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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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허니처치는 사촌 언니 샬롯과 함께 피렌체 여행을 왔다. 그런데 도착한 숙소인 펜션에서 방을 잘못 주는 바람에 기분이 잔뜩 상했다. 전망 좋은 남쪽의 붙어있는 두 방을 주기로 해놓고 북쪽에 전망도 안 좋은, 서로 멀리 떨어진 방을 내줬기 때문이다. 식사를 하는 식당에서 이런 불평에 관한 대화를 들은 다른 투숙객 에머슨 씨가 자신과 아들 조지의 방과 바꿔주겠다고 말했다. 자신들은 남자라 전망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루시의 보호자인 샤프롱으로 여행에 동행하게 된 샬롯은 표면상으로는 낯선 남자의 호의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어서 거절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 노신사의 행색부터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루시가 사는 곳의 교구로 올 예정인 비브 목사를 펜션에서 만나 그의 중재 덕분에 전망 좋은 방으로 바꾸게 된다.

 

루시는 몸이 안 좋은 샬럿 대신 펜션 숙박객과 함께 관광을 나섰다가 졸지에 버려지고 만다. 일행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루시를 잊어버리고 떠나는 바람에 혼자 남겨져 어쩔 줄을 몰라하는 그녀 앞에 에머슨 부자가 나타났다. 덕분에 루시는 안심을 하고 성당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고, 에머슨 씨에 대한 인상이 보기와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반면에 조지는 뭔가 예민한 느낌이 들어 꺼려지는 청년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우연히 일어난 사건으로 두 사람 사이에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만큼 어떤 기운이 감돈다. 그리고 펜션 투숙객과 목사 두 명과 함께 마차를 타고 소풍을 나갔던 날, 제비꽃이 흐드러지게 핀 곳에서 조지가 루시에게 키스를 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든 서로를 잊을 수 없게 된다.

 

 

 

1908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아직 계급이 존재하던 사회였다. 거기다 주인공들은 모두 영국인이었는데, 현대에는 사라졌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는 국가가 배경이었으니 100여 년 전엔 더 심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의 여자는 누군가에게 예속되어야만 했다. 루시는 혼자 여행할 수 없는 젊은 아가씨였기 때문에 "샤프롱"이라는 명칭의 보호자인 사촌 언니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고, 집안에서는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어머니께, 그리고 나중엔 남편에게 예속된 삶을 살아야 했다. 여성에겐 자주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하지만 루시는 그 시대의 여성보다는 현대의 여성에 가까웠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했고, 보고 싶은 걸 보려고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시대가 여자를 바라보는 눈이 너무나 엄격해서 루시는 원하는 걸 쉽게 할 수 없었다. 루시가 베토벤의 곡만 연주한다고 주변에서 예민하니 어쩌니 왈가왈부하는 걸 보며 피아노 연주 하나도 제 마음대로 못하는 삶이 너무 답답했다. 물론 루시는 자기가 치고 싶은 곡 외에 다른 곡은 연주하지 않았다.

 

이런 루시에게 푹 빠지게 된 조지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무뚝뚝해 보이면서 신사다운 면이 있었고 예의도 바른 모습을 보여줬다. 소심한 것 같으면서도 루시에게 갑자기 키스를 하는 모습에서는 저돌적인 면이 있어서 딱히 어떤 타입의 사람이라 정의 내릴 수 없었다.

반면에 루시에게 세 번이나 청혼을 해서 허락을 얻어낸 세실은 딱 그 시대, 구시대의 남자였다. 허니처치가로 돌아온 루시에게 한 세 번째 청혼이 받아들여지자, 집안의 가구를 바꿀 생각 먼저 했다. 돌아가신 루시의 아버지가 남긴 것이라 어머니도 손을 대지 않고 있는데, 감히 예비 사위 따위가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다니 너무 속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실은 도무지 굽힐 줄을 몰랐고, 싫은 건 절대 안 하는 사람이었다. 루시의 동생 프레디가 짝을 맞춰 테니스를 치자고, 못 해도 괜찮다고 하는데도 자기는 테니스를 안 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이 테니스를 칠 때 옆에서 책을 읽으며 이 부분은 꼭 들어봐야 한다고 읽어주며 듣기를 강요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너무 싫은 타입이었다.

이런 사람이 청혼을 받아들인 루시를 어떻게 대할지는 안 봐도 훤했다. 그나마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서 그렇지, 다 뜯어고치려고 이미 계획을 다 짜두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루시가 어쩌다 이런 사람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됐는지 의문이다. 직업이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겉만 번드르르 한 남자인데 대체 무엇을 보고 그와 약혼까지 하게 됐을까. 아무래도 시대의 영향이 적잖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루시가 아무리 깨어있는 여성이었다고 할지라도 주변 사람들은 아직까지 구시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랬을 테고, 함께 여행하는 동안 샬럿에게 들은 잔소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루시는 마음이 없다는 걸 깨닫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세 번이나 청혼하는 남자를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청혼을 받아들인 이후에 루시는 세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좋은 면만 보려고 애를 썼다. 그의 행동이나 표정, 말투에서 훤히 드러나는 남을 향한 멸시를 보고도 못 본 척, 애써 모른 척했다.

 

하지만 다행히 세실이 타인을 습관적으로 무시하는 버릇 때문에 피렌체를 떠난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었던 루시와 조지가 재회하게 된다. 역시 사랑은 삼각관계가 되어야 재미있듯, 조지가 등장한 이후로 어찌나 스릴이 넘쳤는지 모른다. 특히 테니스를 친 후 세 사람만 남았다가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세실이 안 볼 때 조지가 루시에게 키스하는 장면은 짜릿했다. 들키면 난리가 나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더 흥미진진했다.

그 후에는 여러 사건들이 한꺼번에 몰아쳤고, 순진한 루시가 제 마음도 모르고 괜히 고생할 뻔하는 과정도 이어졌다.

 

이 소설은 두 번째 읽는 거라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초반에 방을 바꿔준 부분과 해피엔딩인 결말 외에 중간 내용은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심지어 세실이 어떤 인간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워낙 밉상 캐릭터라 잊을 수 없었을 텐데 예전엔 대체 책을 어떻게 읽은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행스럽게도(?) 과정이 기억나지 않았던 덕분에 읽는 동안 심장이 콩닥거렸다. 조지가 루시에게 키스하는 두 번의 장면이 어찌나 로맨틱했는지 모른다. 문장 자체가 너무 아름다워서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루시가 세실을 보면 "전망이 없는 방"이 떠오른다고 했던 부분은 너무 웃기고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라 감탄했다.("갑갑"보다는 "깝깝"한 세실.)

 

고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예스러운 분위기의 로맨스 소설이라 좋았다. 피렌체의 풍경이나 허니처치가의 자연 친화적인 저택, 숲 등의 배경을 상상하며 읽으니 더욱 로맨틱했다.

책을 읽었으니 80년대에 제작된 영화도 나중에 꼭 챙겨 봐야겠다.

 

 

 

인생은 정리하기는 간단하지만 실제로 살기는 혼돈스러우며, 우리는 언제나 <신경>이라든가 다른 피상적인 말들로 내면의 욕망을 가려 덮으려고 한다. 그녀는 세실을 사랑했다. 조지는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누가 그녀에게 두 문장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해 줄 것인가? - P176

「그 사람은 여자에게 결정권을 주지 않아요. 유럽을 천년 동안 붙잡아 매둘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는 매 순간 당신을 자기 뜻대로 빚어내고, 당신이 어떻게 해야 매력적이고 흥미롭고 여성스러울 수 있는지 가르쳐 줄 겁니다. 남자가 생각한 여자다움을 말이에요.
(……중략)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보다는 제 사랑의 방식이 더 낫다고 확신합니다. 맞아요……. 제 방식이 더 낫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품에 안겨서도 당신 자신의 생각을 하기를 원합니다.」 - P204.205

조지는 그녀가 도착하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동안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빛나는 기쁨을 보았고, 꽃들이 그녀의 드레스로 말려들어 푸른 파도를 일으키며 부딪치는 것을 보았다. 위쪽의 덤불숲이 닫혔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 P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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