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릭스와 크레이크 미친 아담 3부작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미래의 어느 해안가.

눈사람이라 불리는 남자는 벌거벗은 채로 수영을 하며 해안가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그 아이들을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해서 옷이 필요 없다. 이전에 본 적 없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눈사람에게 와서 그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많은 단어의 뜻 역시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눈사람이 아이들에게 설명을 하려면 단어를 잘 골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 문장에 몇 번이고 질문을 받아야 한다. 아이들의 피부색은 모두 다르지만 눈동자만은 똑같이 초록색이다. 아이들은 완벽하게 매끄러운 몸을 가졌고 벌레에게 물리지 않으며 눈사람처럼 동물의 습격도 받지 않는다.

그들은 눈사람의 친구 크레이크가 만들어낸 "크레이커"들이다.

 

당연히 눈사람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지금과는 달리 지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지미가 가족들과 조합 내에서 살던 시절, 글렌의 부모가 조합에 스카우트되어 이사를 왔고 곧 학교를 같이 다니게 됐다. 지미와 글렌은 함께 어울리며 많은 게임을 했는데, 둘이 즐겨 하던 게임의 암호명이 티크니, 크레이크였기에 서로를 곧잘 그렇게 부르곤 했다.

어린 나이에도 똑똑하고 통찰력이 있던 크레이크는 좋은 대학을 졸업한 뒤, 가장 강력한 조합 중 하나인 "되젊음 조합"에 취직해 오랫동안 꿈꾸던 이상을 실현한다.

 

<시녀 이야기>로 여성을 아기 낳는 도구로만 취급하는 무시무시한 디스토피아 소설을 썼던 마거릿 애트우드의 또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2003년에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2008년에 <인간 종말 리포트>라는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이번에 원제와 같은 제목의 3부작 소설로 다시 출판됐다.

 

현재의 눈사람이 크레이커들을 돌보고 있고, 그가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남은 이전 세대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그러나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처음부터 설명해 주진 않았기 때문에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현재와 과거의 시점도 왔다 갔다 했기 때문에 얼마간 적응을 해야 했다.

 

과거의 지미는 하나의 문명 도시라고 부를 수 있는 여러 "조합" 중 하나에 살았다. 아버지는 조합 내에서 유전자 조작을 이용해 돼지의 몸에 사람의 장기나 뇌 등을 배양하는 "돼지구리"의 설계자였다. 돼지구리 외에도 온갖 동물들의 유전자를 조합하고, 종끼리 결합하여 인간을 위한 새로운 동물을 만들어내는 그런 시대였다. 인간 외에 다른 생명체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세상이었다. 그런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는 이유 때문인지 안전하지 않은 평민촌에 비하면 조합은 살기 좋은 곳이었지만, 뭔가 인간다운 면이 없다고 느껴졌다.

 

지미의 인생에 중요한 무언가를 남긴 건 첫 번째로 어머니가 도망친 사건이었고, 두 번째는 크레이크와 친구가 된 청소년기, 세 번째는 크레이크와 함께 일하게 된 성인 시기였다.

지미의 아버지와 함께 일했었던 어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유전자 조합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녀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조합 내에서 도망쳤고, 그 일로 인해 아버지와 지미에게 시체보안회사 요원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지미가 크레이크와 만나 함께 어울리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이 마침내 실현된 모습을 보며 굳은 사상을 가진 천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느낄 수 있었다. 인류와 지구를 위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으나,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 그가 만든 환희이상 알약은 인간의 성적 충동을 억제시키고 반대 작용도 할 수 있으며 성병으로부터의 보호와 피임의 효과도 있었다. 그 약을 통해 인류 증가와 감소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라디스 프로젝트로 아프지 않고 죽지 않는 불멸의 크레이커도 만들어냈다. 이제 막 말을 배워서 무지한 아이처럼 보이던 크레이커가 인류 진화의 최선이었다.

눈사람이 크레이커를 돌보는 현재 시점을 읽을 때마다 진화가 아닌 퇴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전자가 조작된 동물들의 공격을 받지 않고 불멸의 신체를 가지고 있어도 뇌가 깨끗한 도화지 같아서 문명을 가진 인류이라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레이커들을 돌보는 이전 세대의 유일한 인간인 눈사람은 자신과 같은 존재가 없었기에 기억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기억은 어린 시절 아동 포르노 사이트에서 본 오릭스였다. 대학에 가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만은 잊을 수 없었는데, 크레이크와 함께 일하게 되면서 성인이 된 오릭스를 만나 깊은 관계가 됐다. 하지만 오릭스는 크레이크에게 매인 몸이기도 했기에 지미의 질투는 끝을 모르고 모두가 끝난 그 순간까지 이어졌다.

크레이크와 오릭스, 지미 사이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기에 그가 아직까지도 그때를 회상하는 건지도 몰랐다.

 

작가의 말과 옮긴이의 글을 제외하고 소설 내용은 621페이지인데, 500페이지가 다 되어서부터 본격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꽤 오랫동안 버티면서, 종말 이후라는 것만 알뿐 대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읽은 셈이었다. 그러다 전염병이 빠르게 퍼지고, 그 전염병에 음모가 있음을 알게 된 후 마침내 현재의 눈사람이 크레이커들을 돌보게 된 상황에 이르렀는데, 마지막에 상상도 못했던 존재가 나타나면서 괜히 3부작 소설이 아니란 걸 느꼈다. 600페이지가 넘는 기나긴 프롤로그를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거대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푹 빠졌다가 나온 느낌이다. 작가가 소설 안에 만들어놓은 새로운 설정이 지금 지구에서 일어나는 온갖 현상의 부정적 결과인 것만 같아 무시무시했다. 크레이크가 만든 신인류 크레이커 역시 존재 자체가 뭔가 섬뜩하기도 했다. 눈사람 혼자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 장면이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다음 시리즈를 얼른 읽어야겠다.

나는 너희의 과거다, 죽은 자의 땅에서 온 너희의 조상이다. 이제 나는 길을 잃어 되돌아갈 수 없다. 여기에 남겨졌다. 나는 혼자다. 나를 들어가게 해다오! - P181

"이건 잘못됐어요, 조직 전체가 잘못됐다고요, 도덕적으로 타락한 곳이에요. 당신도 알고 있겠죠.
(……중략)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연구는, 그 돼지 두뇌 연구 말이에요, 생명의 기본 요소를 방해하고 있어요. 그건 비도덕적이에요. 그건…… 신성모독적인 행동이라고요." - P96.97

"종 전체를 놓고 볼 때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처해 있어. 전문가들이 말한 것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아. 사람들이 그냥 포기해 버릴 게 두려워 통계를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 내 말을 믿어. 우리의 시공간이 동나고 있어. 지리 정치적으로 주변인 지역에서는 수십 년 동안 자원에 대한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왔어. 그렇기 때문에 기아와 가뭄이 일어난 거지. 하지만 곧 모든 사람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게 될 거야. 환희이상 알약이 있으면 인류는 생존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게 돼." - P494

"한 세대만 소멸하더라도 모든 것이 끝나게 돼. 모든 것의 한 세대가 말이야. 딱정벌레, 나무, 미생물, 과학자,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 그 모든 것. 한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의 고리가 끊어지면 게임은 영원히 끝나는 거야." - P3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