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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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할 사건도 없이,

한 사람의 심리와 역사와 뿌리를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끄집고 들추는 줌파 라히리 소설. 이 소설집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다.1부는 대부분 가족에 관한 소설이고, 2부는 헤마와 코쉭 두 남녀의 엇갈림을 다룬 연작 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1부가 좋았다. 그중에서도 앞에서부터 4개 단편이. 다음은 그 단편들에 대한 코멘트.




1. 길들이지 않은 땅


내용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다. '서서히 멀어진 부녀. 그 둘에게 찾아온 화해의 계기. 하지만 다시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는 아버지. 결국 그를 포기하는 딸.'



그는 다시 가족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복잡함과 불화, 서로에게 가하는 요구, 그 에너지 속에 있고 싶지 않았다.

딸 인생의 주변에서, 그 애 결혼 생활의 그늘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아이들이 커가면서 잡동사니로 가득 찰 커다란 집에서 사는 것도 싫었다.

고동안 소유했던 모든 것, 책과 서류와 옷가지와 물건을 최근에 정리하지 않았던가.

인생은 어느 시점까지 규모가 불어난다.

그는 이제 그 시점을 넘겼다. (P68) 

소설은 두 화자의 속마음을 아주 공평하게 들려준다. 처음 읽었을 때는 딸의 시점만으로도 이야기는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아버지를 조금 더 미지의, 불가해한 인물로 남겨두는 게 어땠을까 싶은.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줌파 라히리가 쓰고 싶었던 것은 어떤 '오해'가 아니었던 것 같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굴레 안에서는 서로를 이해할 수도, 이해를 구할 수도 없는 두 사람. 그들이 느끼는 미안함과 배신감, 그 끝에 남겨진 잔여물 같은 감정들. 뭐 대충 그런 것들이 아니었나 싶다.




2. 천국 vs 지옥


줌파 라히리 소설이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가, 한국 사람들 정서와 굉장히 유사한 면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 단편도 그렇다. 가족을 위해, 아내이자 엄마이자 주부로서의 삶을 산 여자. 자신의 욕망을 거세한 여자. 그녀가 결국 불 붙이지 못한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어찌 그리 숨죽이고 살 수 있었는지를 마지막 장면 가서야 밝히는데, 그 에너지가 엄청나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폭발력 있는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 단편의 엔딩이다.




3. 머물지 않은 방


이 소설집에서 가장 애정하는 단편. 주인공은 30대 중반을 넘어선 유부남. 젊은 시절 남몰래 흠모했던 여자, 팸의 결혼식에 찾아가는 내용이다. 일단 심리 묘사가 훌륭하다. (내가 30대 중반을 넘어선 유부남이라 그런가...) 여러 메타포들도 눈에 띈다. 머물지 않은 방, 아니, 머물지 않은 방이 아니라 머물지 못한 방일 것이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팸과의 삶. 어디까지나 주변인으로서 머물러 있었던 학창시절. 지독히 나약하기 짝이 없는 한 남자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가는 현재, 그 시간이 주는 무게와 공포.



여름에 일주일에 한 번쯤 아이들과 함께 가는 존스 해변의 파도를 상상했다.
그가 발치에서 잡지를 뒤적이고 있을 동안 파도가
둘 중 하나를 물속으로 삼키거나
아이가 모래 더미에 눌려 숨이 막히는 상상이었다.
이런 상상에서 언제나 그는 살아남았고, 그가 보호해야 했던 아이들이 죽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당연히 메건은 자신을 탓할 테고, 이혼을 당할 건 뻔했다.
메건과 아이들과 꾸린 삶은 모두 끝장날 거였다.
잠시 한눈을 팔았다간 영영 인생을 망칠 수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P112) 

인생의 짝을 찾는다고 그렇게 헤매고서,
그 사람과 아이까지 낳고서,
아밋이 메건을 그리워한 것처럼 매일 밤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절실하게 혼자 있길 원한다는 건 끔찍하지 않은가.
아무리 짧은 시간이고, 그조차 점점 줄어든다 해도
사람을 제정신으로 지켜주는 건 결국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P140) 

엔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주인공이 나약한 데다가 치사하게까지 느껴졌으니까. (주인공의 발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회한이었을까 위안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그를 비난만 할 수 있는 사람, 어디 있을까. 씁쓸함이 입안 가득 남는 단편. 




4. 그저 좋은 사람


가족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들.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제, 자매 혹은 남매 등등.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의 끈을, 줌파 라히리는 바짝 조인다. 그리고 짓궃게 튕긴다. 마치 악기의 현이라도 되는 듯이. 그곳에서 들리는 불협화음을 모두 집대성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이 단편도 마찬가지다. 그저 좋은 사람으로만 남기엔 너무 가까우면서도 너무 멀리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 (이 소설은 앤드류 포터의 소설집에 수록된 '강가의 개'와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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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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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몇몇 단편의 단평.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장면부터 아름답다. 창밖에서 눈이 소복이 쌓여가는 강의실.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를 낸 물리학 교수. 그곳에서 저 혼자 답안지를 제출한 여제자. 누구는 이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화자가 바뀐 미국판 '은교'라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 그것을 갈구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나있는 어떤 깊은 구멍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강가의 개 :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는 딜레마. 그래서 가족은 가장 특별한 인연이 될 수도 가장 잔인한 낙인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테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가슴을 밀치는 듯한 장면들이 몇몇 있다. 주인공이 기억하는 형은 어떤 모습일까. 왠지 서럽게 흐느끼고 있는 뒷모습일 것만 같다.


-외출 : '스탠 바이 미' 사랑 Ver. (이 소설집 대부분이 그렇듯) 가장 중요한 서사는 주변 인물들의 드러나지 않은 진심이다. 각자의 위치로, 자신이 속해 있는 각자의 세계로 편입되어야 하는 어린 날의 여름. 그들의 이별은 호기심과 무지함 사이를 오고 가다 너무 쉽게 그리고 간편하게 이뤄지고 만다. 말로는 다 할 수 없었던 말들. 우연히 쏟아진 물컵 같은 감정들. 가장 좋았던 단편이자, 근래 읽었던 것 중 가장 습도가 높았던 사랑 이야기.


-머킨 : 여자 동성애자가 공공장소에서 가까이 두는 남자를 뜻하는 머킨. 소재가 독특하다. 하지만 더 인상적인 것은 섬세한 심리묘사다. 사랑에 상처 입은, 하지만 여전히 사랑받고 싶은 몸짓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말을 못 하는 소년 웅변가와 그 몸짓을 창밖 너머에서 바라보는 남자와 여자. 이 장면 하나 만으로도 이 단편은 정말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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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3
우타노 쇼고 지음, 현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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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타노 쇼고의 특징이랄까. 수수께끼 자체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데 그 수수께끼 바깥에서 일어나는 반전 때문에, 엄마야, 하게 되는. 일종의 변칙 같은 트릭. 근데, 그게 좋을 때도 있는데 영 수준 낮은 반칙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로 인한 호불호도 생기기 마련. 이 책에 실린 3편의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다음은 각각에 대한 짧은 평.


2.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 : 표제작임에도 실망스러웠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보다 더 갑작스러운 결말. 밀실 트릭은 조악스럽고 반전은 납득되지 않았다. 이 소설의 유일한 미덕이라면 명탐정 '가게우라'라는 캐릭터. 생활고에 시달리는, 돈 되지 않는 일에는 결코 나서지 않는, 정의감 따위 개나 줘버린 명탐정이라니. 차라리 그를 주인공으로 한 캐릭터 소설을 썼으면 어땠을까.


3. 생존자, 1명 : 무인도에 고립된다는 설정. 결말을 먼저 알려주고 시작하는 전개. 그로 인한 서스펜스. 하나같이 다 어디선가 곰탕처럼 우려먹은 것들. 결말이라도 새롭길 바랐는데... 안타깝게도, 마지막 반전마저 희멀건한 사골육수.


4. 관館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 : 덕후는 달라도 뭔가 다르다. 추리소설 덕후가 중세 시대풍의 관館을 짓고 오랜 친구들을 불러 추리게임을 펼치는 이야기. 마치 무슨 JTBC 크라임씬처럼. 여기서 오는 묘한 웃음 포인트도 있고, 무엇보다 밀실 트릭이 가장 깔끔한 편이다. 쉽게 납득되는 간단명료함. 3편 중 유일하게 좋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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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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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야 읽었다. 출간한 지 4년 가까이 지난 책을. 역시나 읽기 쉽다. 후쿠오카 여행하는 동안 틈틈이 속도감 있게 쭉쭉 읽었다.


2. 소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대부분 하루키 소설이 그렇듯이 주인공 쓰쿠루의 '성장'에 관한 테마다. 역시나, 어떤 서사보다는 관념적인 서술에 집중한다. 흡사 헤세의 데미안 같은. 어딘가 결여된 듯한 정서와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혼란. (그리고 그 혼란을 꽤 질서 정연하게 서술하는 아이러니함.) 색채가 없는, 어딘가 비어버린 자아. 마침내 쓰쿠루는 그 모든 것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3. 나머지 하나는 미스터리다. 학창시절 완벽한 공동체를 이뤘던 또래집단으로부터 일방적인 절교를 통보받은 이유. 그 이유를 듣기 위해 떠나는 여정이 소설의 또 다른 축이다. 사실, 하루키 소설은 늘 이런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불가해한 현상, 포섭되지 않는 진실, 뭐 이런 것들. 근데 또 웃긴 게, 마치 비둘기 모이 주듯이 흩뿌린 떡밥들을 (하루키 소설은 늘!) 제대로 주워담지 않는다. 이 소설 또한 마친가지. 다 읽고나면, 뭐랄까, 허탈감 혹은 배신감 비슷한 것이 씁쓸하게 남는다. (아무리 장르소설이 아니라지만!) 진실의 변두리만 훑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느낌. 마치 도넛 같은 미스터리. 


4. 애초에 하루키는 사건의 전모나 진실 같은 것에 관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읽는 것이 속 편하다.


5. 기차'역'은 달리지 않는다.


6. 그가 쓰고 싶었던 것은 어떤 진실이 아니라 풍경이다. 소설 마지막, 쓰쿠루는 신주쿠 역에서 그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기차역을 뒤로한 채 각자의 행선지를 향해 갈라지는 기차들. 한때는 서로의 전부였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전혀 다른 레일 위를 달리고 있는 친구들. 그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마치 기차역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쓰쿠루. '갈 곳'이 없던 그는 이제 '가고 싶은 곳'을 조심히 떠올려본다.


7. 하루키는 딱 이 정도 분량까지가 좋다. 이보다 길어지면 상징과 의미망들이 자꾸 뒤섞이고 엉클어진다. 내가 도대체 뭘 읽은 건지 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일까. 개인적으로 '해변의 카프카'나 '1Q84'보다는 좋았다. 하루키 소설답게 읽는 드라이빙감 또한 탁월했다. 추천 쾅. 별 네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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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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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이 소설가 지망생 지침서 같다. 하지만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하루키가 처음 쓴 자전적 에세이다. 물론, 여행 에세이나 생활 에세이는 많았다. 그럼에도 자신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이토록 오피셜하게 툭, 하고 까놓고 쓴 에세이는 과연 처음이지 않나 싶다.


2. 하루키는 말한다소설을 왜 썼는지, 어떻게 썼는지, 그로 인해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고 어떤 태도와 습관을 유지해야 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소설을 둘러싼 오해에 대해서도 입을 뗀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꽤 적극적으로 항변한다. 마치 억울함을 토로하는 피고인처럼. 뭐 대체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3. 오독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읽은 바에 의하면, 하루키는 소설의 깊이나 다층적인 구조를 만드는 일에 집착하는 작가다. 하지만 소설 전체의 의미망을 장악하는 (혹은 장악하려는) 작가는 아니다.


4. 책을 다 읽고 난 뒤 : 이런 비유가 어떨까 싶다. 미술사에서 인상파를 지나 피카소의 큐비즘에 다다르기 전 어느 지점, 하루키 소설은 그 지점에서 쓰인다. 그리고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소설을 쓰고 있는 육체적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5. 그러니까, 하루키 소설은 읽고 난 뒤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읽고 있는 순간 자체'가 중요한 소설이라는 이야기.


6.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도 좋았지만 '소설가로서의 하루키'가 더 흥미로웠던 책이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을 정도로. 하루키 월드에 빠져드는 것만큼 하루키 월드를 이해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까. 그것에는 이만한 책이 없으니까. 또 하나 더. 하루키를 은근히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라도 더 대꾸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정도면 읽어야 할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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