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아닌 것이 없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이는 사물일지라도 어여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속해서 사랑과 관심을 주면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참 엉뚱하다 싶은 저자의 이력은 특이하게 교회 목사님이셨다. 칫솔,의자,심지어 못이랑도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여기서 말하는 대화란 인간의 언어가 아닌 사물과의 교감에 의한 대화라 할수 있다.
동물들도 인간이 가진 언어의 형태는 아닐지라도 기쁨과 슬픔,일상의 필요한 대화를 나눈다. 나무들도 가까이 있는 나무들과 서로서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그들만의 질서를 유지한다고 한다.
동물 애호가들을 보면 동물들의 작은 몸짓,표정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읽는다.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일까?당연히 아니다. 애정어린 마음으로 강아지를,고양이를 돌보고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진다면 서로간의 소통이 어려운 일이 아닐것이다.
그렇다면,이 세상 그 누구보다,그 무엇보다 소중해야 할 “나”와의 소통은 어떨까. 나의 내면과의 대화는 어떨까.
이 책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인간의 의식은 현재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뉜다. 현재의식은 우리가 아침에 깨어 밤에 잠들기전까지 인지하는 의식이다. 무의식은 의식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의식이 인지하기 어려운 의식이다. 우리는 호흡을 우리의 의지로 하지 않는다. 깨어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때나 무의식적으로 호흡이 일어난다.
매 초마다 우리의 뇌로 들어오는 정보는 몇 천억 바이트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 우리의 무의식이 받아들이는 정보는 몇 천 바이트,그리고 우리의 현재의식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겨우 몇 바이트에 불과하다. 현재의식이 인지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에서는 매 초 우리가 알 수없는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하는 생각이나 행동도 무의식에 영향을 받은것들이 많다. 대부분이라 할 수도 있다. 어린시절 받은 상처가 있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비슷한 상황이나 사람을 만나게되면 현재의식은 그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것은 심리학자가 아닌 일반인도 이해할 수있는 내용이다. 아기의 환한 미소를 보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미소가 퍼지는것 또한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저자가 내면을 들여다보고 정화한다고 하는 그것도 그 무의식이 쥐고 있는 정보들이다. 우리가 상처를 쥐고 놓지 못하고 있다면 진심으로 보듬어줘서 정화하고 궁극적으로는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상황에 따라 맞닥들이는 슬픔이나 분노같은 감정도 내가 의식적으로 끌어올린게 아니다. 나도모르게 사로잡히는 무의식적인 반응이지 않은가.
저자는 내면을 정화하며 잠재의식과 소통한다고 한다. 저자는 본인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말한다. 그도 그럴것이,꽃을 어여삐 여겨 자주 눈여겨보고 사랑을 계속주는 사람은 당연히 꽃이 있어도 지나치는 사람보다 꽃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밖에 없다. 꽃과 교감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는 행동,말투,감정,느낌에 무감각하게 일어나는데로 살아가는 사람과,내안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정보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나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 사람인가.
자칫 이 책을 가볍게 훑어보면 갸우뚱 할지 모른다. 본인의 잠재의식과,타인,사물과도 느낌으로 소통하는 저자가 평범해 보이지 않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내면과 소통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저자의 말을 공감할 수밖에 없다. 저자가 보통 사람들과 다른점이라면 소통에 더 많이 집중하기에 어쩌면 당연히 더 깊은 차원의 소통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한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갑자기 기억날 때,어떤 선물을 할지 고민중에 기가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우리는 보통 결과에만 집중한다. 내면의 소통을 중요시 하는 저자라면 내안에서 떠오른 그 느낌,그 아이디어에 소중히 고맙다고 전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나에게 늘 집중하고 소통하다보면 내안에서 올라오는 흐릿한 느낌들이 점점 선명해지지 않을까. 그것이 정화가 아닐까.
나를 더 잘 알기위해 외부가 아닌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반응에 내가 따뜻한 관심을 보인다면 나의 내면과 소통이 원활 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내용이,내면과의 소통이 절대 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온전히 나답게 살아가는 것 뿐이다. 온전히 나다움은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다. 부족하고 어설프고 부끄러운 부분 모두 나의 것이라는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것에서 시작된다. 좀 미운부분이면 어떤가.그리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 모습이 있다해도 괜찮다. 내 안의 질투와 욕심을 못본 척 내 것이 아닌 척 하느니 끌어안아버리는 것,그 모습 그대로 다 괜찮다 여기는것이 소통이다.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온 우주만물은 에너지체로 이루어져있고 또 서로의 에너지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기분이 좋아지고 하루를 살아갈 에너지가 채워지는것 또한 그런것이 아닐까.
외부가 아닌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느낌,생각들을 먼저 존중하고 사랑하기.사실 쉽지만 어려운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저자처럼 점점 선명하게 소통하고 내 삶이 더욱 깊어지는 건 누구나 바라는 소망아닐까.
우리가 흔히,예술가들이 “영감”을 받아 멋진 그림을 그려내고,매혹적인 음악을 만들어 낸다는 말을 한다. 물론 타고난 감각이야 무시할 수 없지만 고흐가 그린 멋진 그림들이,모짜르트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음악이 그들의 잠재의식과 깊은 교감속에 탄생한 작품이 아닐까. 그림을,음악을 향한 그들의 순수한 내면의 힘과 역량이 빚어낸 작품일 것이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만한 대단하고 신묘한 능력이 발휘되는 것만이 영감은 아니다. 아주 작은 메시지일지라도 내 현재의식의 판단,무의식의 작용이 아닌 순수한 나의 내면 깊은곳에서 올라온 울림이라면 그것이 바로 나와의 진정한 소통이라 한다. 그리고 내게 올라온 정보가 무의식에 저장된 오랜습관이라해도 상관없이 아껴주라고 한다. 결국 내 안에 정화되어야 할 나의 모습이다.
저자는 아주 친절하게도 자신의 내면과의 소통을 대화형식으로 서술한다. 언뜻 이상해보일 소지가 있지만,내가 “사랑 아닌 것이 없다”라는 책에서 보았듯,그것은 머릿속에서 인간의 언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끔 우리는 내가 느끼는 감정의 실체가,내가 원하는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 혼란을 느낄 때가 있다. 나도 나를 잘 모르는것이다. 물론 무의식이 쥐고 있는 그 많은 정보를 하나하나 전부 알 필요는 없다. 다만,내 안에서 올라오는 느낌,감정,수많은 생각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점점 선명하게 나의 것을 취하는 삶이 되어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