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역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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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로 살아가기엔 너무나 젊은 남자는 이제 막 거리 사람들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돌아다니던 그는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역에 자리를 잡았다. 리모델링으로 반짝이는 신역사가 아닌 한편으로 밀려난 구역사 쪽이었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바람이 덜 미치는 곳에 자리를 잡아 박스를 깔고 잠을 청하려는 남자는 그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자신은 언제든지 이곳을 벗어날 거라며,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이라고 말이다.

아직 거리 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았을 무렵, 남자는 한 여자를 알게 된다. 잠을 청하는 그를 깨우며 쥐가 있다고 말하던 그녀는 술에 취한 듯 술 냄새가 났다. 쥐가 있든 말든 무시하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 남자에게 여자는 옆에서 자겠다며 그의 박스 위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렇게 온기를 나눈 밤이 지나고 여자는 남자의 캐리어를 가져가 버렸고, 그는 여자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역 광장과 주변을 돌아다닌다.




마지막까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남자를 보며 모두들 젊으니 이렇게 살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 같은 처지의 노숙자들은 물론이고 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하나같이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여기까지 내몰리게 되었는지 따위의 과정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보이는 그대로의 지금 모습만을 보고 사람을 판단했다. 어쩌면 거리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이렇게 되게끔 만든 과거보다는 살아가는 현재만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졌고 미래는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늘을 무사히 살아내는 것, 거리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남자는 자신이 있던 자리에 돌아갈 수가 없었기에 거리에서 생활하는 삶을 선택을 했다. 그가 다른 노숙자들과 달랐던 건 자신은 이 생활을 잠깐 할 거라고, 언제든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곳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남자와 같은 생각으로 그 세계에 발을 들인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작은 그랬을지 몰라도 마지막엔 다 같은 처지에 다다랐다.


남자가 그렇게 처음에 그들과 선을 그었으나 그 선을 넘어가게 만든 것은 역시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여자였다. 술에 취해 아무에게나 기대어 밤에 잠을 청하는지도 모를 여자는 남자보다 나이가 많았고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답게 볼품없었지만, 그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자의 온기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아침이 되어서야 퍼뜩 깨어나 캐리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안에 들어있는 전 재산 생각에 분노가 일어 여자를 찾아 나선다. 어디에도 없는 여자를 며칠 동안 찾아 헤매다 결국 맞닥뜨렸을 때, 남자는 여자에게서 무언가라도 받아내야겠다는 마음이 어느 순간 사그라들었다.
메마른 땅에 꽃이 피어나듯 황량하기만 했던 남자의 마음에 그녀를 향한 사랑의 싹이 텄다. 누군가의 온기가 한 사람을 바꿔놓았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일을 하지 않아도 그만이고, 지원센터의 강 팀장이 노숙자 중에 가장 어린 그의 편의를 봐줘도 신경도 안 쓰던 그가 그녀로 인해 바뀌기 시작했다. 미래 따위는 존재하지 않던 남자는 그녀와 함께 할 앞으로의 시간을 그리며 꿈에 젖어있었다.
관심과 온기, 그저 스치듯 하는 말이 한 사람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도 있었다. 절망뿐이던 앞날에 희망이라는 게 생겼다.

하지만 여자는 거리에서 생활한 지 너무나 오래되어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알코올중독 증세가 심해 복수가 차오르고 있었다. 처음에 남자는 여자 없이 사는 삶을 버텨내기 어려워 그녀가 멀리 요양원으로 보내졌을 땐 기어코 곁에 두려고 안달을 했다. 여자의 아픔이나 안위를 걱정하는 것보다는 바닥으로 떨어져 기댈 곳 없는 자신이 유일하게 필요한 자리가 그녀의 곁이라고 맹신했다.
여자 없이 버텨내던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요양원에서 도망쳐 거리로 되돌아오자 남자는 보통의 사람처럼 살아내려고 노력했다. 마치 그 모습은 스스로를 대견스러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리에서 생활할 정도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마음만 먹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일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살필 수 있다는 자기 위안이었다.
그러다 여자의 병세가 심각해졌을 땐 어쩔 수 없이 그녀보다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때가 되었을 땐 그토록 애가 타던 사랑은 꺼져버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듯이 말이다.

거리에서 생활하는 두 남녀의 관계가 시작되었을 때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가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질할 거리에서의 섹스는 사람이 아닌 동물의 본능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살과 살이 닿으면서 뜨거운 피가 돌아 사랑이라 느끼게 되어 애틋한 사랑처럼 보인 찰나의 시간이 지난 이후엔 짐이 되어버린 관계는 사랑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붙잡고 있었던 끈으로만 보였다. 거리에서의 외로운 삶, 고독한 삶, 모든 이가 피하기만 하는 삶에 거리낌 없이 다가와 준 여자에게 자기만족을 위한 족쇄를 채운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랬기에 종내에는 그녀의 아픔을 외면했고, 자신의 삶을 한 번 버리고 거리로 나온 것처럼 여자 역시 버리고 외면할 수 있었다.

두 남녀의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한)을 소재로 한 소설인데 읽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들이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보다는 너무 본능적이고, 지독하고, 절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거리의 삶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불편했다. 결말까지 그렇게 되어 씁쓸한 뒷맛만이 남았다.


우리가 나누었던 건 사랑이 아니라 버리고 다 버려도 끈질기게 남아 있는 본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뭔가를 먹고 배설하는 것처럼 숨쉬는 동안에는 버릴 수 없는 동물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런 본능과 욕구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나.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닌가. - P166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나를 가장 많이 동정해온 건 바로 나인지도 모른다. 아니,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나 자신에게 한없이 너그러워진 건지도 모른다. 유령처럼 광장을 떠도는 저 사람들처럼 나는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불쌍해하면서 망가지는 나를 그냥 내버려두는 건지도 모른다. - P176

누군가에게는 삶이 끔찍하지 않을 수도 있을까.
나는 되묻고 싶어진다. 삶이 이토록 끔찍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 생각도 한다. 정말 끔찍한 건 삶이 아니라 죽지 않고 꾸역꾸역 견디고 있는 스스로를 지켜보는 것이라고. 내가 얼마나 더 구차해지고 비참해질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보다 끔찍한 것은 없다고 중얼거린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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