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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맞게 익은 사랑
최경영 지음 / 부크크(bookk) / 2026년 9월
평점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오십이 지나 꽃을 보니, 사람이 보였다/최경영 시집 『마침맞게 익은 사랑』
50대가 되고 나서 꽃이 더 좋아졌다. 예전에도 꽃을 보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활짝 핀 꽃만큼이나 지는 꽃에도 눈이 간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시간, 한창 피어 있는 순간, 꽃잎이 떨어지고 난 자리까지 보고 있으면 사람의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최경영 시인의 『마침맞게 익은 사랑』을 읽으며 그 생각을 다시 했다. 요즘 시집을 많이 읽었지만, 이 책은 한 사람의 살아온 날들이 담긴 에세이처럼 다가왔다. 장날을 앞두고 막내아들의 교복을 넉넉한 치수로 사라고 당부하는 어머니, 김밥을 먹고 난 뒤 들풀을 다듬어 이쑤시개로 건네는 아내. 시인의 기억을 따라가다가 어느새 내 삶의 한 장면 앞에 멈춰 서게 되는 시집이었다.

책과 작가 소개
『마침맞게 익은 사랑』 | 최경영 시집 | 부크크(BOOKK)
최경영 시인은 2014년 문예지 『시에』 가을호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인 사진작가이기도 하며, 그의 사진은 2017년 울산에서 열린 아시아 버드 페어(ABF) 공식 포스터 사진으로 선정됐다.
시인이 사진작가라서 그런지, 각 부를 여는 흑백사진이 참 멋졌다. 제2부의 달 앞을 지나는 새 세 마리도 좋았고, 제3부의 빛과 그림자 사이로 뻗은 꽃가지도 한참 들여다봤다. 처음에는 꽃이 무슨 색이었을까 궁금했는데, 어느새 가느다란 가지의 선과 꽃송이 사이의 빈자리를 보고 있었다. 시를 읽고 난 뒤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 보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목차
‘시인의 말’에 이어 네 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의 수록작 가운데 몇 편을 골라 정리했다.
제1부|「소매물도길 65」, 「열목개」, 「멸치」, 「소금 꽃」, 「지심도」, 「대오서점」등 18편
제2부|「마침맞게 익은 사랑」, 「물결표」, 「박그릇」, 「꽃잎 발자국」, 「벚꽃」, 「은행나무 가을」등 15편
제3부|「옹달솥」, 「감꽃 목걸이」, 「어머니의 집」, 「목향장미」, 「장날 아침」, 「가설극장의 추억」등 17편
제4부|「들풀 이쑤시개」, 「그래 사랑」, 「오후 3시」, 「수채화」, 「6시 내 고향」등 19편
시 속에 담긴 삶의 장면들
제1부 「열목개」
바다는 하루 두 번 제 속을 열어 길을 낸다
길이 없다고 생각한 곳에서 물이 물러나자 걸어서 건널 길이 드러난다. 그 장면을 읽으며 기다려야만 닿을 수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같은 부의 「소금 꽃」에서는 곰소 염전에 핀 하얀 소금 결정 너머로 뙤약볕 아래 일하는 사람들의 수고가 보였다.
제2부 「박그릇」
이제 남은 일은
빈 그릇 속에
시간을 채워 가는 일
남대문시장에서 밥그릇 두 개를 사는 평범한 장면인데, ‘시간을 채워 가는 일’이라는 말에서 오래 머물렀다. 앞으로 그 그릇에 밥을 담아 마주 앉을 날들이 그려졌다. 함께 사는 정은 그렇게 되풀이되는 끼니에 조금씩 쌓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3부 「옹달솥」과 「어머니의 집」
모두 떠나고 남은 밥상에서 어머니는 늘
설거지 같은 식사를 하신다
‘설거지 같은 식사’라는 말에 마음이 걸렸다. 온 식구가 밥을 먹고 일어난 뒤에야 남은 밥상에서 끼니를 드시는 어머니. 그 두 줄을 읽고 나니 앞서 나온 밥 냄새와 아침마당의 분주함도 다르게 느껴졌다. 따뜻한 옛 풍경 속에, 그때는 미처 살피지 못했던 한 사람의 하루가 있었다.
「옹달솥」에서 어머니의 하루를 보았다면, 「어머니의 집」에서는 그 하루가 지나간 자리를 보았다. 시인은 기억을 더듬어 어머니의 집을 한 칸씩 다시 짓는다. 부엌에는 가마솥과 백철솥을 걸고, 뒤꼍에는 호박과 머위가 자라게 하고, 우물가에는 앵두나무를 세운다. 낮은 사립문까지 달아 놓으면 어머니가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나오실 것 같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당신의 모습은 없습니다
이 한 줄을 읽는 순간, 방금까지 눈앞에 그려지던 집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모깃불 옆 평상이라면 부채질하는 어머니가 계실 것 같아 다시 바라보지만, 그곳에도 모습은 없다. 집을 이토록 세세하게 떠올린 건 결국 그 안에서 어머니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어서였을까. 나도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려 보았다. 방이 어떻게 생겼는지보다 그 안에서 움직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먼저 생각났다.
제4부 「들풀 이쑤시개」
아내가 다듬어 준
들풀 이쑤시개
남산 소월숲 길에서 김밥 한 줄을 먹은 오후, 아내가 들풀을 다듬어 이쑤시개를 만들어 준다. 이 시를 읽으며 나도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사소한 친절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웃고 지나갔을 일이 오래 기억에 남는 건, 그 작은 수고에 나를 생각한 마음이 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두 편
좋은 시가 여럿이었지만, 책을 덮었다가 다시 찾아 읽은 시는 「벚꽃」과 「목향장미」였다. 50대가 되어 꽃을 더 좋아하게 된 내 마음이 두 편을 읽는 동안 조금 더 선명해졌다.
벚꽃
오래 머물지 않아
더 눈부신 생이여
물너울 길로 꽃잎 내려앉자
은빛 윤슬로 웃는 호수
스쳐가는 바람의 발걸음마다
분홍의 비로 흩날리는 기억들
지는 꽃잎 애처로워
사월의 산들바람
잠시 호흡을 멈춘다
예전 같으면 벚꽃이라는 말에 만개한 나무부터 떠올렸을 텐데, 이번에는 호수 위에 내려앉는 꽃잎이 더 선명했다. 꽃이 지는 게 아쉬워 바람마저 잠시 숨을 멈춘다는 마지막이 좋았다. 나도 살아오면서 조금만 더 오래 머물러 주었으면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지나가는 게 아깝기만 했는데, 이제 돌아보면 짧았기에 그날의 표정까지 또렷이 기억나는 순간도 있다. 이 시를 읽다 보니 내게도 그런 봄이 몇 번 있었다.
목향장미
가시를 버린 자리마다
부드러운 꽃을 피웠네
벽을 타고 오른 덩굴은
세상의 모서리를 둥글게 감싸고
은은한 향기,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화려하지 않아 오래 머무는
조용한 미소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소리 없는 위로를 배운다
‘가시를 버린 자리마다’라는 첫 줄에서 마음이 멈췄다. 내게도 나를 지키느라 세웠던 가시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중 몇 개쯤 내려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예전 같으면 굳이 한마디 더 했을 자리에서 말을 아끼고, 누군가 힘들다고 하면 해결책을 꺼내기 전에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주는 사람. 벽의 모서리를 둥글게 감싸는 목향장미를 보며 나도 그런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었다.

책을 덮으며
처음에는 제목에서 ‘익은 사랑’이 눈에 들어왔는데, 다 읽고 나니 ‘마침맞게’라는 말이 더 좋았다. 어머니의 집을 기억 속에서 한 칸씩 되살리는 마음도, 밥그릇 두 개에 앞으로의 시간을 담아 보려는 마음도, 들풀 하나를 다듬어 건네는 손길도 저마다 다른 모습의 사랑이었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에는 가을이 쓸쓸하기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은행나무 가을」의 잎은 바람에 내려앉고, 「어머니의 집」에는 그리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시들을 읽고 나면, 한때 같은 밥상에 둘러앉았던 사람들과 별일 없이 함께 보낸 날들이 떠오른다. 책 속에 그런 인생 이야기가 가득해서였을까. 지나간 계절이 아쉬우면서도 그 안에서 받은 다정함이 생각나 마음이 따뜻해졌다.
가까운 사람에게 선물하기에도 좋고, 내 책장에 두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편씩 다시 읽기에도 좋은 시집이다. 평소 시를 자주 읽는 분은 물론, 시가 조금 어렵게 느껴졌던 분에게도 권하고 싶다. 흑백사진 한 장 앞에 잠시 머물다가 마음이 가는 시를 펼치면 된다. 나는 다음 봄에 이 책을 다시 꺼내 「벚꽃」을 읽고 싶다. 꽃이 이미 지기 시작했다면, 그때는 발밑에 내려앉은 꽃잎을 한참 바라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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