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열다섯 살이 된 초희의 함이 들어오는 날 비가 내렸다. 초희의 아버지 허엽은 물론 어머니 김 씨도 내리는 비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미신을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비가 내렸어도 무사히 함을 받고 손님맞이를 치르고 난 깊은 밤, 누군가가 안채 용마루에 올라 시가에서 보내준 초희의 녹의홍상을 찢어발겼다. 잠을 이루지 못해 잠깐 나왔던 초희가 그 모습을 보았고, 둘째 오라비 허봉의 친구이자 초희를 남몰래 사모하는 최순치, 그리고 친구를 따라 나온 허봉과 부모 역시 목격했다.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초희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집안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어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입단속을 해 초희는 세도가 안동 김씨 집안의 성립과 혼인을 한다. 성립은 혼례를 치르는 내내 주눅이 들어 있더니 합방을 한 첫날밤에 혼자 술을 마시고 뻗어버렸다. 그 후 집을 떠나 시가로 향한 초희는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을 고깝게 여기는 시어머니 송 씨의 시집살이를 묵묵히 받아내며, 과거 시험에 번번이 낙방하면서도 학문에 매진하기는커녕 기생집에나 드나드는 남편 성립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짧은 생을 살아간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명문가 여식에 천재 소리를 들었던 시인이긴 해도 당시 여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았으나 대사성을 지낸 아버지 허엽과 이조좌랑이었던 둘째 오빠 허봉,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 동생 허균이 있었기에 허난설헌의 기록이 조금은 남아있었던 것 같다.

당호 외에 본래 이름은 초희이고 15살에 김성립과 혼인 후에 무지막지한 시집살이를 견뎌냈다. 뱃속의 아이를 유산한 일이 있었고, 얼마 품어보지도 못한 딸과 아들을 너무 어린 나이에 차례로 떠나보냈다. 자식을 앞세운 슬픔을 견디지 못했었는지 그녀는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에 세상과 이별했다. 기록에만 있는 사실은 이렇게 간략했을지라도 혼인 후 12년 동안의 고통스러운 삶이 얼마나 그녀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을지 왠지 예상할 수 있었다.

 

허난설헌의 친정은 교육에 자유로운 편이었다고 한다. 당시엔 사대부 자제라고 할지라도 딸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녀는 초희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8살에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시를 지은 여동생의 재능을 알아본 둘째 오빠 허봉이 자신의 친구이자 당시 유명한 시인 손곡 이달에게 초희와 균의 교육을 부탁했다고 한다.

이렇게 열다섯 살 때까지 서책을 읽고 시를 지으며 자유롭게 살던 그녀가 혼인 후에는 완전히 반대되는 억압된 삶을 살게 됐으니 답답한 게 당연했다.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혼인 후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게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부인의 넘쳐흐르는 천재성을 시기하는 못난 남편(놈)과 여인이 글을 쓰는 걸 아니꼽게 본 시어머니가 있어서 허난설헌은 재능을 억누르며 살 수밖에 없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자잘한 이야기들은 모두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소설이었다. 전기 실화가 아닌 팩션(Faction)이라 어느 정도는 꾸며낸 것이라는 걸 감안하고 읽었다.

그럼에도 몇몇 부분은 읽으면서 분통이 터졌다. 시어머니의 악행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했는데, 당시 시대상을 생각하면 짜증 나긴 하지만 감안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문제는 남편 김성립이었다. 이 인간은 혼인하기 전에도 학문을 제쳐두고 노느라 과거에 낙방을 한 전적이 있던 터라 혼인 후에 새사람이 되어 과거에 붙을 리가 없었다. 남편이 공부를 안 한다고 아내가 닦달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괜히 초희만 시어머니에게 트집이 잡혀 사람이 잘못 들어왔단 식의 개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와중에 김성립은 자격지심까지 있어서 고매한 부인을 시기하기나 했다. 능력도 없는 게 자존심만 센 경우였다.

어떻게 이런 인간과 허난설헌을 혼인시켰는지 너무 열이 받았다. 이런 놈 말고 가풍이 비슷한 집안과 맺어졌다면 허난설헌은 재능을 마음껏 펼치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안타깝고 슬프다.

 

아름답게 피어 짧게 진 꽃 같은 허난설헌의 삶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에서 살아가는 여인들의 신산한 삶도 말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딸에게는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는 것은 허난설헌이 낳은 큰딸에게도 해당되는 부분이었다. 해산 후에 돌아온 시가에서 딸에게 항렬이 붙은 이름을 지어줬다며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여인은 글도 배우지 못하고 재능이 있어도 감옥 같은 집에 갇혀 오랫동안 외롭고 또 괴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는 게 가련했다. 사대부 집안의 허난설헌이 이 정도로 살았으니 그녀보다 낮은 신분의 여인들은 얼마나 더 박복한 삶을 살았을까 싶다. 이런 이유로 읽는 내내 슬프고 안타깝고 또 화가 나기만 했었나 보다.

 

허난설헌이 허균의 누나라는 사실과 당대 여류 시인이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삶을 살다 금세 떠나버렸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해서 좀 부끄럽다. 사실에 바탕을 둔 창작 소설이라고 해도 실제 인물을 향한 작가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다는 게 느껴져서 읽는 동안 나도 같은 마음으로 그녀의 삶에 흠뻑 빠졌었다.

머물지 않고 흐르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웠다. 고여 있지 않아 늘 새롭고 싱싱하다. 그미도 때때로 흐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을 느꼈다. 청정한 상태로 머물다가 언젠가는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 공기 중에 떠도는 한 톨의 먼지가 되어 하늘로 스며든다는 것은 얼마나 신비하고 아름다운 현상인가. - P99.100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좁은 마당에 나무 한 그루 없다. 그미는 절로 숨길이 떨려 나온다. 나무, 풀, 꽃들, 새들의 재잘거림. 그들이 전하는 계절의 수런거림을 가슴에 적시며 살아왔다. 여긴 아무것도 없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고 조정하는 칼빛 같은 법도와 명령만이 좁은 집안을 횡횡거릴 뿐이다. - P132

울컥 서러움이 복받쳤다. 아이한테 이름을 준 것이 그리 부당한 노릇이란 말인가. 이름 없이 평생을 살아가는 이 나라 여자들이 측은하고 가여워 가슴이 빠개지는 것 같다. - P199

그미의 눈가에 눈물이 핑그르르 어린다. 겹겹이 감추고, 숨기고, 억압하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순수한 본성까지도 작은 틀 속에 가두려는 제도와 인습이 문득 진저리쳐진다. 내 어찌 이 땅에 아녀자로 태어나 이 작은 틀 속에 갇힌 신세가 되었던고.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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