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 / 창해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을 읽는 내내 창 밖에서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12시를 훌쩍 넘긴 깊은 밤에 그것도 비까지 오는데 읽으려는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의 표지는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으스스한 붉은 색으로 채색된 거의 어린아이의 키만큼 자란 무성한 풀밭을 작은 촛불하나에 의지한 소녀의 뒷모습. 그 소녀는 멀리 보이는 집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집도 괴기스럽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이다. 뒷 표지에는 같은 배경의 끝자락에 학생복을 입고 구식 가방을 등에 맨 여름 교복 차림의 소년이 이쪽을 향해 비스듬히 서 있다. 소년의 단정한 얼굴에는 코와 입의 윤곽뿐, 눈은 그려져 있지 않고 하얀 여백이다.  혹시나 내가 제일 싫어하는 잔인한 호러물 비슷한 작품은 아닐까 살짝 망설여지기도 했으나, 같은 작가의 작품을 전작은 아니지만 꽤 읽었던 까닭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를 믿고 일단 읽어보기로 했다.




작중 화자인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나 6년간을 사귀었으나 헤어져 지금은 남의 부인이 된 사야카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고 어떤 집을 찾아 함께 가자는 부탁을 듣게 된다.

그녀는 딸을 학대하는 자신에게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깨닫고 그 원인이 기억을 잊어버린 어린 시절에 있다고 생각한다. 첫사랑인 나와  갑자기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 동기도 어린 시절의 기억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나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사야카의 아버지 유품에서 나온 열쇄와 손으로 그린 지도만 들고 그들은 과거를 찾는 여행을 떠난다. 그들이 찾은 집은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먼지투성이면서도 모든 것이 잘 정리되어 있다. 마치 어느 한 순간 시간이 멈춰선 것처럼.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범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즉 비오는 겨울밤 읽기 좋은 소재이다. 잃어버린, 혹은 의식적으로 묻어버린 자아를 찾아 떠나는 짧은 여행. 책을 읽는 내내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는 마치 나를 유혹하는 듯 했다. 너도 이 밤 떠나 보라고. 그래서 네가 감춰두려 했던 다른 네 자신과 당당히 마주 서 보라고. 그것은 작가가 나에게 속삭이는 음성이기도 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는 유쾌한 이야기도 너무 들뜨지 않게, 무거운 이야기도 너무 가라앉지 않게 독자가 균형을 유지하며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쏠리지 않고 적당히 긍정정인 면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하는 힘. 그는 독자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대작가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어쩌면 나 역시 낡은 그 집에 죽어 있는 건 아닐까. 어린 시절에 죽은 내가, 그 집에서 줄곧 내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누구에게나 ‘옛날에 자신이 죽은 집’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리나 그곳에 누워 있을 게 분명한 자신의 사체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척하는 것일 뿐.](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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