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대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6
최윤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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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근교의 도시에서 살고 있는 상미와 정우 부부.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정우는 현관문에 슬리퍼가 끼워진 것을 보고 S가 떠오른다. 상미, 정우, S 세 사람은 구름샘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기에 그의 습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부재 중일 때 상미가 S를 만났다는 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들어간 정우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은 듯한 거실 상황에 놀란다. 침대에 쓰러져 미약한 숨을 쉬고 있는 상미를 발견하곤 구급차를 불러 함께 타고 병원에 갔다. 상미에게 다량의 수면제가 투여된 상태라 호흡이 돌아오는 데 3일, 몸의 독소를 빼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결혼 10년 만에 찾아온 아기는 그렇게 유산되고 말았다.

정신이 든 상미는 아기를 잃은 허망함에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을 간호하는 정우로 인해 조금씩 회복이 되어간다. 정우는 여​행을 하자며 퇴원한 상미와 함께 차를 몰고 프랑스 시골 곳곳으로 떠났고, 아파트로 돌아온 뒤에 마음에 들었던 여행지로 다시 떠나 자리를 잡는다.



어린 시절, 상미와 정우, S 세 사람이 함께 살며 놀았던 구름샘 마을이 소설 도입에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리움이 물씬 담긴 찰나의 장면은 상미가 꾼 꿈이었다. 사촌지간인 정우와 S, 그들 사이에 낀 소녀 상미의 관계를 보여주는 듯했으나 사실은 태어났을 때부터 구름샘 마을에서 함께 자란 상미와 S 사이에 나중에 이사 온 정우가 그들 사이에 뒤늦게 합류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러나저러나 세 사람의 이야기라는 건 변함없었지만 예상보다 더 놀라운 사연이 숨어있었다. 당연히 소설은 처음부터 그 사연을 들려주지는 않았다.
시작부터 집에서 알 수 없는 큰 사고를 당한 상미를 보며 S가 현재의 사건과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그건 S와 전혀 관련이 없었고, 앞으로 밝혀질 비밀과도 무관했다. 현재 벌어진 사건으로 정우가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리도록 부채질을 해준 것뿐이었다.

무슨 사연이길래 정우는 수년 동안 S를 보려고도 하지 않으며 여기저기, 심지어는 다른 나라로까지 피해 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우로 인해 상미마저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떠돌아야 했다. 무슨 일 때문이건 정우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밝혀진 진실은 무슨 재연 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누군가의 경험인 것 같기도 했다. 술 마시길 좋아하는 성격 탓에 가끔씩 누군가에 쫓겨 이사를 해야 했던 정우의 아버지가 자신의 형이자 구름샘 마을의 유지였던 S의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오면서부터 비극은 예견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놀라웠던 건 정우가 그 비극을 도왔다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소설의 초점은 형제, 사촌 지간에 벌어진 사건보다는 그 사건으로 인한 결과가 언어에 미친 영향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떠난 뒤 아버지가 몸 져 눕고, 오래 지나지 않아 돌아가시자 S는 그때부터 말을 조금씩 더듬었다. 사건이 연거푸 일어나 S가 충격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직접적으로는 정우가 원인이었다. 믿었던 사람의 큰 배신은 S에게 말더듬증을 남기고 말았다.
반대로 가해자의 입장이었던 정우는 이후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무언의 입장을 고수했다. 해야 할 말을 하기보다는 말을 하지 않는 선택을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상미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 그가 비겁해 보였다. 더듬더라도 말을 하며 정우 형을 찾는 피해자 S와는 다르게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도망을 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언어에 담긴 무게가 새삼 느껴졌다. 말을 하는 것, 하지 않는 것, 더듬으며 하는 것에는 각기 다른 의미가 있었다. 어쩌면 정우에게 말이란 너무나 무거운 것이라 하지 않는 선택을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특히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랬기에 그가 결국 사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려 했던 방법은 언어를 수단으로 삼은 것이기는 하지만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인 방식이었다. 마음에 영 들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진실을 밝혔으니 정우의 입장에서는 큰 용기를 낸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초반에 보여준 분위기에서 예상할 수 있었던 전개를 완전히 벗어난 소설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언어라는 소재를 숨겨두고 이런 소설을 쓸 수 있구나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말이 주는 무게감을 생각해 보게 됐다. 몸짓과 눈빛으로도 언어가 통하긴 하지만, 때때로 소리 내어 말하는 언어에는 깊이가 있어서 진심이 담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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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년들의 목소리는 대체로 비슷하다. 때로 그 나이의 목소리에는 성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목소리는 소년들이 커가면서 변성기를 거치고 그들이 슬픔과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목소리도 변하고 구별되기 시작한다. 아주 후에. 그렇게 목소리에 존재가 담기기 시작한다. - P12.13

우리는 말을 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나란히 앉아 있어도 불편하지 않다. 너무 오래 같이 있었기에 할 얘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할 얘기는 많지만 그 얘기들은 해서는 안 되는 주제들이다. - P67

나는 알았다. 우리 셋 사이의 무언의 약속이 이때 완전히 깨져버렸다는 것을. 우리는 둘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셋일 때, 다수일 때 아름답고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지켜졌어야 했는데 정우도 나도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 그것은 변질되지 않을 수도 있는 명사의 사랑이고 그렇기에 멋진 동사들로 완결될 수 있었는데……. - P127.128

나는 느끼고는 있었지만 아직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아 말하지 못했지. 그래서 불행한 사건들은 일어나는 거야. 맘과 말 사이에 다리가 끊겨서 말이지. 인간의 많은 불행은 그렇게 시작돼. 우리의 말에 대한 감각은 퇴화됐거든.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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