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애무
에릭 포토리노 지음, 이상해 옮김 / 아르테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먹먹함.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쓸쓸함. 마치 호된 몸살을 앓고 난 뒤처럼 한 없이 바닥으로, 바닥으로만 가라앉는 기분.............

에릭 포토리노의 [붉은 애무]가 그랬다. 한 동안은 도무지 그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날씨마저도 하루 종일 흐린 회색이다.

습하고 흐린 잿빛 공간. 바로 [붉은 애무]의 분위기가 딱 그렇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내가 한 일이라곤 표지의 작가 사진을 오래 들여다 본 일이 전부이다.

선한 눈빛, 마음 좋아 보이는 은은한 미소, 그러나 그렇게 깊은 슬픔을 이해하고 완벽하게 글로 표현해 낼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작가 에릭 포토리노는 한국 독자들에게 전하는 간단한 인사에서 자신의 작품 [붉은 애무]를 극에 달한 감정, 광기에 이른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는데 나에게는 그저 견뎌내기 힘든 깊은 슬픔 또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로만 느껴진다.




[부인이 나를 보고 웃었다. 슬픔을 집에 들여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 때 그것에게 웃어주듯. 슬픔은 거기, 찬바람 부는 곳에 남겨둘 것이다.](79쪽) 




[붉은 애무]의 피상적인 소재는 외부모 가정이다. 가족의 붕괴로 원초적인 결핍에 희생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집에 불이 난 뒤 실종 되었다가 시체로 발견되는 모자.(집에 불이 난 원인은 결국 금전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전기세를 못 내서 전기가 끊기고 켜 놓았던 양초 때문이었다.) 10년가량을 함께 산 아내가 집을 나간 뒤 항상 권총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로날드.(권총과 함께 그의 얼굴에는 떠나지 않은 미소가 생긴다.) 세월이 주는 시련들 앞에서 더욱 단단해진 백발이 성성한 공원의 배 빌려주는 부인. 그리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아버지의 역할에 자신이 없는 펠릭스.(결국은 어머니도 그를 버린다.)




[스스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될 때에는 삶에 대한 혐오감이 주변 사물에게도 전달되는지, 그것들 역시 기능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89쪽)




자신이 아이를 키우는데 부적합하다고 느끼는 아내 마리는 예고했던 데로 아들 폴랭이 13개월 7일째가 되던 날 훌쩍 떠나버리고 아들 폴랭과 함께 버려진 펠릭스는 자신 또한 편모가정에서 자라 역할 모델이 없었던 관계로 아버지 역할에 심한 장애를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폴랭이 결핍감을 느끼지 않도록 엄마와 아빠역을 번갈아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아들 폴랭을 달래 줄 생각으로 시작했으나 그는 점점 엄마 역할에 스스로 깊이 빠져 든다.




[나는 혼자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불행이 곁을 지켜주었지만, 그와 있으면 더 외로웠다.](152쪽)




펠릭스가 느꼈던 결핍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아버지 때문이 아니었다. 옆에 있었지만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 엄마, 늘 자신을 짐으로 여기고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엄마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엄마에게서 받고 싶었던 사랑을 아들 폴랭에게 완벽하게 주는 자신의 엄마역할을 사랑하게 된다. 그는 폴랭뿐 아니라 펠릭스 자기 자신에게도 이상적인 완벽한 엄마로서의 역할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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