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연인들
정영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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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호기롭게 외국으로 떠났다가 실패를 하고 돌아온 '나'에게 한 커플이 연락을 해왔다. 정은과 현수 커플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크라우드 펀딩으로 판매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보다 몇 살 연상인 그들의 글을 봐주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리게 됐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과거에 헤어졌던 연경과 꿈꾸던 연애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고 깨닫는다.
내일의 연인들 대학원생 정안에게 한동안 연락이 끊겼었던 선애 누나가 전화를 했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이혼을 하게 됐다고 말하는 선애 누나는 집이 잘 팔리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 대신 그 집에서 지내고 관리를 하며 부동산을 통해 온 사람들에게 집을 보여달라고 부탁을 했다. 마침 부모님의 눈치가 보이고 학교가 누나의 집에서 가까워 정안은 이사를 강행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정안은 여자친구 지원과 종종 집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다 보니 선애 누나가 왜 이혼을 하게 됐는지 궁금해진다.

더 인간적인 말
갑자기 변호사의 연락을 받은 '나'는 당연히 아내 해원이 고용한 이혼 전문 변호사의 연락인 줄 알았다. 그러나 변호사가 말하는 내용은 이모 이연자가 나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건데, 이모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이틀 후, 해원과 함께 찾아갔을 때 이모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반겨줬다. 어물쩍 넘어갈 수 없어서 유산 이야기를 꺼내자 이모는 스위스에 가서 죽을 거라고 말했다.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
불행하고 불운한 사고가 일어나는 상상을 자주 하는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 이유정이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에 그녀의 집을 찾았다. 너무 작은 아기가 신기했는데, 유정이는 나에게 아기를 안아보라며 안겨주려고 했고 나는 왠지 겁이 나서 아기를 안기를 주저했다. 그 짧은 사이에 의사소통이 잘못됐는지 아기를 놓쳤고, 그 작은 아기는 거실 바닥에 머리부터 떨어지고 말았다.

기적의 시대
은주와 결혼한 '나'는 옛 연애에 대해 서로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물론 은주나 내가 모든 연애를 이야기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만에 만난 성준 부부와 친하게 지내며 함께 어울리게 됐다. 그러다 연인도 뭐도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나의 기억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연희에 대한 이야기를 성준이 꺼냈다.
서로의 나라에서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동네에서 술을 마시다가 조아현을 알게 됐다. 옆 테이블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던 조아현과 가까워진 후 우리는 종종 만나 여기저기 함께 돌아다녔다. 당시 유행하던 싸이월드에 조아현이 하루 일과를 시시콜콜 늘어놓고, 심지어는 먹은 음식들과 누구를 만났는지까지 쓴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이후 나는 조아현의 싸이월드에 종종 들어가 그녀의 글을 읽었고, 그녀와 이유 없이 멀어진 후에는 SNS에 들어가 그녀를 찾았다.

길을 잘 찾는 서울 사람들
'나'는 수진과 함께 병원에 입원한 동생을 방문하며 위로의 선물로 줄 화분을 뒷좌석에 싣고 한남대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운전대를 잡은 수진을 보며 나는 평소와 달랐던 아침에 대해 떠올린다. 말다툼이나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게 아닌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네지 않았던 아침으로 인해 모든 게 짜증이 난다.
두 사람의 세계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언니가 있는 서울로 올라온 이영선은 구로동에 있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막내인 그녀는 종종 공구상가에 가서 물건을 사 오는 잔심부름을 하곤 했는데, 그 가게에서 하남영을 만나게 됐다. 영선이 먼저 남영에게 말을 건넨 일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가까워졌고, 언니가 남자를 함부로 만나고 다니면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음에도 영선은 남영의 아기를 가져 급하게 결혼을 하게 됐다.



정영수 작가의 소설집은 제목에 들어간 '연인들'이라는 단어에서 연상할 수 있는 연애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었다. 과거에 연인 혹은 인연이었던 사람과의 기억을 떠올리는 이야기가 있었고, 현재는 연인 혹은 부부이긴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장담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중에서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는 <우리들>과 <두 사람의 세계>였다.
<우리들>은 자신들의 연애를 책으로 내고 싶다고 '나'를 찾아온 정은, 현수와 가까워지면서 스스로 정립한 이상적인 연인 관계를 마침내 발견하게 된 이야기였다. 화자는 한 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그리고 다시 헤어지게 된 연경을 떠올리며 그녀와의 연애도 이들과 같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데 소설 말미에 정은과 현수의 관계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며 내게는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나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자는 놀랍게도 그 진실에 관해서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그 관계가 깨질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라는 테두리로 묶여 있던 커플과 자신이 산산조각 나서 이제는 다시 혼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입장이라 기억에 남았다.
<두 사람의 세계>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급하게 결혼하게 된 이야기였는데, 알고 보니 화자가 그들의 아들이었다. 남자의 데이트 폭력으로 진작 헤어졌어야 마땅했지만, 여자는 아기가 생기는 바람에 헤어질 수 없게 됐다. 이후 부부가 된 그들은 서로에게 애정이 없는 이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아들은 그걸 모두 봐왔다. 그러다 아들의 손에 이끌려 법원에 가서 이혼을 결정하는데, 마지막 어머니의 결정이 내게는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으로 남겨졌다. 늘그막에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보다 애정 없는 남자,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 남자와 사는 것이 더 나았을까 정말 의문이다. 이 단편을 다 읽고 나니 제목이 왠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인연에 관한 이야기 중 큰 놀라움을 안겼던 건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이었다. 불행을 상상하는 남자에게 상상도 해보지 못한 커다란 불행이 닥쳤다. 그것도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아니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의 아기에게 말이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였다면 정말이지 못 견디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물론 주인공 또한 죄스러운 마음에 사죄를 하고 또 했지만, 친구의 단호함으로 사과도 더는 하지 못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친구와의 우정은 당연히 끝이 났고, 불행한 상상을 하는 건 여전했는데 그 불행의 끝엔 늘 친구의 아기가 있었다는 게 뭔가 모순적이면서 씁쓸했다. 그 불행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 친구였던 타인의 불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읽기 전과 후의 느낌이 완전히 다른 소설이라 내게는 반전과도 같은 책이었다.

정은과 현수는 내가 언젠가 막연히 나에게도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삶, 진짜 어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무엇보다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 그랬다. 그들은 서로를 완전한 독립체로 대하면서도 끊을 수 없는 강한 유대를 맺고 있었고 그것은 사랑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아주 단단하고 영속적인 결합으로 보였다. 그건 내가 구체적으로 그려보지는 못했지만 만약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았을 완벽한 형태의 관계 같았다. <우리들> - P22

연인이 된다는 것은 두 개의 삶이 하나로 포개진다는 뜻이다. 그러다 결별의 순간이 오면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원래의 삶을 잊어버리거나 혹은 잃어버리기도 한다. <두 사람의 세계> - P185

그 아이는 이제 내게 실체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불운을 뜻하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존재했다. 나는 유정과 내가 서로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우정을 유지해왔던 것과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며 삶의 아이러니를 느끼곤 한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우스운 과거 대신 불행을 매개로 이어져 있었고 서로를 떠올리는 것은 어떤 불운을 상기하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불운을 떠올리는 일은 서로를 연상시키는 일이 되었다. <무사하고 안녕한 현대에서의 삶> - P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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