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시집을 읽으며 각 시인의 특성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는 게 내 수준에서 옳은지 잘 모르겠어서 입을 다물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시론을 쓰는 것만큼 시 비평을 쓰는 게 힘들다. 작품이라면 개별적으로 특별함을 입증할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조금 버겁다. 그런데 그것을 해온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은 묘하게 중독적이고 또 납득이 간다. 문학장에서 온갖 풍파를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라 그런지 선조들의 말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읽게 되는 게 그것이다. 나는 이 기고문에서 요즘 젊은 시인들의 특징을 언급한 부분이 재미있었다. 말 그대로 '재미'가 있었다. 시집을 읽을 때 별 생각이 없었는데 누군가 콕 집어서 말해주니 나름대로 그 맛이 있다고 해야 하나.
저자는 "'자아의 비현실감' 상태를 지나서 '자아의 가상화'나 '자아의 메타화'로 연결되는 경향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맞는 것 같기도. 몇 년 전부터 우리는 각종 '부캐'에 노출되어 왔다. 실존적 부캐를 넘어 비실존적 부캐들도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외계인이고 동물이고 가리지 않으며 심지어는 혼종도 발생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미 인간의 범주에서 탈주하기를 거리끼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꾸만 시도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다. '되고 싶다'는 생각은 특히 시에서 유력하게 드러난다. 아무래도 시는 그것 자체로 자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고 다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혹은 '나'를 '나' 아닌 어떤 대상으로 메타적으로 비출 수도 있는 노릇이다. 내가 '나' 같지 않은 현실 때문일까. 나이기를 포기하는 것, 내가 '나' 같지 않게 어딘지 어색해 보이는 것, '나'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하고 싶은 것 등등. 그래서 "현실에서 자아의 성장을 위해 무언가를 시도해볼 구체적인 경험의 기회나 가능성이 상당 부분 막혀 있으니 현실감 없이 약화된 자아를 가지고 실감이 흜해진 (그럼에도 리셋과 리플레이가 가능한) 가상공간에서 경험치를 출적하며 유희적으로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았다고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일리가 있다. 적어도 시에서는 그런 게 가능하다. 나가서 퍼지게 놀고 싶지만 돈은 없고 제대로 놀 줄도 몰라서 집안에 박혀 시를 쓰는 나처럼 말이다.
'착한 화자'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언젠가부터 '착한 화자'가 유독 많아졌다고. '못된 화자'들은 어디 가고 다른 이들만 남았냐고. 생각해보니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나는 나의 인성과는 별개로 못된 화자를 쓸 용기가 없다. 못 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정확하겠다. 고약한 말을 할 정도로 낭비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을 때 받을 시선들이 곤란하기도 하다. 이건 정확히 '어느 정도로 못된' 화자인지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 기고문에서 상당 부분 공감했다. 이러한 시류의 탄생에는 "'시 속에서라도 예측 가능하고 안전하며 평화롭고 싶다'는 욕망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는 점을 말이다.
"상실감에서 오는 격렬한 멜랑콜리의 감정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상실감 그 자체에 현혹될 경우, 시적 파토스를 가장 강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주요한 정서적 에너지원이 된다." 맞는 말 같다. 우리가 시를 쓸 때 가장 손쉽게 휘두르는 기술이다. 저자는 민구의 화자가 이것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며 의미를 되새긴다. "그러니까 시인은 뭔가 꽉 조이는 방식이 아니라 풀어놓는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고 시 속에서나마 부담을 덜고 평안하게 존재하기를 선택했다고나 할까" 자아의 비대화는 흥미롭지만 때로는 버거울 때가 있다. 우리는 그처럼 심각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그렇구나. 흐리멍텅하게 존재할 뿐이다. 나는 시를 쓸 때 자아의 비대화를 피하지 못하는 편이라서 이런 점이 오히려 흥미진진했다. 견딜 수 없으면 그냥 놔두자. 팔이 아프면 헬륨 풍선 실 손잡이를 그냥 놓자.
황유원의 시집을 논한 글 역시 재미있었다. 본래 황유원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주의 깊게 읽었다. 특히 저자가 "그의 시 안에서 우리는 현실의 잡다한 소음과 거리를 두고 부드럽게 보호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음 속으로. "그가 그려내는 소리와 이미지들이 편안함과 충족감을 느끼는 쪽으로 산뜻하게 최적화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내가 찾지 못한 표현 같아서 반가웠다. 묵언수행을 하며 "마치 신의 음성을 받아아 적는 수도자처럼 가청 주파수 이하의 작은 소리에 집중"하는 그의 시가 나는 좋다.
"존재의 소음을 '최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화'하는 쪽에 맞춰져" 있는 그의 시가 내게 무사평안하게 느껴진다. 저자가 인용한 황유원 시인의 말을 나도 한 번 실어보고 싶다. 나도 내가 즐거우려고, 휴식하고 싶어서 시를 쓴다고 생각한 적이 간혹 있기에. 안전하고 평화롭고 싶다. 아무도 건드리지 말았으면 좋겠으면서도 나는 조금 특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