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여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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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원에서 피아노 선생으로 일하는 에리카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얽매여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어머니는 에리카에게 집착을 했고 그녀를 피아니스트로 성공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억압을 해왔다. 어머니는 에리카의 수업이 몇 시까지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곧장 집으로 오지 않으면 온갖 잔소리와 때로는 폭력으로 에리카를 고통스럽게 했다. 어머니는 에리카가 어떤 옷을 입는지 참견을 하고, 남자를 만나지 못하게 했으며, 밤에는 한 침대에서 자야만 했다. 에리카는 그런 어머니를 견디기 힘들어서 소리 높여 화를 내고 폭력에 맞대응하지만, 어머니가 죽기 전까지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20대 중반의 공과 학생 발터 클레머가 접근한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악기를 배우는 것에도 적극적인 클레머는 누군가와의 만남에 대비하기 위한 연습으로 피아노 선생 에리카를 꼬시려고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 때문에 영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인지 클레머는 더욱 오기가 생긴다.

 

 

 

 

 

 

보통의 서른 중반 성인이라면 진작에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고도 남았을 나이지만, 에리카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간섭과 억압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제 와 벗어나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가뜩이나 어머니에게 남은 가족은 자신뿐이라 그 일이 더욱 힘들 터였다. 집과 음악원 외에 어디를 갈 수 있는 시간이 없었고, 누구를 만날 수조차 없었다. 에리카에겐 자유가 없는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와중에도 에리카는 틈틈이 자신의 욕구를 만족할 만한 일을 했다. 어머니가 그토록 원하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 데 저축할 비용을 입지도 않을 옷을 사는 데 썼고 포르노 상영 극장에서 자신의 학생들을 잡아내기도 했다.

이런 에리카의 모습은 모두 비뚤어진 욕망이 표현된 것이었다. 조건 없는 사랑을 주는 존재인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그녀를 억압하고 짓눌러왔고, 남자란 믿을 게 못 된다는 견해를 주입받아왔기 때문인지 에리카의 욕망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내보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관음 증세를 보이며 집창촌에서 돈을 내고 여자의 나체 곳곳을 관찰하고, 늦은 밤 으슥한 공원 같은 데서 연인들의 짙은 스킨십을 훔쳐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장면을 훔쳐보면서도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했다.

 

에리카는 클레머가 강압적으로 행동하기 전까지는 욕망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지저분한 화장실에서 클레머와 대면한 사건으로 에리카는 자신의 욕망을 그에게 분출해도 될 거라 예상한 것 같았다. 이전까지는 피하려고만 했지만 10살 가량 많은 선생 에리카에게 하대를 하며 성적인 권위가 자신에게 있다고 행동하는 클레머를 어머니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여겼는지도 몰랐다. 클레머가 애정을 억압과 통제로 표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에리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사슬 따위로 신체를 묶고 강압적으로 굴며 폭력 등을 행사하는 성행위는 그를 위한 것이고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에리카에겐 부드럽게 대하며 아픔을 주지 않는 애정에 대한 기대가 남아있었다. 어릴 때부터 평범한 애정의 범주 바깥에 있던 그녀였기에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거라 느껴졌다. 처음엔 에리카의 마조히즘적인 부탁에 강하게 거부하는 클레머를 보고 기대를 했을 수도 있지만 클레머는 보통의 애정으로 에리카를 유혹한 게 아니었고, 그 역시 제정신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에리카는 원하지 않았고 클레머는 원했던 바를 이루고야 만다.

 

처음엔 비정상적인 욕구를 가진 에리카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어머니에게조차 사랑받는 행복을 누려본 적이 없는 그녀의 모습이 점점 가여워졌고 마지막엔 그럼에도 돌아갈 곳은 집뿐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만약 클레머가 정상적인 남자였더라면 에리카의 비뚤어진 욕망은 남들처럼 평범해졌을까. 적어도 어머니가 에리카를 사랑한다고 하는 방식이 잘못된 것이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을 것 같다. 마음대로 휘두르며 언어, 신체 등의 폭력을 가하는 것과 아껴주며 조심스러워하는 것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랬더라면 그제라도 에리카는 평범하게 사랑받으며 살 수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클레머 같은 놈이 다가오는 바람에 그녀의 삶에는 더 이상의 탈출구 없이 이전과 다름없는 구속된 삶을 애정이라 느끼며 평생을 살게 될 거라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보편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지경까지 오게 되어 그런지 가정 환경이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이 새삼 상당하다고 느꼈다.

 

이 책 역시 몇 년 전에 읽었던 책이었다.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눈살이 찌푸려질 묘사가 많이 등장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았다.

하지만 다시 읽으니 에리카가 얼마나 가여운 사람인지 와닿았다. 그녀의 행동을 보며 오죽하면 저럴까 하는 생각만 들었다. 친구도 없고 연인은 당연히 유니콘 같은 존재고 자신만을 바라보며 스토커처럼 집착하는 어머니만 있다니,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에리카는 여태까지 숨은 쉬고 살 수 있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기 위해 다시 읽은 책인데, 글로 표현된 그 모든 것들의 영상은 당분간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 최근에 워낙 강하고 충격적인 이미지의 영화를 봐서 아무래도 자제해야 될 듯싶다. 그래도 주연 배우와 감독의 이름만으로 궁금하니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우리끼리만 사는 거야, 에리카야. 우리는 그 누구도 필요 없지 않니?" - P22

그녀의 순진했던 소원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파괴적인 욕구로, 섬멸 의지로 변해갔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그녀는 자기도 억지로 소유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은 부숴버리려 든다. - P116

클레머는 에리카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빛깔과 천 등으로 겉만 치장한 뼈와 살의 꾸러미를 한번 풀어보고 싶을 뿐이다. 포장지는 구겨서 그냥 던져버릴 생각이다. - P264

에리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한 번도 무엇인가를 느낀 적이 없었다. 그녀는 비에 젖은 마분지 조각처럼 무감각하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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