서 알아보았다. 그보다 더 심오한 것은 없었다. 저지른 죄가 너무나 추악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서가 아니라, 다시 그 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라서. 거울은 내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맹세하지만, 그 일은 몇 번이고 자꾸만 일어난다. 죄를 저지를 때도 수치스럽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이렇게 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더 수치스럽다. 하기 싫은 일을 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면 적어도 순수한 악의를 품은 자신의 천성을 탓할 수도 있을 텐데. - P134

"형이랑 나, 우리 둘뿐이야." 이건 칼이 옛날에 하던 말이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들, 우리를 사랑하는 것 같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전부 사막의 신기루야. 하지만 형이랑 나는 하나야. 우리는 형제니까. 사막의 두 형제. 한 명이 사라지면 다른 하나도 사라져." - P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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