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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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26살 유부녀 로자는 어려서부터 살던 베를린을 떠나 남편 그레고어의 부모 요제프와 헤르타의 시골집에서 살고 있다. 결혼 후에도 베를린에서 살다가 그레고어가 군대에 입대하면서 로자는 어머니의 집에서 머물렀었다. 공습경보로 지하실에 숨었던 어느 날 밤, 폭격을 당했는데 그 사건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없어진 로자는 시부모의 집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시골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을 무렵, 나치 친위대원이 시부모의 집에 찾아와 로자 자우어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총통이 로자를 필요로 한다며 다음날 아침 8시에 올 테니 준비를 하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영문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앞서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지만 갈 곳이 없었고, 자신이 도망치면 시부모에게 해를 입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받아들인 로자는 다음날 아침 집 앞에 찾아온 버스에 올라 모르는 여자들과 함께 근처 병영으로 이송됐다. 총 10명의 여자들과 병영 내 식당에 도착하자, 친위대원들은 앞으로 그녀들이 히틀러의 하루 세 끼 식사에 독이 들었는지 먼저 맛보는 시식가가 되었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 실제로 히틀러의 음식을 시식하던 여자들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15명의 여자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마고 뵐크의 기사가 2014년에 실린 것을 보고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했다. 96살이 되어서야 진실을 고백한 마고 뵐크 여사는 작가가 그때의 이야기를 듣고자 수소문을 하던 사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에 대표적인 설정만을 제외한 나머지 내용은 작가의 창작이었다.

 

인류에게 많은 피해를 안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여태까지 읽어온 2차 세계대전 소설과는 다르게 독일인의 시선으로 전쟁 중의 삶을 보여준다는 게 신선했다. 로자와 그레고어는 독일인이었지만 나치에 옹호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로자의 아버지가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딸인 그녀 역시 자연스레 나치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같은 생각을 가진 그레고어와 더 마음이 잘 맞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레고어는 히틀러를 위해서가 아닌 국가 독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군대에 입대를 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되었어도 아기를 갖고 싶다는 로자의 말에 응하지 않은 채 떠나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에는 약간의 애증이 있었다. 그레고어를 사랑하고 그의 분신인 아이를 낳기를 열망했지만 배반당했으니 말이다.

 

로자가 히틀러의 시식가가 된 이후, 같은 신세의 여자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걸 보며 왠지 모르게 안쓰러웠다. 자신이 베를린에서 입던 옷을 보며 예쁘다고 말하는 울라에게 선물로 줬고, 얼마간 주방 보조로 일하느라 주방장에게 약간의 음식을 받은 걸 알게 된 아우구스티네가 우유를 훔쳐달라고 말하자 두렵지만 도둑질을 했다. 유일하게 엘프리데만은 그녀의 행동을 나무라며 싸늘한 눈초리를 보냈다.

어쩌면 로자는 그레고어가 떠나고 어머니마저 폭격으로 죽은 뒤, 전쟁 중에 혼자라는 사실이 사무치게 외롭고 괴로웠던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같은 신세인 시부모의 집에서 살았던 것이고,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그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뱃속의 허기를 사람의 온기로 달래려고 했다.

그러다 그레고어가 실종됐다는 편지를 받은 후, 병영에 새로 온 치글러 중위와 살을 섞는 관계로 발전한 것 역시 비슷한 의미였다. 밤중에 시부모의 집 앞에 찾아오는 치글러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남편의 대용품이었다. 실종됐다고는 하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남편을 향한 애타고 달뜬 사랑을 그에게 해소했다. 그리고 치글러 역시 가족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로자와의 관계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라는 비현실적인 상황에서라도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가 필요했다. 시부모 요제프와 헤르타는 서로가 있었고, 같은 시식가인 여자들은 아이들 혹은 친구, 가족이 있었지만 로자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아기는 그레고어가 거부했고, 그의 실종 후에는 그녀에게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로자는 이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처음엔 치글러와 살을 섞고 시부모 집 헛간에서 주기적인 만남을 가지는 모습을 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책을 그만 읽을까 했었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로자는 전쟁 이전의 평범한 삶이 고팠기 때문에 사람 사이의 관계만이 허기를 채워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보였다. 자신을 베를린 토박이라 부르며 비꼬고 비록 도둑질을 시켰을지라도 시식가인 그녀들과 친구가 되려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녀들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전쟁 말미에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걸 느낀 히틀러를 위한 시식가들이라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실화 중에 아직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겠다. 매해 한 번은 새로운 비밀을 알게 되는 것 같다.

읽으면서 또 하나 놀라웠던 건 나치 대령이었으나 히틀러의 만행에 충격을 받아 반나치주의로 돌아섰다는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라는 실존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로자와 한 번 마주쳤던 사람인데 후반에 갑자기 다시 등장해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두고 나오는 장면을 읽고서 궁금해 찾아보니 실화라고 나왔다. 쉽지 않은 행동이었을 텐데 대단한 사람이었다.

 

허구와 실화를 적절히 섞어 전쟁 중의 삶과 시간이 흐른 후에도 전쟁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삶을 생각해보게 만든 소설이었다.

우리들, 히틀러의 하녀들은 어느덧 게걸스레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음식을 다 먹은 뒤 포만감을 느끼는 순간 기쁨은 사라졌다. 음식이 가득 찬 위의 무게가 심장을 억누르는 것 같아서 식사 후의 연회장 분위기는 항상 우울해졌다. - P70

히틀러에 대한 내 분노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기인했다. 그는 내 남편을 앗아갔고 나는 매일 그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감수해야 한다. 나는 내 생명이 그의 손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증오했다. 히틀러는 내게 일용할 양식을 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죽을 수도 있었다. - P248

나는 그리움의 대상이 없는 향수병을 앓았다. 그레고어에 대한 그리움만은 아니었다. 나는 삶이 그리웠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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