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괴의 날 정해연의 날 3부작
정해연 지음 / 시공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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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은 소아혈액암을 앓고 있는 딸 희애의 수술비를 마련하고자 3년 전 떠난 전 부인 서혜은의 지시를 따르기로 한다. 혜은은 부잣집 딸 최로희를 납치해 부모에게서 희애의 수술비를 받아내고 아이를 돌려보내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명준에게 대포폰과 대포차를 주며 유괴할 날짜를 정해줬다.
달리 수술비를 마련할 방법이 없었던 명준은 혜은이 정해준 날에 차를 몰고 로희의 집골목으로 들어갔다가 대문 밖으로 튀어나온 누군가를 차로 치게 된다. 놀란 명준이 확인한 결과 차에 치인 사람은 자신이 납치해야 했던 로희였다. 아이의 머리에서 피가 나고 있었기에 명준은 로희를 차에 태우고선 인적 드문 자신의 허름한 집으로 향했다.

로희가 깨어났을 때 명준은 깜짝 놀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이 됐다. 로희가 기억을 잃고선 자신이 누구냐고 명준에게 물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빠이며 이름은 희애라고 둘러댄 명준은 빨리 로희의 부모에게 돈을 받고 아이를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전화를 해도 로희의 부모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밤에 몰래 로희의 집에 간 명준은 골목에 나와있는 동네 사람들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경찰들 사이에서 시신 두 구가 로희의 집에서 나오는 걸 보게 된다.



유괴의 시작은 자신의 아이를 위한 것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명준은 가난하고 배운 것이 별로 없지만 그래도 딸 희애를 잘 키우고자 애를 썼는데 아이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좋지 않던 가세는 기울어가기 시작했고, 그런 와중에 아내 혜은은 가진 걸 탈탈 털어 떠나버렸다. 그러고선 명준에게 이혼을 해달라고 서류만 보내왔는데, 바보처럼 착한 명준은 서명을 해주고 아이는 자신이 책임지기로 했다. 그런데 자꾸만 병원비가 밀려 간호사들 몰래 희애 얼굴만 보고 도망치는 생활을 계속 이어갈 때쯤 떠난 혜은에게서 연락이 왔다. 희애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로희를 납치하라는 지시를 하면서 말이다. 이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남자는 다른 집 아이를 납치한다는 죄책감이 일었지만, 희애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기로 한다.

하지만 로희가 사고를 당하면서 기억을 잃게 되었는데, 처음엔 그게 조금은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명준이 자신을 아빠라고 하면 믿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으니 11살 로희는 천재라고 소문이 난 아이였다는 것이다. 홈스쿨링을 하며 영재 학원에 다녔던 로희는 기억을 잃긴 했어도 명준이 자신의 진짜 아빠가 맞는지 의심했다. 그러나 명준의 왠지 쩔쩔매는 태도가 그럴듯하게 느껴진 건지, 로희는 그를 아빠라고 여기며 진짜 딸인 듯 허물 없이, 때로는 막무가내로 대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유괴범과 유괴된 아동에서 부녀로 바뀌게 되면서부터 유쾌함과 코믹함을 넘나들었다. 나름 납치극인데 이렇게 웃겨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장면들이 많았다. 로희가 천재이고 명준이 순박한 아저씨라는 캐릭터 특성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자 둘의 관계가 정립되었다. 똑똑한 로희가 명준을 이끄는 것으로 말이다. 로희가 기억을 잃었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까진 명준이 앞장섰는데, 기억이 되돌아온 후에는 로희가 명준에게 지시를 내리며 관계의 우위를 점했다. 그 모순적인 관계에 인간미가 있었기에 즐겁게 느껴졌다.

한편, 로희의 아빠 최진태는 뇌 관련 권위자이면서 병원장이었고, 엄마 소진유는 가정주부였다. 그 집에서 일하는 구옥분 여사가 휴가를 갔다가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의 시신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를 했다. 최진태는 자신의 서재에서 해동검도 진검으로 복부를 찔려 사망했다. 그리고 소진유는 얇은 슬립을 입은 채로 전기장판에 누워 죽어있었다.
곧이어 경찰은 구옥분 여사에게서 로희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아이를 찾는 일에 집중했다. 허술한 부분이 많은 명준이 이 부분에서 하필이면 CCTV에 찍히는 바람에 수배가 내려졌다. 혜은이 지시한 대로 로희를 납치했을 뿐 살인과는 상관없는 명준이 과연 기억을 잃은 로희를 데리고 잘 도망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납치범이 보일 행동의 정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던 명준은 로희에게 구박을 받을 정도로 허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잡히지 않기를 바랐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 최진태와 관련된 여러 비밀이 밝혀졌다. 최진태의 아버지이자 병원을 물려준 최억만과 보안업체 직원 박철원, 그리고 후반엔 깜짝 놀랄 만한 반전의 주인공까지 등장했다. 여기서 진짜 나쁜 사람은 반전의 주인공이었고, 로희의 아빠 최진태 역시 천하의 죽일 놈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너무나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들을 보며 명준이 좀 바보 같긴 해도 진짜 좋은 아빠라고 새삼 느끼게 됐다.

정해연 작가의 책은 여러 작가들과 함께 낸 앤솔러지만 읽어봤었다. 읽은 책이 단편이었던 터라 이 소설로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거라 말할 수 있는데, 소재와는 다르게 유쾌함과 따뜻함이 묻어나는 책이라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어두운 부분도 있어서 마음이 안 좋긴 했지만 그래도 대비되는 캐릭터인 명준과 로희의 호흡이 좋아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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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자신은 아이를 유괴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이의 부모가 죽다니. 대체 누가 죽인 걸까. 벌써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아이가 사라진 것도 알아낼 것이다. 경찰들이 아이를 유괴한 사람과 살인범이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할까? - P86

로희 부모의 사망을 알고 나서 명준은 아주 잠시나마 로희의 생존이 자신 덕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로희를 유괴하지 않았으면 누군지도 모를 살인마에게 이 작은 생명의 불빛이 꺼졌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저 자기 위안일 뿐이었다. 일이 어떻게 됐든지 간에 로희는 스스로 살아나왔고, 자신의 부모 옆이 아닌 이곳에서 울게 만든 것은 명준이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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