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9세기.
인간들이 벌인 전쟁으로 환경은 돌이킬 수 있는 지점을 한참 지났다. 많은 인간이 죽었고, 지구는 황폐화되어 푸르름이 사라졌다. 세상엔 먼 곳에 존재하는 바다와 주변을 온통 둘러싼 사막뿐이다.

오래전, 고고를 구해준 랑이의 심장이 아침에 멈췄다. 아침에 여느 날과 다르게 고고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랑이가 그를 낳아준 조를 따라간 것이었다. 매일 물을 가져다주는 랑이의 친구 지카가 랑이를 보고선 장례 준비를 대신해 주었다. 그렇게 지카와 고고는 랑이를 땅에 묻었다.
지카는 홀로 남은 고고에게 함께 바다로 가자고 제안했지만, 고고는 랑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과거로 가는 땅으로 향했다.



까마득히 머나먼 미래에, 만들어진 지 천 년은 족히 넘은 로봇 고고가 주인인 랑을 떠나보낸 뒤 세상을 여행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주변엔 온통 모래뿐인 사막을 여행하면서 고고는 여러 존재를 마주했다. 함께 떠나자고 했던 랑이의 친구 지카, 나이가 아주 많은 노인 버진, 그리고 모래에 묻힌 시체가 있었고, 자신을 만든 주인을 찾아 돌아다니는 로봇 알아이아이를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외계 행성에서 온 살리를 만나 마침내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로봇 고고가 존재하는 이유는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비록 그가 원래 만들어진 목적은 살인 기계였지만, 이제는 전쟁이 끝난 시대였고 그를 구해준 랑이를 지키는 걸로 존재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랑이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고는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고고가 인간이었다면 그건 상실을 느끼고 슬퍼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고고는 스스로가 로봇이라 감정 따윈 가질 수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고고를 완전한 로봇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감정을 가지고 있는 로봇임에 분명했다. 랑이 살아있을 때 가고 싶어 했다던 과거로 가는 땅으로 가던 것부터, 녹음이나 녹화된 파일을 재생하는 행동은 기억을 되새기는 인간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랑을 추억하며 함께 했던 일들, 대화 등을 떠올리던 고고의 모든 부분들이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고고에게 랑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그 아이가 떠난 후에 지금 얼마나 슬픈지 절실하게 와닿았다.

그렇게 자신에겐 없을 거라 여기는 감정을 안고 과거로 가는 땅을 향해 가면서 여러 존재를 만난 고고는 조금씩 깨달음을 얻었다. 특히 자신과 같은 로봇인 알아이아이가 그를 만든 카일을 만나려고 아무것도 없는 사막을 돌아다니는 것과 알아이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내준 고고의 행동은 그들이 사람의 탈을 쓴 짐승보다 훨씬 나은 존재라는 걸 느끼게 했다.
오로지 자신을 만든 존재,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를 위해 엔진이 움직이고 있지만,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면서 사람과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처음엔 곁에 있는 사람을 흉내 낸 감정에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어느새 그들은 사람과 같은 감정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깨달음을 얻고 마침내 랑이에게 향해 가는 길을 기쁘게 걸어간 고고의 마지막 모습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그 길이 머리로는 비극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재회의 희망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로 출간된 천선란 작가의 소설은 짧았지만 역시나 좋았다. 뭉클한 이야기가 깊이 남을 듯하다.

‘마음은 중요해.‘
랑의 말에 나는 마음이 없다고 대답했고, 랑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목적이야. 네 목적에 가장 빨리 닿으려고 애쓰는 게 마음이야.‘ - P44

"너도 감정이 있다는 말처럼 들려. 너는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것처럼 느껴져. 감정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 P132

"덕분에 머리카락을 묶어주고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었다. 그림자놀이를 하고 손톱만 한 돌 다섯 개를 하나씩 던졌다가 줍는 놀이도 했지. 자라지 않는 내 손으로 해마다 얼마큼 키가 자랐는지 잴 수도 있었다. 손가락이 없었다면 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중략)
아니, 나는…… 머리를 묶어줄 수 있어 감사했다." - P62.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