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달의 무르무르 Nobless Club 13
탁목조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일곱 번째 달의 무르무르]를 다 읽고 나서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이거 큰일 났다.’였다. 드디어 판타지라는 장르에 푸욱 빠져들 것 같은 예감.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으로 범위를 넓혀가는 독서 습관으로 작가에 대한 정보를 얻어 볼까 해서 책의 앞 뒤 날개부분까지 다 살펴봐도 작가의 이력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탁목조 작가. 나의 짐작으로는 아마도 예명이지 않을까 싶다. 판타지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아들에게 슬쩍 물어보니 소위 말하는 <1세대 작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엄마 1세대 작가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라고 되묻는다. 그야 우리나라에서 처음 판타지를 쓰기 시작한 선구자 작가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대답했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그러면서 한 가지 더 “정통”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한다고 한다.



그저 책이 거기 있으니, 혹은 사춘기인 아들과의 소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한두 권 읽었었던 판타지. 읽어도 좀처럼 친해지지 않던 장르였다. 솔직히 꾸욱 참고 도 닦는 기분으로 읽었던 적이 더 많았었다.

그러나 [일곱 번째 달의 무르무르]는 읽는 도중에도 분명 즐거웠다. 다른 잡다한 일을 하느라 잠시 책을 손에서 놓았을 때에는 늘 줄거리가 머릿속을 떠다니고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뭐 특별한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거나 엄청난 미스터리가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특히 주인공을 통해 말하는 세계관이나 정치적 신념. 그리고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무엇보다도 맘에 든다.

최근 새롭게 듣는 단어 중에 <독서치료>라는 말이 있다. 책을 읽을 때 그냥 읽는 듯해도 자신의 상처라든가 내면의 어두움에 따라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하는 부분이 각각 다르게 존재한다고 한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그런 부분을 만나면 대리만족이랄까? 아님 자신을 객관화 시켜 바라본다고 할까? 하는 과정을 거쳐 자기 치유에 이르게 된다는 <독서치료>.

탁목조 작가의 [일곱 번째 달의 무르무르]를 읽으면서 아마도 나는 독서치료의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나도 모르는 무의식중에 말이다.

 

여러 종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일곱 번째 달. 각 종족들은 생김새도 다르고 가지고 있는 능력들도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다 같은 인종으로 구분되어 전쟁보다는 서로 상호 보완 하는 관계를 유지한다.

다른 여타의 판타지 소설과 구분되는 [일곱 번째 달의 무르무르]의 탁월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순간의 반짝이는 재미를 위하여 보기에도 섬짓한 대량의 학살 장면이라든가 이유 없이 잔인한 폭력 (물론 주인공의 강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겠지만)의 묘사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게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될 수 있으면 같은 종족들이 마을을 이루고 모여 살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종족의 무리를 떠나 이동하기도 하는데 이 때는 각 종족이 모여 모둠을 만든다. 이질적인 여러 종족이 모여 거친 사냥터를 떠돌면서도 작가는 각 종족간의 암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종족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나와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르다.’ 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태도. 그리고 중간에 모둠을 떠나는 자에 대해서도 끝까지 약속을 지키고 배려하는 정신.

아마도 나는 내가 사는 이 현실의 세계에 어지간히 환멸을 느끼고 있었나보다. 그리하여 탁목조 작가가 창조한 멋진 신세계에 이리도 매료되었던 듯 싶다. 작가의 말에서 탁목조 작가가 기원한 것처럼 [일곱 번째 달의 무르무르]를 읽는 동안 난 분명 행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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