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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계간 창작과비평 1년 정기구독 (2024. 봄 ~ 2024. 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 창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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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민정, 「왜 귀신의 공공성인가?」- 다산과 우리 담론의 모색

'K-담론을 모색한다' 첫 번째 이야기. 가톨릭대 철학과 백민정 교수의 논고를 읽었다. 정약용 철학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고 말하기에는 내가 아는 바가 적어 함부로 이를 수 없다. 그러나 논고에서 저자가 중요시한 논지가 무엇인지는 대략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논고를 읽으며 서구 근대성의 폭력 전혀 예감하지 못했던 다산이 서학을 기반한 실학자이면서 동시에 상제, 천신 그리고 인귀와 같은 귀신에 집중했다는 저자의 포착이 흥미로웠다. 다산에게 '인귀'란 조상의 혼령을 의미하는데 핵심은 "그가 염두에 둔 상제와 귀신은 단순히 개인적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 국가의 제사의례에서 섬김과 공경을 받는 대상이라는 점"이며, "(다산의) 귀신설은 왕조의 정치적 기획 및 운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즉, 결과론적으로는 보수적인 관점에서의 해석이었다는 점이다. 다산이 생각한 상제를 비롯한 천신 그리고 인귀는 군주(군목)과 신민과 대응하며 이것은 천상의 세계와 세속적 조정이 일종의 은유가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저자가 지적한 "귀신의 공공성"이다. 즉, 다산이 귀신을 수단화함은 그것의 "공적 가치"를 헤아렸기 때문이다. 다산은 "상제가 명령한 공과 덕을 천신(들)이 수행하듯이, 지상의 군목도 그러한 공덕을 수행함으로써 천신과 상제에 배향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산의 귀신설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던 나는 그의 논지가 매우 설득력 있으면서도 정통적 의미의 보수적 개혁론자의 주장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주장의 핵심을 제외하고서도 다산은 기타 두 가지 사항을 추가로 강조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의례에서 공경 받는 귀신은) "섬길 만한 (공덕을 갖춘) 귀신"이어야 하며 둘째, 제사의 주관자들인 군목과 후손들 역시 "스스로 공덕을 쌓아야 제사에 임할 수 있다".

p326-327 참고.

까다롭다고 느껴지기까지 한 조건은 아이러니하게도 불가해한 영역으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다산에게 있어 귀신은 전술했듯 현실의 정치적 운영을 수리하기 위한 공적인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제사는 가장 공적인 존재인 천, 즉 상제와 상제의 명령을 수행하는 천신들 그리고 인귀들의 덕성과 공로를 공적으로 기리는 의례"로, "인간에게 제사는 가장 공적이고 덕스러운 귀신의 능력을 본받는 것이며, 후손에게는 이런 공적 존재의 가치를 잊지 않게 교육하는 일이다. 일상 속 제사의례는 모범이 되는 귀신의 공공성을 계승하는 자발적 행위"이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다산의 인상적인 사고를 문장으로 남기고 싶다.

다산은 상제가 흠향하는 인간의 덕과 사특함은 모두 형체가 없는 것이며 형체있는 것의 좋은 냄새나 악취는 상제에게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형체있는 것의 모습을 보고 냄새를 맡으나, 상제는 오직 무형한 덕의 향기와 악의 더럽고 역한 악취만 판단할 따름이다. 오직 공덕만이 귀신이 흠향하는 무형의 제물이다.

p326.

관련이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매번 명절이면 제례와 관련해 시끌시끌한 뉴스가 들려왔던 것이 생각난다. 어떤 음식을 올리고 누가 그것을 담당하며 어떻게 진행해야 함에 관한 문제 등등. 조상의 혼을 섬기는 것이 핵심일진대 그것과는 조금씩 먼 여럿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탕국 대신 마라탕을 올리든 멜론 파이를 올리든 유형의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다만 그것을 올리는 우리의 무형한 덕만을 그들이 흠향하리란 사실을 깨우쳐주는 것 같다.

한 가지 더. 다산의 논지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그가 "효는 부모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무와 함께하는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관계 원리"라 밝힌 점이다. 그는 『다산시문집』 권10에서 이렇게 썼다.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으면 아들이 원망해도 되는가? 아직 안 된다. 그러나 자식이 효를 다했는데 아버지가 자애롭지 않아서 마치 고수가 순임금에게 한 것(*『맹자』에서 순임금의 아버지 '고수'가 살인했을 때 순임금과 그 신하인 '고요'가 이것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묻는 가상의 질문이 등장하는데 순임금은 아버지 고수에게 극진히 효를 다했으나 고수는 그를 자애롭게 사랑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학대하고 죽이려고까지 했다.)처럼 한다면 부모를 원망해도 된다. 임금이 보살피지 않으면 신하가 원망해도 되는가? 아직 안 된다. 신하가 충성을 다했는데도 임금이 보살피지 않기를 마치 회왕이 굴평에게 한 것처럼(*전국시대 초나라의 충신 굴평(굴원)은 당시 회왕의 총애를 받던 '근상'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축출되었다.) 한다면 임금을 원망해도 된다."(「원원」). 다산은 "유학적 관계 원리"를 부모와 자식이라는 가족 관계에서 군신과 신하라는 사회적 관계로 확장한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흥미를 느꼈다. 덮어놓고 자식이 부모를 섬김을 유교적 정도라고 나는 믿어왔고 그것이 대표적인 유교에의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모가 견딜 수 없으리만큼 나를 아프게 한다면 나는 하늘에 나의 불행과 좌절된 운명 그리고 원죄를 읍소할 것이 아니라 나를 아프게 한 그 부모를 원망함이 맞다고 아마도 많은 이를 위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해서. 한 가지 찝찝한 구석이 있다면 이것이다. 다만, '최선을 다했을 때'라는 전제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말이다.

다산은 부모와 자식 관계가 "사적 친밀함만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는 본능적으로 부모에게 효심을 느끼지도 않고 똑같이 마음을 베풀어봐야 부모에 대한 효심 역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교를 생각하면 갑갑하기만 했는데 다산의 논지로 들은 그것은 조금 달랐다. 유학자들은 "부모에 대한 효심을 부모에 한정하지 않았"고, 부모에의 효도란 모름지기 "부모가 사랑하던 이들까지 돌보고 살피는 것"이라 말했다는 것이다. "국가의 태학(성균관)에서, 지방 향교에서, 문중에서 노인과 연장자를 돌보고 고아를 함께 먹인 것은, 효제의 가족적 원리를 일상의 공동체로 확장한 사례"라고 한다. 한 마디로 진정한 의미에서 부모를 이해하고 그에게 효를 다하는 것은 부모의 몫을 헤아리며 그것을 몸소 행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효제 관계가 사적인 친밀함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다산은 정확한 의미의 사회적 공공성을 보이기 위해 효를 가져온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부분이 논고에서 가장 크게 와닿았다. 우리가 사회에 내보이는 '명덕'은 소소하지만 명확한 의미가 되며 그것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함께 누리는 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족이란 "단순히 혈연으로 연결된 생물학적 집단이 아니라 좋은 가치를 공유하고 함께 지켜나가는 공동체"라는 것을.

다산은 조상에게 바치는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오직 명덕(明德)만이 향기롭고, 귀신은 오직 명덕만을 흠향한다고 말한다. 이때의 명덕이란 허망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느끼는 큰 기쁨, 환심을 의미한다. 나의 명덕은 곧 귀신이 좋아하고 흠향하는 공덕이다. 귀신이 좋아하는 것은 친애함과 공경함, 보살핌을 확충하여 우리가 함께 기뻐하는 큰 환심이다.

p331.

유교적 근대성론으로 정약용의 논지를 밝힐 수 없음이 저자의 입장이었는데 나는 그보다 이후의 기술이 흥미로웠다. 현실 세계의 입장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해당 논고는 배경지식이 없는 나로선 조금 읽기 힘든 글이긴 했다. 그러나 한 시간 가량 꼼꼼하게 논고를 정독하고 나서 든 생각은 단순하지만 명확했다. 3월에는, 봄에는 이런 글을 읽어 참 좋다. 처음 읽는 계간 창작과 비평에서 이런 글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고.

2.

이하나, 「보슬피 편집론」 - 김이구, 『편집자의 시간』, 나의 시간, 2023.

p441(촌평)

나는 출판 기획편집자를 희망하는 변방의 문학(호소)인 중 한 명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문예지를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 반성할 일인가 싶다가도 못내 반성하게 된다. 편집자라면 다양한 글을 읽어야 할 텐데 쓰고 읽는 사람이면서 많은 걸 놓치고 살았던 것 같아서. 학교에 있을 때는 도서관 측에서 자체 구독하는 문예지(를 포함하여 잡다한 종류의 많은 지면들)를 종종 읽곤 했었다. 문학동네나 과학동아 정도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나의 관심은 한정적이었다. 주로 신작 시 부문만 빠르게 읽고 그만두는 정도. 그게 다였다. 이하나 편집자 겸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의 기고문을 보고 내게도 변혁의 바람(wind of change)이 필요하다는 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이 마음을 붙들고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

나에게 존경하거나 닮고 싶은 편집자는 없다. 아는 사람이 없는 건 물론이고 편집자란 본래 크레디트 속 이름들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편집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현직자가 관련 업무나 지식을 설명한 출판물을이 많다. 그런 걸 보아도 그렇다. 편집론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보다 더 많이 존재할 편집자는 내 앞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주로 쓰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닐지도 모르고.

김이구의 해당 저서는 편집 시 교정 지식과 어문규범뿐 아니라 편집자라면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태도와 일상적으로 쓰면서도 무심히 넘겼을 법한 출판 상식이 실려 있다고 한다. 나는 기고문에서 해당 저서와 관련해 실린 인용구가 가장 흥미로웠다. 저자는 『편집자의 시간』에서 김이구 선생이 쓴 문장을 인용했다.

하급 편집자는 문장 전체를 뜯어고치는데, 중급 편집자는 문장 절반을 뜯어고친다. 상급 편집자는 지시 대명사 하나를 추가하거나 조사를 바꾸거나 문장부호 하나를 수정해, 필자의 문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오문을 바로잡고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 (…) 상급 편집자의 수정은 편집자가 실토하지 않는 한 심지어 필자가 수정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다.

(본문 48~49면).

저자가 참 똑똑하다고 느껴졌다. 이 인용구를 보고 나서 이 책을 당장 장바구니에 담았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나는 어디쯤일까, 하급 편집자라는 명함마저 달지 못한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상급 편집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들었던 짧은 인용구였다. 나 역시 누군가 내 글을 고쳤을 때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적이 있었다. 한참 뒤에 알았던 사실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상급 편집자의 자질이 풍부했던 인물이었을지도.

자신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그것을 피력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에 출판 편집자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나 같이 목소리가 작아서 타인이 몇 번이고 되물어야 제대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숨는 게 부끄럽지 않다. 글과 책 속에서 편안하고 어딘가 이름이 남겨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행복이 될 테니까. 나는 쓰는 사람이면서 읽는 사람인데, 읽는 사람이기를 더 호소하는 편이긴 하다. 그래서일까. 쓰면서 자주 부끄러웠던 기억들이 머리를 스친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라는 표현은 부덕해 보인다. 나는 조용히 읽고 싶다. 필자조차도 가장 거대한 독자가 바로 자신의 뒤에 있음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곰 같은 독자가 되고 싶다. 한편으로는 여우처럼 예리함을 숨기지 않고 싶기도 하다.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처럼 시시때떄로 모습을 달리하는 '고성능(?)'의 편집자가 되고 싶다.

3.

박상수,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 시 속에서라도」- 민구(『세모 네모 청설모』)와 황유원(『하얀 사슴 연못』)

p417(문학초점)

여러 시집을 읽으며 각 시인의 특성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게 내 수준에서 옳은지 잘 모르겠어서 입을 다물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시론을 쓰는 것만큼 시 비평을 쓰는 게 힘들다. 작품이라면 개별적으로 특별함을 입증할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조금 버겁다. 그런데 그것을 해온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은 묘하게 중독적이고 또 납득이 간다. 문학장에서 온갖 풍파를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라 그런지 선조들의 말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되는 게 그것이다. 나는 이 기고문에서 요즘 젊은 시인들의 특징을 언급한 부분이 재미있었다. 말 그대로 '재미'가 있었다. 시집을 읽을 때 별 생각이 없었는데 누군가 콕 집어서 말해주니 나름대로 그 맛이 있다고 해야 하나.

저자는 "'자아의 비현실감' 상태를 지나서 '자아의 가상화'나 '자아의 메타화'로 연결되는 경향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맞는 것 같기도. 몇 년 전부터 우리는 각종 '부캐'에 노출되어 왔다. 실존적 부캐를 넘어 비실존적 부캐들도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외계인이고 동물이고 가리지 않으며 심지어는 혼종도 발생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미 인간의 범주에서 탈주하기를 거리끼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꾸만 시도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다. '되고 싶다'는 생각은 특히 시에서 유력하게 드러난다. 아무래도 시는 그것 자체로 자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고 다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혹은 '나'를 '나' 아닌 어떤 대상으로 메타적으로 비출 수도 있는 노릇이다. 내가 '나' 같지 않은 현실 때문일까. 나이기를 포기하는 것, 내가 '나' 같지 않게 어딘지 어색해 보이는 것, '나'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하고 싶은 것 등등. 그래서 "현실에서 자아의 성장을 위해 무언가를 시도해볼 구체적인 경험의 기회나 가능성이 상당 부분 막혀 있으니 현실감 없이 약화된 자아를 가지고 실감이 흜해진 (그럼에도 리셋과 리플레이가 가능한) 가상공간에서 경험치를 출적하며 유희적으로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일리가 있다. 적어도 시에서는 그런 게 가능하다. 나가서 퍼지게 놀고 싶지만 돈은 없고 제대로 놀 줄도 몰라서 집안에 박혀 시를 쓰는 나처럼 말이다.

'착한 화자'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언젠가부터 '착한 화자'가 유독 많아졌다고. '못된 화자'들은 어디 가고 다른 이들만 남았냐고. 생각해보니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나는 나의 인성과는 별개로 못된 화자를 쓸 용기가 없다. 못 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정확하겠다. 고약한 말을 할 정도로 낭비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을 때 받을 시선들이 곤란하기도 하다. 이건 정확히 '어느 정도로 못된' 화자인지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 기고문에서 상당 부분 공감했다. 이러한 시류의 탄생에는 "'시 속에서라도 예측 가능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싶다'는 욕망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는 점을 말이다.

"상실감에서 오는 격렬한 멜랑콜리의 감정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상실감 그 자체에 현혹될 경우, 시적 파토스를 가장 강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주요한 정서적 에너지원이 된다." 맞는 말 같다. 우리가 시를 쓸 때 가장 손쉽게 휘두르는 기술이다. 저자는 민구의 화자가 이것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며 의미를 되새긴다. "그러니까 시인은 뭔가 꽉 조이는 방식이 아니라 풀어놓는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고 시 속에서나마 부담을 덜고 평안하게 존재하기를 선택했다고나 할까" 자아의 비대화는 흥미롭지만 때로는 버거울 때가 있다. 우리는 그처럼 심각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그렇구나. 흐리멍텅하게 존재할 뿐이다. 나는 시를 쓸 때 자아의 비대화를 피하지 못하는 편이라서 이런 점이 오히려 흥미진진했다. 견딜 수 없으면 그냥 놔두자. 팔이 아프면 헬륨 풍선 실 손잡이를 그냥 놓자.

황유원의 시집을 논한 글 역시 재미있었다. 본래 황유원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주의 깊게 읽었다. 특히 저자가 "그의 시 안에서 우리는 현실의 잡다한 소음과 거리를 두고 부드럽게 보호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음 속으로. "그가 그려내는 소리와 이미지들이 편안함과 충족감을 느끼는 쪽으로 산뜻하게 최적화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내가 찾지 못한 표현 같아서 반가웠다. 묵언수행을 하며 "마치 신의 음성을 받아아 적는 수도자처럼 가청 주파수 이하의 작은 소리에 집중"하는 그의 시가 나는 좋다.

"존재의 소음을 '최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화'하는 쪽에 맞춰져" 있는 그의 시가 내게 무사평안하게 느껴진다. 저자가 인용한 황유원 시인의 말을 나도 한 번 실어보고 싶다. 나도 내가 즐거우려고, 휴식하고 싶어서 시를 쓴다고 생각한 적이 간혹 있기에. 안전하고 평화롭고 싶다. 아무도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으면서도 나는 조금 특이하고 싶다.

나는 나를 즐겁게 하려고 시를 쓴다.

누가 어디서 내 시를 읽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데, 아마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일단 내가 즐거워야 한다.

시를 쓰는 동안만이라도 즐거워야 한다.

황유원, 「사운드 시론 스케치」, 『현대시』 2023년 2월호, 28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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