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에드워드 캐리 지음, 공경희 옮김 / 아케이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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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나갔다가 후유증을 안고 돌아온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베른에 사는 닥터 쿠르티우스의 집에 일자리를 얻게 되어 딸 마리 그로숄츠를 데리고 떠난다.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아 혼자 생활하는 닥터 쿠르티우스의 집에는 사람들의 내장과 뇌, 혀 등의 온갖 부위가 가득한 방이 있었다. 그건 진짜가 아닌 쿠르티우스가 밀랍으로 만든 모형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집안일 외에 밀랍 모형 작업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심신이 약해졌던 어머니는 모녀의 거처인 다락방에서 목을 매고 말았다.

천애 고아가 된 마리는 그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밀랍으로 만든 모든 것들이 무섭지 않았기 때문에 쿠르티우스의 집에서 하녀 일과 밀랍 모형 제작 조수 일도 하게 된다.

 

마리가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베른 사람들이 쿠르티우스에게 밀랍 두상 만드는 일을 의뢰해 바빠졌다. 실제 사람과 몹시 닮은 두상이 꽤나 유명해졌는지 프랑스에서 온 메르시에가 찾아와 파리에도 가게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떠날 생각이 없던 쿠르티우스는 그의 두상 제작을 마음에 안 들어 하며 그를 얽매려고 하는 다른 의사 때문에 파리로 향하고, 그곳에서 메르시에의 도움을 받아 재봉사의 미망인 피코 부인의 집에 방을 얻어 밀랍 두상 제작을 시작한다.

 

베른을 떠나 파리에서 리틀이라 불리게 된 마리의 인생은 정말 온갖 역경이 가득했다. 처음엔 마리의 주인인 쿠르티우스가 그녀를 버리지 않고 파리로 데려온 것에 감사했지만, 그가 집주인 피코 부인과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마리를 자연스레 홀대하게 됐다. 그래서 마리는 쿠르티우스의 조수에서 과부 집의 하녀로 전락했다. 두상을 제작하는 일을 잘하고 또 좋아하는 마리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사람에 익숙하지 않아 당연히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모르고, 과부의 여우짓도 몰랐던 쿠르티우스였기 때문에 마리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마리를 하녀 취급하며 밀랍 두상 제작은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과부가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르겠다. 마리를 괄시하는 과부는 물론 그녀의 말만 듣는 쿠르티우스에게도 화가 났다.

 

그러다 두상을 구경하러 온 마담 엘리자베트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를 얻는다. 마리와 똑 닮은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직접 두상을 소개해 주고 자신이 만든 것들을 보여준 이후, 마리는 루이 15세의 증손녀이자 루이 16세의 여동생인 마담 엘리자베트의 조각 교사가 됐다. 소설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프랑스 왕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조금 놀랐다. 그녀의 등장으로 이 소설이 평범한 소녀의 인생 이야기는 아닐 거라 예상하게 했다. 그리고 그건 베르사유에서 왕족의 가까이에서 일하며 그들을 직접 만나고 손수 밀랍 두상까지 제작한 마리 앞에 곧 시민 혁명이 닥친다는 뜻이었다.

그 이후 소설을 계속 읽으면서 누가 실존 인물이고, 누가 가상의 인물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시에 살았던 유명인의 이름이 여럿 등장하고, 그들의 두상을 비롯해 전신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헷갈리는 인물은 검색해보면 창작된 캐릭터인지 아닌지 금세 알 수 있을 테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냥 계속 읽었다.

 

베르사유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다시 쿠르티우스와 과부의 작업실에 돌아온 마리의 삶은 더 기구해졌다. 베르사유에 가기 이전부터 사랑했던 과부의 아들 에드몽은 어머니의 추진으로 돈 많은 누군가의 딸과 결혼한 후, 병에 걸렸다가 정신을 놓아버려서 다락에 가둬졌다. 쿠르티우스는 과부의 말만 듣느라 마리는 당연히 뒷전이었고, 과부는 사업을 확장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러다 시민 혁명 후에는 그곳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여러 사람에게 배신도 당하고 급기야는 감옥에 가둬지기까지 했다.

무슨 삶이 이다지도 고되고 또 고되던지 모르겠다. 정말 많은 사건이 일어나 마리가 너무나 가여웠다. 그녀 곁에 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남긴 것이 또 막막하게 했다. 그럼에도 마리는 꺾이지 않고 두상을 만들며 삶을 계속 살아갔다.

 

하녀로 시작했지만 이내 밀랍 모형 제작자의 조수가 되었다가 혼자서도 완벽하게 모형을 만들 수 있게 된 마리의 정체가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져서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책에 대한 정보를 왠지 검색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묵묵히 읽었는데 이런 놀라움을 줬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 이름이자,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기까지 했을 그것이었다. 나도 과거에 어딘가에서 직접 본 경험이 있었다.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것"을 만든 사람의 실화라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힘든 삶을 살았음에도 오랫동안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성공하여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여인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엄청 재미있진 않았는데 마라톤처럼 끝까지 읽게 만들었다. 꾸준히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한 게 이 책의 장점이었다. 검색을 하지 않고 읽는다면 더욱 좋을 듯하다.

"우리는 익명이란다, 마리. 그러니 아무 감동도 없지. 우린 감정을 감당할 여력이 없어. 감정 따위는 다른 사람들의 일이지. 넌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알 거야. 우리가 만든 두상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이 두상에 유난을 떨 필요가 있겠니?" - P505

그들의 지시가 내 태엽을 감으면, 나는 기계적이지만 완벽하게 지시에 따랐다. 살 기회를 얻으려고 입을 다물고 하녀의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그들이 다른 곳에 있을 때면, 나 자신을 불러내서 다시 마리답게 되었다. 여전히 마리였다. - P160

어쩌면 난 산 것은 아무것도 만들지 못했다. 내 잘못이라고 믿는다. 난 생명 ‘비슷한 것‘, 실제 ‘크기‘만 한 것을 만들 수 있을 따름이다. - P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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