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넵의 비밀 편지 - 터키 현대 동화 푸른숲 어린이 문학 11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홍정아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 <제이넵의 비밀편지>. 서점에서 단숨에 읽고, 집으로 달려가서 컴퓨터를 켜고 주문했다. 그만큼 소장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글자 수가 큰 것을 감안하더라도 285페이지나 되는 동화책치고는 긴 책을 서점 앉은 자리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중간 중간 큰소리로 웃고 싶은 걸 참으면서.

터키에 사는 아이들. 우리나라로 따지면 초등학생인 ‘아흐멧’이라는 남자아이와 ‘제이넵’이라는 여자아이가 주고받은 편지가 이 책을 구성하고 있다.

때때로 tv 여행프로그램에서는 나오지만 나에겐 생소한 나라, 터키. 사람 이름도 조금 생소해서 남녀 구분이 가지 않았는데 앞부분을 읽다 보니 ‘아흐멧’은 남자아이였고, ‘제이넵’은 여자아이였다.

제일 처음 편지 <아메리카를 지은 건축가>를 읽으면서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생각이 났다. 장학사가 온다고 하면 수업을 리허설하고, 발표할 사람도 지목해놓고 긴장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책에서 긴장한 아이들이 하는 실수가 너무 웃겼다. 여기에 제이넵의 답장 <아빠들은 모두 1등> 역시 나의 경험과 완전히 똑같아서 놀라웠다. ‘내가 학교 다닐 땐 말야..’ 하고 이어지는 말들이 우리 부모님하고도 너무 흡사해서.

이어지는 편지들. 다 주옥같은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상적인 편지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살아가다보면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어른들은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고 하지만 열심히 하는 것과 성공이 반드시 일치하지만은 않다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편지. <열심히 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어른의 삶이 아이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가장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 누구나 한 번 쯤 경험해보았을 에피소드. <거친 말>과 <애국자>. 여기서 ‘어른들의 위선’ 을 보여준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아이들 앞에서 어른들은 흔히 거친 말들을 쓴다. 이를 아이들이 따라하니까 곤란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을 보여준 <거친 말>.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심화된 편지 <애국자>에서는 아이들에게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연설을 한 애국자가 실생활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위선자로 등장한다.

책을 읽는 내내 책장이 술술 넘어가고 가볍지만,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보니 편지의 순서가 매우 치밀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한 편지가 던져주는 주제가 있으면 그 편지를 받은 아이가 그 주제를 심화시키는 에피소드를 써서 그 주제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어지는 - 웃기지만 웃을 수 없었고, 마음이 서늘해지기까지 한 - 집착에서 비롯된 어른들의 어리석음을 보여준 편지 <천재로 키우고 있다>. 아이를 천재로 만들려고 천재들의 어눌한 특징을 아이들에게 일부러 심어주는 어른의 모습에서 어떤 공포심마저 들었다.

비슷한 맥락의 <딸만 여덟인 아빠>는 여성단체 세미나 주제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남아선호사상의 폐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문제에 대한 ‘제이넵’의 부모님의 대화 역시 논쟁을 불러일으킬만한 에피소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책에 나온 편지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어른들의 이중성을 희화화하고, 아이들은 순수하다는 도식적인 에피소드만은 나오지 않는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편지에는 좋은 어른의 모습, 말 그대로 어른스러운 멋진 어른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또 <요즘 아이들은 대단하다니까>에서는 승부에 집착한 어른들보다 오히려 더 어른스럽게 처신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비춰준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었고 많이 웃었던 편지는 <희생적인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 ‘희생’이라는 개념을 알려주기 위한 선생님들의 노력, 이를 받아들이는 아이의 반응에 깔깔대면서 웃었다.

또 어른들에겐 생존의 문제가 달려있을지도 모르는 심각한 문제도 아이들에겐 그저 웃음이 나는 즐거운 사건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노동조합에 소속된 ‘아흐멧’의 아버지가 회사 사장을 만나는 에피소드를 그린 <손님이 계실 때에는>,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하나?>라는 편지에 아이들의 투명한 시선이 느껴졌다.

책안에서 보여주는 어른과 아이의 모습이 다소 과장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현실을 반영한 드라마도 현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듯이 재미를 위한 약간의 과장도 글을 만드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유쾌하고 엉뚱하고 '재기발랄'이라는 단어가 절로 생각나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한 건 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을 풍자한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어른들을 풍자함과 동시에 세상엔 너무나 다양하고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모습에서 인생을 좀 더 풍요롭고 융통성 있게 살아나갈 수 있는 지혜를 보여준게 아닌가 싶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교활하지 않은 유쾌한 처세술을 터득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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