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제린
크리스틴 맹건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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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탕헤르.
충분히 잘 알지 못하는 존과 결혼하는 것으로 현실에서 도망치듯 영국을 떠나 존이 사랑하는 도시 탕헤르에 자리를 잡은 앨리스는 도무지 이곳을 좋아할 수가 없다. 너무나 더운 날씨는 안 그래도 심신이 지친 앨리스를 더욱 쇠약하게 만들었다. 앨리스는 존이 나가자고 해도 어떤 거부감 때문에 외출을 하는 일이 드물었기에 존 혼자만 밖으로 나돌았고, 그로 인해 앨리스는 건너 건너 모두가 친한 사람인 듯한 탕헤르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존은 앨리스의 부모님이 남기신 유산으로 매달 들어오는 일정 금액을 알아서 쓰며 돌아다녔는데, 앨리스는 그 문제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존이 나가고 아파트에 홀로 머물던 앨리스는 미국에서부터 탕헤르까지 자신을 찾아온 루시의 방문을 받는다.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루시는 앨리스를 잊지 않았다. 루시는 앨리스의 소식을 알기 위해 날마다 애를 썼었고, 마침내 우연한 기회를 통해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 순간 곧장 탕헤르로 왔다. 앨리스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해 기대하던 그녀를 마주했는데, 자신이 알던 대학 시절의 앨리스와는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루시는 앨리스가 변하게 된 원인이 남편인 존에게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루시는 대학 시절의 생기 넘치는 앨리스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해주고 싶다.



대학 1학년 신입생 때 처음 만나 룸메이트가 된 루시와 앨리스는 여태껏 살아온 인생이나 가정 환경, 심지어는 옷을 입는 스타일까지 완전히 달랐지만 만나자마자 단짝이 되었다.
소극적인 여성성을 강조하던 1950년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었던 앨리스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 유산을 물려받아 법적 후견인인 고모의 관리하에 여유롭게 지내고 있었는데, 부모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 죄책감의 깊이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워서 한때 고모는 심각하게 여겨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자유분방한 루시는 부모님의 죽음에 관한 부분만은 앨리스와 같았다. 하지만 그녀와는 달리 루시는 가난했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지 못했더라면 대학은 꿈도 못 꿀 처지였다. 다른 학생들은 장학금을 받는 루시를 업신여겼지만 앨리스만큼은 진심으로 친절하게 대해줬기 때문에 단짝이 될 수 있었다. 다만 루시는 앨리스에게 언제나 진실만을 말했던 건 아니었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부터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지내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아마도 두 사람 모두 졸업은 하지 못한 4학년이 지나고 1년여의 공백 뒤에 다시 마주하게 된 앨리스와 루시는 겉으로는 오랜만에 재회한 반가운 친구처럼 보였으나 속으로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앨리스는 루시가 찾아온 의도에 대해 궁금해하는 한편으로 왠지 두려움과 기대감이 반반씩 섞인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루시는 처음부터 앨리스를 만나 함께하는 게 목적이라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앨리스의 통장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아먹는 파렴치한 남편 존과 루시가 탕헤르에 도착했을 때 마지막까지 귀찮게 하며 가이드를 자처한 의문의 남자 유세프(조제프)가 있었다.
탕헤르에서의 현재가 진행되면서 대학 시절의 과거를 종종 이야기했는데, 초반부터 그 시절에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이 떨어져 생사를 모르고 지냈다는 걸 알려줬다. 그 사건이 어떤 것이었는지 중반 이후 서서히 드러나 마침내 완전히 밝혀졌고, 그 사건 이면에 어떤 비밀이 숨어있었는지까지 이어졌다.

소설은 앨리스와 루시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오갔기 때문에 두 사람이 현재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혼란과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던 앨리스였고, 친한 친구에 대한 애정이 광적인 집착으로 이루어진 루시를 보여줬다. 두 여성의 관계성은 살아온 환경에서 기인될 수밖에 없었다. 루시는 어렸을 때 스스로 글자를 깨치고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발버둥을 쳐야 했다. 어렸을 때의 환경이 루시를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반면에 안온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갑자기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부모를 잃은 앨리스는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어릴 땐 부모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게 당연했지만 그들을 잃은 후에는 고모에게, 고모에게서 떨어져 대학에 왔을 땐 루시에게, 그리고 한때 너무나 사랑했던 톰에게, 현재엔 남편 존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문제는 앨리스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루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고, 루시는 1년이 넘도록 찾았던 앨리스를 우정보다 조금 더 깊이 사랑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자기 자신이 우선이었다. 머리가 좋은 루시와 지치고 심약해진 앨리스 중 어느 쪽이 우세한지는 너무나 뻔했다. 시작부터 한 발 이상 앞선 루시를 앨리스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루시가 탕헤르에 도착했을 때부터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고 주의 깊게 관찰한 후에 어떤 일을 벌였는지는 유세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5부작 소설 주인공인 톰 리플리가 떠올랐다. 영어를 사용하는 동성의 두 주인공이 이국적인 나라에서 한쪽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벼랑 끝에 다다르게 한다는 점이 그랬고, 가장 중요하게는 거짓말에 능숙하다는 것이었다. 루시와 리플리 두 사람 모두 머리가 좋기 때문에 거짓말을 계속해서 할 수 있었지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는 점에서 루시가 한 수 위였다. 어찌나 여유롭게 모든 일을 처리하고 행동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앨리스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을 테지만 마지막까지 루시는 정말 완벽했다. 그래서 매력적이었고, 또 무서웠다.

이 소설은 이미 영화화가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조지 클루니의 영화 제작사에서 판권을 구입했고,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한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매혹적인 루시 역할을 맡게 되지 않을까 싶다. 역할에 너무나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베닝턴에서의 마지막 해에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것은 결국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아무리 멈추고, 바꾸고, 다시 쓰려고 해도 시간은 아랑곳없이 그저 흐를 뿐이다.
지극히 단순하게도,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 P60

by. 앨리스
루시에 대한 나의 감정은 이를테면 이런 느낌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했다─평범한 우정보다는 조금 더 날카로운 어떤 것, 나를 압도할까 봐, 어쩌면 나를 파괴할까 봐 두려운 어떤 것. 때로는 그녀를 원한다기보다는 그녀처럼 되고 싶은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두 감정은 너무도 강렬하고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었지만 끊임없이 합쳐지고 뒤섞여서 어느 순간 그 둘을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P118

by. 루시
지금껏 내가 했던 모든 일,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를 한 번 더 찾아내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함께할 수도 있을 삶을 위해.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나는 앨리스에게 얘기하고 싶었고, 그녀 역시 그 사실을 깨닫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완벽한지를. 탕헤르, 앨리스, 낯선 도시에 함께 있는 우리. - P141

나는 이곳에 왔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곳을 떠나고 있었다. 그 변신은 재탄생을 통해 이루어졌고, 따라서 죽음은 그 과정의 일부일 수밖에 없었다. 본질적으로 그 둘은 연결되어 있었다. - P33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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