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최대한의 궤적을 그리며 잔손금과도 같이 펼쳐진 길을 돌아가리라, 몸이 허락하는 한. 그녀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출구를 향해 간다. 머리 위로 드리워진 지상의 찬란한 어둠을 향해 나아간다.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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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고 나서 조각이 첫 임무 수행을 마치고 지하철 출구를 향해 가는 부분이다. 이때부터 짜릿하고 멋진 소설이 시작된 것이다. 귓가에는 누아르 영화 비지엠이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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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벌어집니다.”
심호흡하고 나서 떼는 첫마디가 그거였다. 작은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의사가 말하자 은은한 스킨 로션에 소독약이 뒤섞인 듯한 냄새가 끼쳐왔는데 그녀는 어쩐지 그 냄새에 속이 뒤집히지도 머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당장 수상한 사람에게 경독맥이 베일 위기에서 이런 다정하며 헌신적인 말투라니. (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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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물 한 잔을 완전히 비우는 동안 조각은 시선을 줄곧 발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는데, 이런 때에 더욱 선명해지는 죄악감이란 이를테면 물을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 같은 사소한 것에조차 심장이 술렁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어디에도 파종할 수 없이 차가운 자갈 위에서 말라비틀어져야 마땅할 터였다.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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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님은 사랑에 빠진 이가 그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마음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감탄에 감탄. 그래서 아이돌팬들이 구절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의 스타에게 바치는지도.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겠다.
조각은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숨을 거두게 만드는 킬러로 평생을 살게 되었고, 그 운명은 ‘지켜야 할 것을 만들지 말자’는 맹세로 이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빛을 찾아 몸을 비트는 그늘진 구석에 심긴 식물처럼, 생에는 자꾸만 미안한 의미들이 깃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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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어떤 심장의 소용돌이들. 류가 떠난 뒤로는 의미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 그리고 그것은 손안에서 차게 식은 무용의 윤기 없는 털의 감촉으로까지 이어진다.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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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아가미><파과>까지 연이어 읽게 되면서, 무감각한 감정, 인간성이 상실된 어떤 존재가 생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공통적으로 반복된다. 그래서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끝내 극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따뜻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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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파과>에서 <한 스푼의 시간>이 나오는 힌트를 나름 추적해볼 수 있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오래 두고 쓴 냉장고에 조각의 노쇠를 빗대는 장면(부품. 단종. 고장. 교체)과 한바탕 휩쓸고 난 후 공원 풍경을 그릴 때 “한 티스푼의 설탕에 지나지 않았던 일화들은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르다 결국 눅눅해지며 감당 못하도록 찐득해진다(p.329)”는 구절을 읽었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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