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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오리를 낳았어요
순칭펑 지음, 난쥔 그림, 권소현 옮김 / 리틀브레인 / 2022년 6월
평점 :
너무나 배가 고파서 제대로 걸을 힘도 없는 여우가 있었다.
배고픔에 닥치는 대로 입에 먹을것들을 넣던 여우가
우연히 연못 언저리 풀더미 속에서 커다란 오리알을 발견한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여우는 고민한다.
'오리알을 먹는 게 나을까, 오리를 먹는 게 나을까?'
결국 여우는 더 큰 먹잇감을 위해 오리알을 품어 보기로 한다.
구덩이를 파고 풀을 수북이 쌓아서 그 위에 앉아서 오리알을 품어 보기도 하고
나무토막 두 개를 바닥에 두고 앞발과 뒷발로 엎드려서 품기도 하고
나무껍질로 허리에 칭칭 묶어 보기도 하고...
결국 먹기로 마음을 바꿔서 입 안으로 넣은 순간,
따뜻한 입 안에 오리알을 품기로 한다.
그렇게 꼬박 스무 밤 동안이나 알을 품은 채로 기다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장 놀라운 참을성을 보여주면서
온종일 오리알을 입 안에 머금고 있다가
잘때는 앞발로 꼭 껴안고 아래턱으로 살짝 덮어서 따뜻하게 품었다.
그렇게 외로운 여우는 처음으로 오리알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가끔은 오리알이 먹이라는 사실도 깜빡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리가 드디어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날만을 기다렸던 여우가 입맛을 다셨지만
갓 태어난 아기오리는 여우의 얼굴로 다가와서는 "엄마, 엄마!" 큰 소리로 외쳤다.
당황한 여우가 "난 남자니까, 엄마가 될 수 없어.
그러니까 아빠만 될 수 있는 거지. 그렇지."라고 정정한다.
아기오리는 "아빠, 아빠" 신이나서 소리쳤다.
아기오리는 알 속에서 느낀 아빠를 설명하며 사랑한다 고백하고
난감해진 여우는 먹잇감은 어디가고 웬 아들이 생겼다며 피식 웃는다.
그렇게 외톨이 여우에게 사랑스러운 첫 친구가 생겼다.
오늘 읽은 그림책은 글밥이 꽤 많은 책이에요.
간만에 글밥 많은 책을 읽으려니 왠지 읽기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것 같았죠.
그런데 웬걸 한 장 넘기기 무섭게 벌써 마지막 장이더라고요.
아이들도 아마 그렇게 이 그림책을 읽지 않을까 생각해요.
작가는 늘 못된 캐릭터로 등장하는 여우에 대한 애잔한 마음으로 글을 썼다고 해요.
작가의 그런 마음 덕분인지 '여우가 오리를 낳았어요'에 등장하는 여우는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요.
먹잇감으로 챙겨와서는 뭘 그렇게 애지중지 다루는지
누가 보면 정말 '진짜 아빠' 같아요.
알을 어떻게 해서든 품어보려고 용쓰는 여우의 모습이
웃기면서도 사랑스러운 건 왜일까요?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아이 아빠가 된다는 것이 사실은 마치 이 여우같다고
라하 아빠도 라하가 태어나고 나서도 '아빠'로서 실감이 안 난다고 하더라고요
아이와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점차 '아빠'로서 자각하는 것 같았어요.
엄마는 아무래도 뱃속에서부터 아이를 느끼기 때문에
아빠보다는 조금 더 일찍 자각은 하겠지만
아이를 '내 아이'로 받아들이고 키운다는 건 정말 꼭 이 이야기 같아요
어쩌다 보니 갑작스럽게 엄마, 아빠가 되었고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덜컥 아이가 태어났으니 좌충우돌 하면서 조심조심 키우고 있는거죠
가끔은 화도 나지만 결국 아이가 나를 보는 사랑스러운 눈짓에 화도 스르르 녹고말죠
여우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아기 오리의 얼굴을 보며
먹잇감으로 키웠다는 것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