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오래산 것은 아니지만 살다보면 절대로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우월한 이들을 마주하게 될 때가 있다. 한동한 유행하였던 재수없는 x 시리즈는 이러한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적인 존재를 잘 묘사해주는 것도 같다. 10대 때는 얼굴도 예쁜데 공부도 잘 하는 x, 20대 때는 고쳤는데 티 안 나는 x, 30대 때는 놀거 다 놀고 시집 잘가는 x, 40대 때는 애들 교육에 관심 없는데도 애들이 공부 잘하는 x... 넘어설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게 되는 열등감과 질투. 그것이 모든 사람의 공통 속성이기에 이러한 시리즈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것이 아닐까.
정후겸. 창경궁 동무는 이를 주인공으로 한다.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라고 칭송받을 정도로 나라를 잘 다스렸지만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해괴한 일을 저지른 영조. 영조의 슬하에는 그가 미워한 사도세자뿐만 아니라 예뻐한 여러 옹주들이 있었다. 그 중 화완옹주가 양자로 삼아서 데려온 아이가 정후겸이다.
영조가 총애하는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 그가 세자이지만 영조의 눈밖에 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이산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질투. 창경궁동무에서는 그의 열등감과 질투가 이야기 전반에 걸쳐 옅은 바탕색으로 입혀져 있었다.
조선 시대 궁중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한중록'. 사도세자의 빈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영조 때부터 그간 있었던 일을 한글로 풀어놓은 이 책에서는 정후겸을 교만방자하고 욕심이 많은 인물로 묘사한다. 만약 한중록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많은 네티즌들이 정후겸의 욕설을 게시판에 올려놓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창경궁 동무를 읽어나가며 마주한 정후겸은 미워할 만은 없는 존재였다. 정후겸은 가난한 양반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그의 아버지는 양반임에도 어부일을 하셨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서당에서 글을 배울 수도 없었던 정후겸이었지만 두뇌가 명석하여 가끔 배우고도 다른이들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한다. 이러한 자식에 대하여 안타까운 아버지가 힘을 쓴 것일까. 정후겸은 화완옹주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서당도 다닐 수 없었던 자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새 어머니 화완옹주. 그러한 새어머니에 대한 정후겸의 애정은 얼마나 각별했을까. 그는 어머니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공부도 활쏘기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어머니인 화완 옹주를 따라서 궁에 들어와서 살게 된 정후겸은 자연스레 또래인 정조 이산과 함께 공부를 하거나 놀 기회를 갖게 된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둘은 친해지지만 언젠가부터 정후겸은 자신과 세자손(정조 이산)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존재함을 절감하게 된다.
한번은 함께 숲속을 뛰놀다가 넘어져서 세자손은 손바닥이 살짝 긁히고 정후겸은 팔에서 피가 줄줄 흐를만큼 많이 다치는 일이 생긴다. 하지만 궁궐로 돌아 왔을 때 상궁들은 세자손의 살짝 긁힌 상처만을 걱정하고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자신의 상처는 모른척하며 "도련님은 왜 위험한 곳으로 세자손저하를 이끄셨습니까" 라고 문책한다. 세자손보다 아무리 학문에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해진들 자신은 세자손에 비할 때 존중받을 수 없다는 것. 세자손과 자신의 사이에 존재하는 높고 두꺼운 ‘혈통의 벽’을 깨닫게 된 정후겸. 정후겸은 그 벽의 두께를 실감하며 좌절하고 그의 내면에 생긴 상처에서는 열등감과 질투의 감정이 샘솟듯 퍼져나오기 시작한다.
한중록에서는 정후겸의 어머니 화완옹주도 욕심 많고 방자한 여인으로 묘사한다. '화완옹주는 아버지 영조가 자신을 세자인 오빠보다도 예뻐하는 것을 놓고 갖은 유세를 하였으며 행실이 오만하였다'하지만 이는 한중록을 지은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빈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내가 화완옹주였다면 어땠을까. 여자로 태어나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하는 시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늘 아버지와 성격이 맞지 않아서 아버지에게 미움만 받는 오라버니. 주변에 넘쳐나는 세자저하와 아바마마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세력의 이야기들. 그리고 세자저하인 오라버니를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늘 따뜻하고 다정하게 내게 대해 주시는 아바마마. 내가 배우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세상에 뜻을 펴는 것에 관심이 있기까지 했다면 '혹시 나의 양자인 후겸이가 왕이 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았을까. 그리고 그런 꿈을 꾸고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인 것일까. 내가 화완옹주였다면 사도세자가 누리는 자리에 대하여 전혀 질투도 열등감도 느끼지 않았을까.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한다. 영조의 눈 밖에 난 사도세자. 그런데 그 어긋난 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은 화완옹주뿐이다. 그래서 화완옹주와 그녀의 양자 정후겸의 마음에서는 점점 위험한 희망이 피어오른다.
사도세자가 조정대신들에게 모함을 받으면 받을수록. 세자가 이상행동을 한다는 소문이 돌면 돌수록. 화완옹주도 정후겸도 속으로 흐뭇하고 유쾌해진다. 심지어 정후겸은 자신에게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의 현재의 정국을 세자손에게 뽐내고 싶은 마음에 사도세자가 폐위될 수도 있다는 등의 뒤숭숭한 소문을 세자손에게 흘리며 그의 심경의 변화를 살피기도한다. 사도세자가 죽은 다음에도 정국의 흐름이 어떻게 될 지 세자손이 세자로 책봉될 수 있을지에만 관심을 갖고 발빠르게 정보를 모으고 어머니와 가까운 대신들과 힘을 모으는 후겸.
하지만 야속하게도 아들에게 냉혹한 것이 미안했던 영조는 왕위를 세자손에게 물려주기로 마음을 굳힌다.
정조이산이 즉위하는 날. 정후겸은 즉위식에 참석해야 하는지를 놓고 어머니와 언쟁을 하다가 즉위식에 참석한다.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은 왕을 인정하지 않는 불충을 의미하기에. 하지만 정후겸이 즉위식에 참여한 진짜 이유는 왕의 자리에 앉은 정조 이산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승자의 승리를 분명히 확인하고자 하는 패자의 비장한 마음인것일까. 즉위식에 참여한 정후겸은 "천세"를 외치며 이전에 정조 이산과 함께 뛰놀았던 시절을 회상한다.
배유안 작가의 작품이기에 읽게 된 책이었다. 읽기 시작하고 나서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정조 이산 드라마를 보지 않았음에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은 사건이야 워낙 유명하니까 소재자체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이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정후겸의 열등감과 질투에 대한 깊은 공감 때문일 것이다. 사도세자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부짖는 정조 이산을 보면서도 마음속으로 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는 정후겸의 모습은 분명 얄밉고 보기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내 안의 질투와 열등감. 정후겸은 그러한 감정을 이 이야기에서 잘 표현해내는 인물이었고 그의 감정에 대한 깊은 공감때문에 이 책을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내려놓으면서 이걸 우리 반 아이들에게 읽어준다면? 을 생각했을 때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무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이 이야기그 사도세자와 영조의 관계, 그리고 정조가 즉위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하고 제법 굵직한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를 중심에서 다루며 사도세자, 영조, 정조와 관련된 여러 대신들의 다양한 관계와 감정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한발 떨어져 지켜보면서 자신의 위험한 꿈을 위해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는 정후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사건 전개가 박진감 넘치고 흥미로운 이야기보다는 정후겸의 감정의 흐름에 깊게 공감하고 따라가게 되는 이야기이기에, 이러한 감정적 사전경험(?) 이 많지 않을수도 있는 6학년 아이들에게는 (특히 남자아이들)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수준이 높고 감정이 풍부한 6학년 이상, 오히려 중학생 아이들에게 더 적절할 것 같은 책이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