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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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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 재교육 수용소에 수감된 '나'는 수용 소장에게 방대한 분량의 자술서를 써서 제출한다.
사이공이 함락될 무렵, 모시는 장군과 그의 가족, 고등학교 때부터 만과 함께 피를 나눈 형제인 친구 본과 그의 아내와 아들 등을 비롯한 남베트남 장교들과 함께 그곳을 탈출한다. 미군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하지만 탈출 수송기를 타려고 이동하던 중에 본의 아내와 아들이 사살되고 말았다. 가지 않으려는 본을 억지로 끌고, 아내와 아들의 시신을 싣고 그들은 괌을 거쳐 미국 본토로 수송되었다.

나는 남베트남의 대위로 오랫동안 살았지만, 사실은 공산주의에 심취한 만에 의해 북베트남의 스파이로 남베트남에 심어진 스파이였다. 또한 CIA의 공작원 클로드에게 발탁되어 정보 요원으로 일하고 있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한 남자가 수용소에 수감되어 이중첩자 생활을 했던 과거에 대한 자백은 시작부터 어떤 회한이 담겨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장을 위시한 누군가의 이념에 부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자백은 베트남을 탈출하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해 시간 순으로 진행되는 한편으로, 때때로 먼 과거로 기억이 닿기도 했고 중간중간 미국 유학 생활 시점이 등장하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은 CIA의 스파이면서 북베트남 측이 남베트남에 심어 놓은 스파이이기도 했다. 이 상황만으로 충분히 정체성이 흐려질 수 있었던 주인공은 태생부터 남달랐기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인 신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은 그 시대의 혼혈이 흔히 받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자신을 '잡종 새끼'라고 지칭하던 혐오스러운 단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그를 따라다녔다. 심지어 베트남을 탈출한 이후에 비밀 부대 후원을 위해 다시 미국을 떠나려고 할 때,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했던 장군에게서도 그 말을 들어야만 했다.
혼혈이라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주인공은 미국 유학 생활 중에도 비슷한 취급을 당했다. 아시아인치고는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은 듣는 입장에서 칭찬이 아니라 모욕이었다. 오랜 미국 생활로 인해 미국 문화에 흠뻑 빠져들어 어떨 땐 미국인보다 더 잘 아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었지만, 정작 미국인들은 주인공을 이방인 취급을 했다.
태생에서부터 이중적인 삶을 살아올 수밖에 없던 주인공의 딜레마가 그의 인생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렇게 확립되지 않은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온 그도 평범한 인간이기에 마음을 기울이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었다. 주인공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만, 본과 의형제나 다름없었는데, 중요한 사실은 만과 주인공이 북베트남 쪽 사람이었던 반면 본은 남베트남의 군인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본은 그 사실을 몰랐고, 마지막까지 알지 못했다. 주인공에게는 이념보다 두 친구와의 우정이 더 중요했다. 이중 스파이로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미국으로 탈출해 함께 생활하고 있는 본을 챙겼다. 그리고 그건 만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게 이들의 우정과 관계를 감히 단정 지을 수 없게 했다.
또한 주인공에게도 마음이 가는 여성들이 있기도 했다. 미국을 탈출한 후 대학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게 됐는데, 어떤 교수의 비서인 일본계 미국인 미즈 모리와 연애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장군의 딸인 라나에게는 마음을 빼앗겼는데, 자신의 불안한 현실로 인해 결혼은 꿈도 못 꾸던 그가 그녀와는 결혼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을 만큼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미즈 모리와는 대학 시절에 인연이 있던 소니로 인해, 그리고 라나와는 장군과 부인의 발언으로 인해 끝나고 말았다.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한 관계가 그의 태생과 이념으로 인해 끝을 맺었다는 건 주인공의 정체성이 타자에 의해 언제까지고 흔들리게 될 거라는 걸 의미하는 듯했다.

이후 주인공은 장군이 주도한 비밀 부대의 후원을 위해 미국을 떠나 여러 나라를 거쳐 베트남으로 가던 중에 공격을 받고 수용소에 오게 됐다. 현재 시점으로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갔는데, 내게는 부정적인 의미로 남아 안타까움을 느끼게 했다. 하나의 무언가가 아닌 이중적인 두 자아로 남아버린 주인공이 고문에 의해 그렇게 된 것 같아 안쓰러움이 남았다.

이 소설은 박찬욱 감독님이 HBO에서 방영될 드라마로 연출한 작품이라 관심이 갔었다. 그래서 궁금해서 읽게 된 책인데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소설이 굉장히 안 읽혀서 일주일을 넘게 붙잡고 있었다. 읽다가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너무 많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다 읽어서 다행이다.
읽느라 힘들었던 소설을 드라마로 어떻게 표현했을지, 그 부분이 더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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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이때 그것을 벗어 버릴 기회가 온 겁니다. 그것도 안전하게요. 나는 본능적으로 이런 바보짓을 했던 겁니다.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닌 어떤 느낌 때문에요. 다른 사람들이 내가 진짜로 어떤 사람인지 알기만 하면 나를 이해하고 어쩌면 사랑할 수도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 나뿐일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가면을 벗었는데 다른 사람이 사랑이 아닌, 경악과 혐오와 분노의 감정으로 바라본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스스로 폭로한 자신의 본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가면만큼이나 불쾌하거나 아니면 훨씬 더 혐오스럽다면 어떻게 될까요? - P475

이곳에서는 외래종 잡초들 때문에 우리나라 자생식물의 무성한 잎이 대부분 말라 죽어 버리지. 외래종 식물과 자생 식물군의 혼합은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법이야. 어쩌면 자네가 이미 경험으로 배웠다시피 말이야. - P115

이보게, 대위. 자네는 훌륭한 젊은이야. 하지만 동시에, 그러니까 자네가 혹시 깨닫지 못했을 경우에 대비해서 말이지만, 자네는 ‘잡종 새끼‘야. - P502

나는 여전히 성인 남자 안에 있는 그 아이와 그 아이 안에 있는 성인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때껏 늘 분열되어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 내 잘못은 일부분일 뿐이라 해도 말이다. 비록 내가 두 개의 삶을 살며 두 마음을 가진 남자가 되기로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언제나 어떤 식으로 나를 ‘잡종 새끼‘라고 불렀는지를 감안할 때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중략)
학대받은 우리 세대가 출생하기 이전부터 분열되어 있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나는 아무도 결코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저 언제나 내 두 측면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윽박지를 뿐인 출산 이후의 세상으로 인도되며 날 때부터 분열이 되었다. - P6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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