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 - 신진 작가 9인의 SF 단편 앤솔러지 네오픽션 ON시리즈 1
신조하 외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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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하 × 인간의 대리인 무뇌증으로 태어난 '나'는 '투명한 뇌' 기술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고, 변호사가 되기까지 했다. 나는 제약회사의 알츠하이머 치료제의 임상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약의 부작용으로 좀비가 된 사건을 맡게 됐다. 인간도 AI도 아닌 내가 좀비가 된 사람들의 안락사 요구에 변호하는 상황은 아이러니했다.
유이립 × 스키마 리셋터 타인의 의식을 조작해 의견을 바꿀 수 있는 기계 '스키마 리셋터'를 사용하기 위해 조교인 '나'는 교수 몰래 테스트를 진행했다. 자동차 회사의 생산 공장 노조 간부와 본사 상무, 그리고 아웃소싱 업체의 대표가 이 실험에 참가했다.
임하곤 × 나와 올퓌
60년도 더 전에 발생한 전염병으로 국가는 1인 가구 체제를 돌입했고, 가족끼리도 떨어져 살아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러다 전기가 끊겨 모든 전자기기가 멈춰버렸다. '나'는 손녀 예은이 일주일째 연락이 되지 않자 태양열 자동차를 충전해서 몰고 도로로 나갔다. 그러다 방전되어가는 휴머노이드 올퓌를 만나 동행하게 된다.

최희라 × 영원
모든 인류가 칩을 이식받아 관리받는 세계에서 끝까지 이식을 받지 않은 한설은 죽음을 앞두고 과거를 회상한다. 전염병 창궐로 수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되자, 휴머노이드 양육자를 고아에게 배정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그렇게 혼자가 된 아이 영원과 휴머노이드 인피니티가 만났다.
이세형 ×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여자는 대행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간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간 날 자신처럼 대신 나온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 '토탈 이모션'이라는 회사의 연락을 받은 두 사람은 모든 대행 서비스를 AI로 진행하는 그곳의 직원이 된다.
클레이븐 ×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
모든 사람이 도덕을 업데이트해야 하는 시대에 정수는 3.4 버전의 도덕을 소유하며 택배 일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실장이 불러 찾아간 정수는 4 버전 이하의 도덕을 가진 사람들은 일을 시키면 안 된다는 정부 지침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도덕을 업데이트하기에는 돈이 없는 그는 이웃에 사는 노인이 5.1 베타 버전을 구입한 걸 알고 빼앗을 계획을 짠다.

강윤정 × 대통령의 자장가
대통령 한지수의 아이가 청와대 안에서 납치됐다. 13주 차 된 인공자궁 '움시스'를 찾기 위해 한지수와 경찰은 조심스레 움직였다. 납치범은 한지수에게 몰래 연락해 어떤 요구를 했는데, 그때 대통령의 남편 성규가 납치 사실을 언론에 공표했다. 그 바람에 지수는 전 국민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
이성탄 × 정신의 작용
인간의 정신을 컴퓨터에 옮겨 일종의 영생을 하도록 하는 프로젝트를 연구하는 연경과 수연은 실험이 계속해서 실패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평범한 사람의 정신을 디지털화하자, 가족은 물론 모든 사람이 업로드된 정신이 실험 대상과 일치한다고 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안리준 × 미래의 죽음
'나'는 후배가 개발한 프로그램의 오류를 찾다가 갑자기 어떤 영상을 보게 된다. 아내인 미래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의 장례식장의 풍경이었다. 나는 그게 잠깐 꾼 꿈이 아닌 앞으로 일어날 현실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곤 미래를 보호하고 자신이 본 앞날을 바꾸기 위해 방법을 강구한다.




여러 작가들의 SF 앤솔러지를 담은 단편집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임하곤 작가의 <나와 올퓌>, 그리고 클레이븐 작가의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였다.
<나와 올퓌>는 손녀를 만나러 가는 할머니와 어폐가 있지만 죽어가는 휴머노이드 올퓌의 묘한 동행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극명한 차이에도 할머니는 올퓌가 감정이 있는 존재라고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그건 올퓌가 사랑했던 인간 여자를 잃은 뒤에 상실감을 갖게 됐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고, 이 짧은 여행의 막바지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서 올퓌가 함께 지낸 인간(할머니)을 향한 순수한 애정이 생겨났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올퓌>라는 제목이 마지막에 와닿는 감정이 사뭇 뭉클했던 이야기였다.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는 모든 사람들이 도덕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해 살아가는 세계에서 매번 업데이트되는 도덕 버전을 구입하기 어려운 정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도덕이란 인간의 양심에 기대 지켜야 하는 도리가 아니라 쓸데없는 것까지도 도덕이라 규정했다. 가장 어이가 없던 건 최근 도덕 업데이트로 인해 라면과 만두를 함께 먹는 게 비도덕적 범주에 편입됐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세계에서 낮은 버전의 도덕으로는 일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정수가 이웃에 살며 쓰레기를 수집하는 꼬부랑 할머니의 도덕을 훔치려다 도리어 영웅이 되는 결말을 보여줬다. 형태가 없는 도덕을 프로그램처럼 만들고 업데이트하는 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비꼬는 이야기라 기억에 남는다.

<영원>과 표제작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는 감성적인 이야기였다. <스키마 리셋터>와 <대통령의 자장가>, 그리고 <미래의 죽음>은 결말 부분이 뭔가 씁쓸했다. <정신의 작용>은 아이디어가 빛났고, <인간의 대리인>은 SF에서 늘 말하는 인간을 인간이라 규정짓는 게 무엇인지에 관한 고찰을 보여줬다.
각양각색의 다양한 SF적 상상력을 볼 수 있었던 단편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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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만 한다. 올퓌가 사랑한 사람에 대해, 그리고 올퓌에 대해서도. 이별이 결정 난 세상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 때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나는 올퓌를 정말 좋아했다. 임하곤 <나와 올퓌> - P111

‘도덕이 정확한 규격을 갖춘다면 세상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니 정말로 병신 같은 생각이었다. 도덕에 정확한 규격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형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클레이븐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 - P192

인간이 되고 싶은 존재는 인간이 아니다. 엄마에게 내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수차례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너는 내 자식일 뿐이다, 라고 대답했는데 그건 그녀가 실제로 나를 기계도 인간도 아닌 ‘그녀의 자녀‘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좀비도 무뇌아도 인간임을 증명해야 하는 이상 인간이 될 수 없다. 신조하 <인간의 대리인> - P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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